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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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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15대 광해군에게는 많은 후궁들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와 옹주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 중에 정윤이라는 부마가 있었는데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특히나 명마를 고르는 안목이 비상했다.
어떤 말이든 그가 한번 보고 좋고 나쁜 점을 지적하면 틀린 점이 없이 척척 들어맞힐 정도로 귀신같은 눈을 지녔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성궁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그의 뒤에서부터 말의 편자소리가 나기에 뒤를 돌아다보니 비쩍 마른 말이 조그마한 짐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비실비실 하며 힘없이 정윤이의 앞을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길을 비켜섰던 그는 무심코 그 말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은 축 늘어졌고 등뼈는 올라가 붙었으며 비루먹은 털은 군데군데 엉성하게 빠져서 그 몰골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정윤은 이 말을 어떻게 보았던지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 나에게 팔지 않겠소? 후히 값을 치를테니 말이요.』
『예? 그게 사실입니까?』
마부는 귀가 번쩍 뜨이는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사실은 이 말이 하도 비루먹어서 누굴 거저 준데도 받아가지 않을 정도랍니다. 공연히 날 희롱하시느라고 그러시는 겝죠 ! 』
마부는 이내 자기를 희롱하는 말이라는 듯 상대를 안하려 들었다.
정윤은 기가 찬 듯「허허어」하고 웃더니 기어코 마부를 끌고 자기 집에까지 와서는 마구간으로 가서 그 중에서도 가장 살찐 말 한 마리를 끌어냈다.
『이 말과 저 말과 바꿉시다. 당신에겐 돈보다 이 편이 더 날테니 말이요』하고 가장 팔팔해 보이는 말을 꺼내 이렇게 말하자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마부는
『정……정말 바꾸시는 거죠? 나중에 후회하지 맙쇼 ! 』
하고 다짐을 하더니 다시 빼앗길까 싶었던지 재빨리 끌고 가버렸다.
그런 마부의 뒷모습을 싱긋이 웃으며 바라보던 정운은 그날부터 비루먹은 말의 마구간을 별도로 짓고서는 열심히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그 비루먹은 말은 맘껏 놀고 먹은 탓인지 몰라보리 만치 살이 오르고 윤기가 흘러 이젠 그전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는 훌륭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인지 하루하루 성미가 사나워지더니 함부로 마구간을 걷어차고 날뛰어서 아무도 함부로 그 말을 보살필 수도 없게 되었다.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기승을 부릴 땐 서너 사람의 마부도 당해내지 못하고 말발굽에 채이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길 가던 노승이 시주를 얻으러 왔다가 기승을 부리고 날뛰는 말을 보게 되었다.
이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승은 정윤에게 가서
『이 댁 마구간에는 참으로 보기드문 명마가 있소이다 그려 ! 그런데 저토록 마구간에만 가두어 두면 명마의 정기를 상할 우려가 있으니 들판에 풀어 노닐게 하옵시어 맘껏 뛰놀게 하소서 ! 』
하고는 돌아갔다.
정윤은 노승의 말에 따라 다음날부터 직접 말을 타고 성밖의 풀밭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어찌나 사나운지 정윤 같이 말을 잘 타는 사람이 올라타도 길길이 뛰어오르면서 날치는 바람에 한동안은 애를 먹게 마련이었다.
일단 대문 밖에만 나서면 화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날으듯이 치달리니 길가에 나온 사람들은 마른 하늘에 횡액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들간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싱그러운 풀 냄새와 맑은 공기를 어쩔 줄 모르고 들이마시고는 힝힝 거리며 날뛰고 뛰놀라치면 온 주위가 자욱하니 먼지로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정윤은 이 말을 타고 하루종일 죽을 고생을 하고 실갱이를 한 끝에 겨우 겨우 길을 들일 수가 있었다.
길길이 날뛰던 말도 고삐를 잡아 나꾸면 순순히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화창한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순하면서도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명마는 정윤의 마음을 더 없이 즐겁게 해 주었다.
새로운 안장과 장식으로 새롭게 단장하고는 멀고 가까운 곳 없이 언제나 타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윤의 명마는 서울 장안은 물론 궁궐 안에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광해군은 성질이 포악하고 난폭했지만 영웅적인 기재를 지닌 임금이었던지라 명마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대단했었다.
이런 광해군에게 이 소문이 들어갔으니 온전할 리가 없는 노릇이다.
『경에게 아주 훌륭한 명마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짐이 곡 한번 보기를 원하노라 !』
이렇듯 광해군의 분부가 나리고 나자 정윤의 마음은 불안할대로 불안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한번 보기나 하자는 임금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는 처지다.
그리하여 말을 끌고 왕 앞에 이르자 왕은 첫눈에 명마임을 알아보았다.
『그 말 참으로 갈개가 있어 훌륭한 말이구나 어허 ! 훌륭한 말인지고 ! 』
광해군은 그 말이 여간 탐이 나지 않는지 연상 쳐다보며 칭찬을 했다.
그날 이후로 광해군은 정윤만 보면 명마의 칭찬을 했나.
광해군으로서도 차마 부마로부터 말을 빼앗을 체면이 서지 않았던지 달라는 소린 못하고 칭찬만 늘어놓았다.
그랬는데도 정윤은 일체 말을 임금에게 바칠 뜻을 비추지 않자 광해군은 억지로라도 빼앗을 욕심이 울어나기 시작했다.
그리되자 제아무리 부마라 할지라도 임금한테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미움을 사게 된 정윤은 기어코 애매한 죄를 뒤집어쓰고 경상도 어느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윤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광해군은 그 이튿날부터 정윤의 명마를 제것인 양 타고 다녔다.
궁궐 마당에서도 타고 멀리 사냥을 갈 때도 타면서 지극히 말을 사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해군은 대궐 안에서 말을 타고 소요타가 잘못 말의 성미를 건드려 말이 날뛰는 바람에 그만 말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광해군의 그 포악성이 또 폭발하고 말았다.
『저놈의 말을 실컷 매질하도록 하라!』
광해군이 노발대발하며 펄펄 뛰니 신하들은 우루루 달겨들어 말을 붙잡고는 모진 매를 가하기 시작했다.
말은 아픔을 느끼는지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입에서는 멈추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별안간, 양순하게 맞고만 있던 말이 갈개를 번쩍 세우면서 히힝하고. 우렁차게 울부짖는가 싶자 앞발을 번쩍 쳐들며 매질하는 사람들에게 들어덤비며 사납게 발길질을 하더니 다음 순간, 눈 깜작할 사이에 한질이 넘는 대궐 담을 훌쩍 뛰어 넘어 도망가고 말았다.
『저 런 저 런······저놈 잡아라 ! 』
광해군이 아무리 분해하고 날 뛰어도 허사였다.
명마는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서울 장안을 모조리 뒤져서라도 꼭 잡도록 하여라!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내 영을 거역했으니 그냥 둘 수 없노라 ! 』
광해군은 횡포를 부리며 할 일없이 돌아온 군졸들에게 이렇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명마의 종적은 그 길로 끊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었다.
예 정윤의 집은 물론 서울 장안과 인근 고을까지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건만 하늘로 날아갔는지 땅 속으로 숨어들었는지 영 찾을 길이 없었다.
『상감마마! 아무래도 사람이 사는 인가에서 찾을 길이 없는 것을 보니 필시 산중으로 피해 갔다가 호랑이의 밥이 된 게 아닌가 아뢰옵니다.』
하였것만 광해군은 여전히 펄펄 뛰기만 했다.
『어쨌든 샅샅이 뒤지도록 하여 만약에 말을 숨긴 자가 발견되거들랑 그 집안 삼족을 멸하도록 하라 ! 』
하는 엄청난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즈음 정윤은 경상도 끝 어느 외딴 섬에서 하늘과 모래, 그리고 끝없는 망망대해를 벗삼으면서 쓸쓸한 유배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방에 앉아 시름없이 책을 뒤적이며 회포를 풀고 있는데 어디선가 히힝-하는 말의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들려 왔다.
그러나 정윤은 착각이겠거니 하고 책에 눈을 돌렸다.
『이히힝』
이번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 또 울었다.
정윤은 귀가 번쩍했다.
말의 울음소리는 바로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명마의 소리였다.
정윤은 어찌나 반가운지 버선발 채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명마는 앞발로 땅을 마구 탁탁 구르며 그 긴 목을 연신 꾸뻑 꾸뻑 아래 위로 절을 하듯 하면서 서 있는데 온몸엔 물기가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 번쩍이고 있었고 등에는 찬란한 안장이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궁궐에서 곧장 온 게 틀림없었다.
단신 바닷물을 건너 온 것이리라-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제 주인을 찾아 멀고 먼 길을 온 것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울컥 치미는 기쁨에 와락 명마의 목을 껴안고는
『아-네가 왔구나! 네가 와 주었어』하며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명마도 역시 즐거운지 마냥 그 긴 얼굴을 정윤의 얼굴에 비벼댔다.
정윤은 그 길로 말을 이끌고 뒷곁 대밭으로 가 움막 비슷한 마구간을 만들어 주었다.
『네가 필경 대궐을 도망쳐 나온 모양이니 네 신변이 걱정스럽구나! 나도 이 모양으로 대궐을 쫓겨난 몸이라 어쩔 수 없으니 당분간 이 움막 속에 숨어 살도록 해라 ! 』
말은 알아들었는지 양순하게 움막 속으로 들어가서는 눈을 껌뻑껌뻑했다.
『명마야! 너 절대로 울음소릴랑 지르는 게 아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너나 나는 끝장이 나는 거다 알아들었느냐?』
갈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타이르고는 꼴을 베어다 넣어 주었다.
그로부터 명마와 같이 숨어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들에겐 유배 오고 외롭다는 생각마져 사그라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은 산천이 떠나가라고 울부짖었다.
『히히힝』
정윤은 이 소리를 남이 듣지 않았나 싶어 기절초풍을 하여 뒤곁으로 뛰어나가 보았다.
말은 어쩐 일인지 옛날모양 광기를 부리며 움막을 걷어차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엉성하던 마구간이 그나마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날은 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 포악스런 광해군이 대궐에서 쫓김을 받던 날이었던 것이다.
하늘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명마는 시일을 알고 서울로 되돌아 갈 것을 주인에게 알리기 위해 움막을 뒤엎은 것이었다.
이런 내막을 며칠 후에야 파발마의 기별을 받고 알게 된 정윤은 명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허허어 ! 내 그런 줄 몰랐다. 어찌 한갓 미물인 네가 세상사 돌아가는 기미를 알 줄이나 알았느냐! 』
하고 그 길로 행장을 수습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서는 새 조각을 이룩하고 새로운 정치를 베푸는 한편 새 임금의 등극을 명나라에 알리게 되어 이에 필요한 서신과 사신들을 뽑아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큰일이 벌어졌다.
새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사절을 파견하고 생각하니 몇 가지 보충해야 할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만일 이 점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명나라에선 우리조정이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뒤엎었다고 트집을 잡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명나라로 떠난 사절은 이미 보름 전에 서울을 출발하였으니 벌써 중국 경계에 들어섰을 때는 되었으리라.
벌컥 뒤집어진 조정에서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한 중신이 정윤의 명마를 생각해내게 되었다.
『그러하다면 즉시 그 명마를 빌려 타고 사신 일행을 뒤쫓도록 하여라 ! 』
인조대왕의 령이 떨어지자 중신들은 정윤을 찾아 다급한 국세를 설명하고 말을 빌려주길 간청했다.
정윤은 선선히 말을 내 놓으면서
『이 말은 능히 하루 천리를 달리니 부지런히 뒤쫓는다면 쉽사리 앞서간 사신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요! 그러나 특별히 명심할 것은 이 말은 다른 말들과는 별다른 데가 있으니 아무리 먼길을 달렸을 경우라도 그 즉석에서 물을 먹이거나 여물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숨이 가쁘고 땀을 흘리더라도 내버려두면 얼마 후면 자연히 급한 증세가 나을 터인즉 그때 가서 평상시와 같이 여물을 먹이도록 하시요 ! 』
이 말에 중신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하곤 그 자리에서 뒤쫓을 사신을 태워 출발시켰던 것이다.
과연 말은 여느 말과는 달리 하루 천리를 달리는 명마였다.
날듯이 달리던 명마는 이틀만이 앞서간 사신들의 뒤를 쫓을 수가 있었고 국가의 중요사를 무사히 해결짓게 한 것이었다.
하루 밤낮을 꼬박 쉬지 않고 달리고 다음날도 종일토록 달린 말은 책임을 완수하자 덜컥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연방 숨이 넘어갈 듯 씩씩거리면서 가쁜 숨을 불어 제끼는가 하면 땀을 비오듯이 쏟고 늘어지니 주위 사람들은 허기지고 목이 말라 그렇다면서 여물과 물을 먹이는 등 법석을 떨었다.
말을 타고 온 사신마저도 정윤의 당부를 잊어먹고는 어떨결에 물이랑 여물 갔다주는 것을 거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말은 물과 여물을 허겁지겁 먹어 삼키더니 갑자기 벌러덩 쓰러지면서
『히히힝 !』
크게 웨치고는 덜렁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정윤이 하던 당부를 기억해 낸 사신은 죽어가는 명마를 멀건히 쳐다볼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명마는 그 아까운 일생을 마치고 낯설은 이역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대궐로 돌아온 사신은 그날로 맥빠진 모습으로 정윤의 집을 방문했다.
『내 말은? 내 말은 어찌했소?』
맨 몸으로 돌아온 사신을 보고 정윤은 애절하게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는 사신이었다.
사신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축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정윤은 사신의 태도에서 모든 것을 알아 차렸다.
『아! 내 말이 기어이 갔구나! 내 잘못으로 기어이 죽이고 말았구나!』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던 정윤은 주저앉으며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말이 죽은 자리에 나타난 정윤은 홀로 사향을 피우며 말의 넋을 위로하고 있으려니 뿌연 안개가 갑자기 끼더니 그 명마가 어렴풋이 나타나 『히-힝』낮은 소리를 내며 목을 아래 위로 흔드니 말의 콩알만한 눈물이 비오듯 정윤의 이마를 적시며 하늘 높이사라져 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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