본문 바로가기

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처녀의 원혼

 한창 고구려의 충신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하루아침에 일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삼족이 멸족되는 일이 수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적으로 몰러 참살당하게 된 충신들 중에 이맹술이 끼여 있었다
이맹술은 원래 고구려 선대왕 때부터 충신으로 판서의 관직에 있던 대감이었으나, 왕건이 나라를 세우게 되어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이군불사라면서 한사코 버티었다.
왕건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당장에 죽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 삼대 일족을 어린아이건 계집이건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몰살토록 하라! 추호의 사정을 두는 자는 살아 남지 못하리라!"
이러한 어명이 떨어지자 군사들은 일제히 이맹술의 집으로 달려갔다.
군졸들은 백여 간이 넘는 이 대감의 집에 불을 지르고, 남자들은 물론이고 그 권속 노비까지 모조리 참하였다.
불빛은 충천하여 하늘을 밝게 비추는데, 여기저기서 아우성 소리가 악다구리 끓듯 하였고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맑은 공기를 찢었다.
그런데, 군사들을 이끌고 온 포도 대장이 이 대감의 부인과 딸을 찾아 마악 내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마치 기다리기나 했다는 표징으로 엄숙하게 열 두 폭 긴치마를 이끌고 걸어나오는 여인들이 있었다.
하나는 사십오륙세쯤 되어 보이는 기품이 고귀한 부인과, 또한 여인은 갓 피어나려는 꽃봉우리같이 아름답고 선녀같이 날렵한 몸 맵시를 가진 처녀였다.
포도 대장과 군사들은 멈칫 뒤로 물러섰다.
그녀들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사뿐사뿐 군사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웬일로 밖이 저토록 소란하느냐?"
살기를 면 군사들 앞에서 위풍 당당하게 위엄있는 어조로 물었다.
군사들은 그녀들을 바라보고 그만 입이 얼어붙었다. 말문이 막힌 포도 대장은 신음 소리를 냈다.
(음,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로군. 천하 절색인데, 죽이긴 아깝구나.)
포도대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공손히 말했다.
"어명이오. 만고 역적 이맹술의 삼대 가족을 몰살하고 그 노비 권속짜지 참살하랍시는 어명이요. 부인, 순순히 왕명을 받으시오"
부인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포도 대장의 말을 듣고 있다가
"알겠노라. 지아비를 따르는게 열부의 도리거늘, 망설일 게 무엇이겠느냐? 자, 너희들은 밖으로 물러가 기다리고 있거라. 아가. 안으로…"
하고. 준엄한 눈짓으로 딸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포도 대장이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우선 그녀들을 살려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방문을 박차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가 내실 문읕 와락 열어 젖뜨리자. 방안에서는 마악 은장도를 목에 대고 찌르고 있었다.
딸은 옆에서 부인의 마지막 자결하는 순간을 지켜보며 오열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부인은 중엄한 표정으로 딸을 나무라고 있었다.
"아가야! 고고한 아버님의 유훈을 받들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결하는 대에 무슨 망령된 울음소리냐? 너도 어서 준비를 하여라!"
낭자도 억지로 눈물을 감추고 칼을 꺼내 들 찰나였다.
포도대장은 와락 달러들어 부인의 목을 겨누고 한 치나 들어간 칼을 뽑아 던져 버리고 낭자의 팔을 와락 낚아챘다.
"두 분 잠깐! 잠깐만 참으시오. 두분마저 죽게 되면 이씨는 아주 멸족이라, 불의의 이름을 어느 누가 씻을 수 있으리요? 부디 살아 남아 부친의 오명을 벗게 하시고 치욕을 씻게 하심이 가할 줄로 아오."
모녀는 포도 대장의 뜻밖의 말이 깜짝 놀랐다.
역적을 도와주면 어떤 엄벌이 내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멈칫하고 주저앉았다.
마침내, 포도 대장은 두 모녀를 이끌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건은 어전에 좌정하고 있었다.
"아뢰오. 역적 이맹술의 부인과 소저를 잡아 대령하였나이다. 그들의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하오나, 두 모녀의 미색이 그대로 죽이기엔 너무나 아깝도록 천하 절색이오니 대왕은 굽어살피소서."
왕건은 용상에서 아래를 굽어보여 두 모녀의 행색을 살폈다.
왕건도 사실 그의 가족이 미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역적 이맹술이 뼈에 맺히도록 미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맹술이가 애왕인 자기와 생각을 달리 두기 때문에 도저히 살려 둘 수가 없어서 죽인 것이고 표본을 보이기 위해서 참형한 것 이었다.
왕은 이윽고 두 모녀를 내려다보다가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측은한 감정이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역적의 처자가 아닌가! 후세의 본보기라도 그들은 절대로 살러 둘 수는 없었다. 대왕은 드디어 결심했다.
"여봐라 ! 저 두 모녀를 모든 관료들의 수청을 들게 관기로 만들어라. 내 이 자리에서 저들을 참형하는 것이 마땅할지나 그의 미색이 절모함을 참작하여 특별히 살려 두는 것이니 잘못이 없도록 하라!"
왕의 어명이 떨어지자 그녀들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부인이 아뢰었다.
"상감마마.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오나, 욕된 목숨을 더 이상 부지하기는 싫사오니 그저 바라옵건데 바삐 죽여주소서. 저희 모녀를 불쌍히 여기시와 마지막 자비를 베푸소서."
낭자도 머리를 조아렸다.
"역적의 자식으로 남아 명예롭지 못한 삶을 누리기보다는 깨끗한 죽음의 길을 택하겠사옵니다. 죽여주소서"
그러나, 왕건은 용안에 주름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고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낭자와 부인은 자결도 못 하게 되어 별수 없이 관기로서 끌려갔다.
거기서 그녀들은 가무 음곡을 배우고 기생으로서의 예의 범절을 몸에 익혔다. 이윽고, 그녀들은 관기로서 최초의 수정을 들어야 할 날이 닥쳐왔다.
낭자는 어머니를 붙잡고 한없이 흐느꼈다.
원래 낭자에게는 어릴 때부터 맺어놓은 약혼자가 있었다.
그의 부친 이 대감과 가장 절친한 친구인 명조판서 김시호의 외동아들이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언약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왕건이 유업을 달리하매 뜻이 있는 이 대감은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고 지조를 지켰기 때문에 왕건으로부터 역적의 오명을 받게 되었고, 삼족이 멸족하게 된 것이다.
김시호는 처세에 빨라 재빨리 왕건을 섬겨 병조판서로 눌러앉자 새 왕조 밑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중이었다.
차차 그의 외동아들이 나이가 들게되자, 혼처를 구하게 됐다. 그래서 장안 명문 집 규수들을 물색중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들은 요지부동 장가를 가지 않겠노라고 버티었다.
그는 이 대감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높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적당한 처세술에 불만을 품고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자나깨나 낭자를 생각하고 그리워하였다. 그는 풍문에 그들 모녀가관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는 모녀의 구명 운동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누가 감히 역적의 처자들을 도우려고 하겠는가?
그는 부친에게 애원했다.
"아버님, 낭자를 구출해 주십시오. 낭자가 아니면 죽어도 결혼하지 않겠읍니다. 아버님, 소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꾸는 싸늘했다
"뭣이 어째 ? 낭자와 성혼하겠다고? 아니, 너 정신이 있느냐? 지금 세상에 역적을 도우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 쯤은 알고 하는 소리냐? 안 된다.아비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하오나 아버님, 낭자와는 제가 어릴쩍부터 정혼한 사이가 아닙니까? 인제 와서 약속을 저버리심은 군자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하옵니다"
"'잔소리 마라 ! 낭자와 정혼을 한 것은 이 대감이 판서직에 앉아있을 때의 일이다. 어째 지금 그가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는데도 그 가족과 연분을 맺을 수 있단 말이냐? 도저히 안될 소리다. 한때의 언약은 이미 지나간 헛소리 있느니라."
"아버님, 덕이 높으신 아버님께서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저는 죽어도 다른 곳으로 장가들지 않으렵니다."
아들이 홀연히 말하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아니, 이 집안 망칠 놈 같으니라구! 뭣이, 망발이라구! 꼴도 보기 싫다. 썩 물러가 버려라!"
단연코 용서 못 하겠다는 듯이 소리소리 질렀다.
한편 낭자가 수청 들 시간이 닥쳤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관내 대칭 위에선 여러 대감들이 곤드레가 되어 고성방가 하고, 관기들은 그들의 청을 일일이 붙어 주기에 바빴다.
그를 중에서도 낭자의 자태는 군계일학이었다.
고귀하고 도도하게 기품이 넘쳐흐르는 낭자를 보고 고관 대작들은 모두 시선을 모았다. 저마다 낭자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오늘의 주빈은 개국공신 명자춘 장군이었다.
아첨을 좋아하는 고관대작들은 으레 기생들 중에서 첫손 꼽히는 명기를 그날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낭자도 명자촌 장군의 처소로 불러 가제 되었다.
낭자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가슴이 조그만 비수를 품었다.
사뿐사뿐 열 두 간 대청을 걸어가는 낭자의 뒷모습엔 댕기가 넘쳐흘렀다.
마루를 가로질러 서서히 명장군의 침소로 향하는 낭자의 가슴엔 온통 약혼자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깨끗한 몸과 마음을 줄 수 없다는 회한이 뼈저리게 파고들었으나, 그녀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부친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약혼자를 위해서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선 자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고 위하는 처녀의 순결한 일편단심으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려는 것이다.
그날 맘, 낭자는 명 장군의 침실 바로 앞에서 가슴에 칼을 꽂고 자결해 버렸다. 명 장군이 여인의 가냘픈 비명 소리에 눌라 뛰어나왔을 때는 이미 낭자의 가슴 깊숙이 날카로운 칼날이 꽂힌 뒤였다.
마침내 낭자가 목숨을 버렸다는 소문이 좌악 퍼지고 낭자의 모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그, 불쌍한 것. 차라리 잘 죽었노라. 절개를 굽히고 구차한 목숨을 유하느니 지조를 지켜 여자의 도리를 지킴이 옳았느니라."
하면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밤새도록 울었다. 삼일이 지나도록 통곡을 그치지 않고 서럽게 울었다.
그런데 삼 일이 지난 날 아침. 그녀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히 여기여 방문을 열어 보니, 방 한복판에 목을 매고 축 늘어진 낭자어머니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기생들은 외롭게 죽어간 낭자와 낭자 모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십 구일제를 지내기로 하엿다.
장안의 명기들과 수많은 한량배들이 구름같이 몰러들어 정절을 지킨 그를 모녀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조상객들은 그들 모녀가 역적의 처자라는 것을 탓하지 않고 다만 그녀들이 의리를 지킨 것만을 칭찬하였다.
매일 밤낮으로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몰러들었고, 기생들은 저마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부러워하기까지 하였다.
모녀의 상청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꽃을 바치면 무슨 병이든지 낫고 근심 걱정이 금방 사라진다고 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장안 사람들은 다투어 모녀의 상청에 꽃을 갖다 바치고 필을 하곤했다.
이렇게 소문은 하루가 지난날 밤이었다. 그날도 관기들이 모여 앉아 상청 앞에서 잡담을 벌이고 있었다.
갑자기 기생들은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며, 머리끝이 곤두서는 무서움에 횝싸였다.
머리칼이 쭈빗쭈빗 해졌다. 몸이 오싹해진 기생들은 슬그머니 우르르 몰려나가 제각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후, 상청에 놓인 마루쪽에서부터 암운이 일더니 괴상한 울부짓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으흐흐·‥ 히 흐흐흐히 히 ·"
들릴 듯 말듯 끊일 듯 이어진 듯 하며 울음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러 왔다.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키며 공포에 질러 있었고 서로의 얼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괴상한 소리는 아득하게 사라져 갔다.
그 다음 날부터 기생들의 집 안은 텅빈 것처럼 쓸쓸하기 짝이 없었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한산하기만 했다.
한편 병조 판서인 김 대감은 사랑방에서 그의 사돈될 영감과 마주 앉아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 그놈이 고지식한 데가 있거든 너무 그래서 탈이지만 이담에 성인군자가 될 기질이 다분하단 말야. 여보 사돈 대감, 어떻소? 대감 댁 규수가 우리 집에 온다 해로 별로 기울거야없지 않소? 아무리 규수가 미색이 뛰어난다 해도 우리 아들놈을 못 따라 갈지도 모르잖소? 껄껄껄껄…"
"아니 여보 대감. 아들을 칭찬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애기를 얕잡을 수는 없을 거요. 하하하"
서로 주거니 받거니 농을 하고있었다.
그 날은 바로 명조판서 외아들의 결혼식 날이었다.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도리가 없이 그는 결국 강제로 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 날 저녁, 신부가 신랑집이 당도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지자, 신랑은 지난날의 감정을 잊어버린 양, 첫날밤을 치르게 되었다.
신랑이 신방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신부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자기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온몸이 오싹하게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움을 느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대담하게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얼마 후. 신부의 옷을 벗기고 촉두리와 삼색채단 비단옷을 옆으로 밀어 놓고 이부자리 속으로 신우를 끌어 들였다.
그때였다.
별안간 신부는 온 몸을 부들부들 멀면서 입을 막 벌리고 아무 말을 못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 신부의 몸을 만져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아무렇지도 않던 신부의 몸이 일시에 뜨거운 불덩이같이 달아올라 있지 않는가?
그는 섬뜩하여 신부의 몸에서 손을 얼른 떼고 말았다..
그러자. 신부는 점점 의식불명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몸이 물덩어리처럼 달아 고열로 신음을 하면서 인사불성이 된 것이다.
신방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어머니!"
그는 무작정 어머니의 침실로 뛰어가 어머니를 깨우고 사연을 얘기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의원을 부른다. 약을 달인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이거, 죽은 낭자의 귀신이 붙어서 그런가 보오. 원혼이 되어 나타나 애꿎은 내 딸만을 볶아 죽이려나 보오. 아이구,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하면서 사랑방을 들락날락하였다.
아무튼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여기저기서 비복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암운이 덮쳐들기 시작했다.
"그 낭자가 기생이 되었다가 자결했다지 않아? 아마 그 원혼이 우리 새 아씨께 붙은 모양일세 그려. 대감 나리께서 잘못하셨지, 그렇게도 기품있고 착하디 착한 요조숙녀를 마다하고 뿌리쳤으니 죄받을 만도 하지."
"이 사람아, 속없는 소리 말게. 누가 역적의 자식하고 혼사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런 대갓집에서, 큰일 날 소리 두번 다시 하지 말게. "
이윽고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신부는 아침이 되자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말짱하게 나았다.
게다가 시부에게 아침 문안까지 드리며 즐겁게 웃곤 하였다. 신랑은 어안이 벙벙하여 신부를 새삼스레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부는 유순하고 착하고 예쁘게만 보였다. 손톱만큼도 험잡을 데가 없었다.
신랑은 신부가 사랑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더욱 자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 신부를 불쌍히 생각하였다.
기상 낭자의 기억은 차차 그의 머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틀 밤이 찾아왔다.
신랑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고 주저했으나, 마침내 또다시 신방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어제와는 달리 방긋 웃으며 자기를 맞아 주었다.
그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는 와락 달려들어 신부를 껴안고 웃을 마악 벗기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신부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신열로 신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온몸은 뜨거운 화로같이 달아올랐다.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고열로 앓는 소리로 고요한 방안이 음산했다.
마침내 신랑은 더 참지 못하고 방안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는 등골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그 다음부터 신랑은 절대로 신방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대감은 이런 아들이 병신스럽다고 노발대발하며 야단을 쳤으나 신랑은 도대체 신부의 방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럴수록 그는 자기를 의지하고 시집이라고 오게 된 신부가 가여워졌고 사랑스러웠다. 차차 시일이 지나자 신랑은 사랑하는 신부를 못 보게 만드는 전의 약혼녀인 낭자가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겁에 질러서 신방을 치르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잠시 며칠간만이라도 휴양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외갓집으로 보낼 채비를 차렸다.
"너 정신이 혼미하여 몸도 쇠약해졌으니 이 아비 보기가 막하구나, 며칠간만 외가에 가서 푹 쉬고 오너라.''
그 때쯤이면 신부도 신병이 나아질 것이다.
대감은 자비롭게 아들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종자 두 명을 딸려서 외갓집으로 보냈다.
아들은 마지못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길을 떠났다.
그들 일행이 떠난지 닷새가 되자 거의 외가에 가까와졌다.
인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마악 고개 중턱까지 올라갔을 때였다.
갑자기 그가 탄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앞다리를 번쩍 쳐들고는 위로 맹렬히 달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바람에 신랑은 중심을 잃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종자들이 달러와서 쓰러진 사람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의 이마에서는 검붉은 피가 철철 쏟아지고 있었다. 얼굴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종자들은 어쩔줄을 몰라 쩔쩔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철철 쏟아지는 피가 괴상하지도 얼굴이 아닌 다른 곳으로는 절대로 퍼지거나 떨어지지 않았다. 오직 얼굴에만 번질 뿐이었다.
종자들은 당황한 중에도 이상하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피가 그토록 많이 흘러서 핏기가 가셔야 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도망간 말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종자들은 어이가 없었으나. 주인이 다쳐도 끄덕하지 않는 것만을 신통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외가로 가지않고 되돌아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마를 다친 후 닷새가 지나도록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도무지 멎을 기색이 없었다.
그의 상처는 영 나을 가망이 없었다. 피는 매일 쏟아져 흘렀다. 인젠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여겨졌다. 집안은 초상을 치를 듯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신부는 남편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몹시 애를 썼다. 별의별 약을 다 쓰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나 모두가 헛수고 였다.
그는 차차 수척해지고 피골이 상접하여 삐만 앙상하고 두 눈만이 퀭하게 뚫려 있을 뿐이다. 이제는 죽는 날 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 또 며칠이 지났다. 그날은 낭자와 그의 어머니가 자결한 지 꼭 사십 구일째 되는 날이었다.
신부는 남편의 시중을 들다가 깜빡 잠에 빠졌다.
밤이 깊어 있었다.
주위는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데 별안간 신부의 눈앞이 환히 밝아왔다.
신부는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서서히 그 환하던 빛이 사라지고 그 사이로 두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신부는 기절초풍을 하게 놀랐으나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잠자코 두려움에 떨려 들면서 그네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두 여인은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가야, 오늘밤만 지나면 우리는 천상으로 가야 하는 거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원수는 누가 갚는단 말이냐?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했거늘 철석같은 맹세를 저버리고 다른 집 짐규수와 혼인을 하다니, 그런 죽일 놈은 내가 손수 붙잡아다가 옥황상제께 본보기를 보여 줘야겠다."
그러자, 옆에 섰던 젊은 여인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어머님, 그이가 무슨 씻지 못할 죄를 졌겠읍니까? 미운 것은 그 이이가 아니라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 인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니 어찌 그를 원망하시나이까?"
어머님, 그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대로 놔 두셔요. 제발 용서해 주셔요."
"그렇다면 어쩌겠느냐? 네 마음이 정녕 단념할 수 없다면 낸들 어쩔 수 없다마는…"
"지금 그이는 어머님이 부신 형벌로 매일 피를 흘리며 괴로와하고 있읍니다. 일편단심 낭군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어찌 그이를 이 세상에 남겨 두고 혼자 떠날 수 있으리요마는 이 몸의 행복을 위해서 그이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읍니다. 어머님, 그이를 살려주셔요.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읍니까?"
젊은 여인이 또 다시 애원을 하자 노부인은 입을 열고 천천히 말을 했다.
"네가 졍 그렇다면 별수 없구나. 그렇다고, 사람이 아닌 우리가 어찌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느냐? 다만 그 집에 사람이 있어 지극한 정성을 드리고 오대산 꼭대기에 가면 삼백년 묵은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굴이 조그맣게 뚫려 있을 것d;니라. 그 속에 줄이 널려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생혈초라는 제비풀과 비슷한 것이 있으리니 그것을 캐어다가 삼일 저녁을 목욕 재계하고 달여 환자에게 먹이면 즉시 살아날 것이니."
"어머님, 감사하옵니다. 그이를 사랑하는 신부가 이 소식을 들으면 당장 오대산으로 달려 가오리라. 결국 그 신부의 지극한 정성은 우리 귀신들을 이겨내고 말았나이다"
"아가야, 벌써 먼동이 더 오는구나! 어서 서둘러 채비를 차려라!"
노 부인이 젊은 여인의 손을 잡고 황급히 잡아끌자 눈 깜짝할 사이에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신부는 얼든 남편의 가슴에 귀를 갖다대고 안색을 살폈다.
아직도 남편은 가는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푸 안도의 숨을 내쉬고 조금 전이 꾼 꿈을 더듬었다.
(정말, 괴상한 꿈이구나.)
그것이 마치 꿈 속이 아니라 생시와 같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튿날, 신부는 고행의 길을 떠나 오대산으로 향했다.
지난밤 꿈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일절 말하지 않고 험한 산길을 기어올라갔다. 거기서 그는 꿈속에 귀신들이 말하던 대로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부는 귀신들에게 무수히 감사를 하면서 굴로 찾아 들어가서 생혈초라는 것을 뜯어 가지고 내려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 목욕 재개하고 삼일 밤낮을 정성껏 약초를 달여 신랑에게 먹였다.
과연 삼 일이 지나자 남편의 피가 흐르는 증세는 씻은 듯이 나았다.
인재는 원기도 회복되고 제법 뜰을 거닐기도 하였다.
신부는 신랑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여보, 그 낭자는 지금도 저 세상에서 당신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어요. 비록 꿈이었지만 제귀에 똑똑히 들렸어요."
"으…응…"
오래만에 둘이 침실에 들었을 대는 삼경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삼라 만상이 고요히 잠들고 있을 때 이제야 생기를 찾은 신랑 신부는 서로의 정을 통할 수가 있었다.
동녘에 오른 둥근해가 단꿈에 빠진 젊은 부부를 일깨웠다.
그들은 둘이서 함께 부모님을 뵙고 문안을 드렸다.
"어머님, 저희 둘의 사랑이 이토록 깊어진 것은 낭자의 덕택이으니, 앞으로 제사를 지내 주셨으면 하옵니다."
이 말에 부모네도 크게 느끼고 그 후로 낭자 모녀를 위한 사당을 짖고 극진히 제사를 올러 주었다는 것이다.

 

 


  옛 이야기(고전) - 초립동이 장원

  옛 이야기(고전) - 길순이의 기적

  옛 이야기(고전) - 도승과 이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