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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어사 박문수

by 양화산장 2018. 6. 17.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 팔도강산을 두루 유람했을 적 청년시절에 몸소 체험한 이야기 중의 한 토막이다.
경상도 양산통도사에서 책을 읽으며 한 겨울을 지내던 박문수는, 추위가 가셔지고 각색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여 종달새 소리 한가롭게 들려오는 춘삼월을 맞게되자,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고 엉덩이에 좀이 쑤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 따스한 날을 가려 개나리 봇짐을 해서 짊어지고는 경상도 땅을 두루 돌아다니던 끝에 문경 땅으로 들어섰다. 문경 새재가 험하고 높다기에 한번 들러본 것이었다.
험준하고 첩첩한 산골길을 온종일 걷다가 어느덧 저녁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느 산골짜기에 있는 외딴집 한 채를 발견하고는 기뻐 문을 두드렸더니 십 칠팔 세쯤 되는 소년이 문을 열어주었다.
『얘야, 나는 유람 나온 사람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갔으면 하는데···』
소년은 한 마디 말도 없이 혼연한 기색으로 박문수를 뜰 아랫방으로 안내하고 강냉이밥과 산나물 국으로 저녁상을 차려왔다.
온 종일 굶주렸던 박문수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하고 있으려니까, 조용히 방문이 열리더니 이십 이삼 세 가량 된 소복한 여인이 숭늉 그릇을 들여놓고는 다시 조용히 문을 닫으며 꽃잎 같은 입술을 방긋 여는 듯 하더니 곧 물러 가버렸다.
언뜻 보기에도 젓빛같이 희고 고운 살결이며, 호리호리한 몸 맵씨와 맑은 눈매가 몹시 아름다운데다가, 양미간에 어린 수심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윽하고 가련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들뜨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청년 박문수는 부지중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두근두근 두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안정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나무를 저다가 헛간에 부리고 들어온 그 소년은
『손님, 형이 돌아가신 후로 식구라고는 노망한 귀머거리 모친과 과부가 된 젊은 형수와 저밖에 없으므로 일손이 모자라 손님대접을 소홀히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례하고는 이어서 자기 백부의 대상이 오늘밤이므로 부득불 산 넘어 큰댁으로 가서 참례해야 겠으니 주인 없는 방이라고 하여 조금도 미안쩍게 생각지 말고 편히 쉬고 계시면 새벽까지는 틀림없이 돌아오겠다고 하며 이내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어린 소년이 예의가 바름에 마음 속으로 자못 칭찬하며 아랫목에 자리를 펴고 잠을 청했다.
달빛이 방안에 가득하고 멀 잖은 숲 속에서 슬피 우는 두견새 소리가 자못 처량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또 조금 전에 본 어여쁜 소복한 과부의 환상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집 생각, 과거볼 생각 등 이 생각 저 생각에 정신이 뒤숭숭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역시 소복한 과부의 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산골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미인이다. 나를 보고 방긋 웃는 듯한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아하, 그렇기도 할 테지, 꽃 같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서 화조월석을 외롭게 눈물로 보내다가 뜻밖에 나 같은 풍류남아를 대하게 되었으니 자연 웃음이 나온 것도 인정이렸다. 그렇다면 어심수심이라 물고기 마음은 물이 알고 물의 마음은 물고기가 아는 것이다. 어린 소년은 큰댁엘 갔고, 노망한 귀머거리 할망구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것이니 그러고 보면 이 심심산중 외따른 집에는 오직 나와 과부 단둘뿐이로구나 ! 이것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냐? 아마 지금쯤 그 여인도 외로운 이불 속에서 잠 못 이루며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불붙는 정열을 억제하느라 눈물께나 종이 흘리고 있으렸다?)
이렇게 생각한 박문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열 나흘 달빛이 물같이 흐르는데 삼라만상이 죽은 듯한 깊은 산골의 조용한 밤이었다.
이때 문득 울타리 밖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박문수는 급히 나무가 쌓여 있는 헛간 속으로 들어가서 동정을 살폈다.
다음 순간, 휘익 ! 하는 괴상한 찬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홀연히 건너 방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그 소복한 미인이 문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손짓을 하는 게 아닌가 !
박문수는 더욱 수상히 여겨 손에 땀을 쥐고 다음 거동을 기다렸다.
그러자 휙 하고 울타리를 뛰어 넘어서 바람같이 건너 방으로 들어가는 자가 보였다. 언뜻 보아도 키가 구척이나 될듯하고 깍지통 같은 몸집에 검은 장삼을 입었으며, 머리를 빡빡 깎은 중놈이 분명했다.
다음 순간 창문에 비치는 두 그림자는 문득 하나로 합쳐쳤다. 숨 막히는 듯한 포옹의 광경이었다.
『애는 큰집에 갔는가?』
사나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부대상에 갔으니까 새벽녘이나 되어야 돌아올 거예요.』
소복 미인이 소곤거리더니 이내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옷을 벗는 모양이었다.
『젊은 애도 하루 속히 처치해 버리라니까.』
『글쎄. 너무 독촉하지 마세요. 인제 기회를 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 버릴 예정이예요.』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건 없잖아? 먼젓번처럼 술에다가 극약을 타서 먹이면 아주 간단하게 끝날 터인데······』
이 수작을 들은 박문수는 부지중 의분의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저 연놈들은 전부터 간부간부의 사이로 소년의 형 되는 사람도 계집의 독소에 걸려서 비명에 죽은 것이 분명하구나……)
박문수는 헛간에서 살짝 빠져 나와 소리를 죽이고 아랫방으로 들어가서 행장 속에 감추어 두었던 예리한 비수를 꺼내들고 다시 마당으로 내려섰다.
(저 연놈들을 살려 두었다가는 불쌍한 소년마저 독살을 당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집안은 아주 망해버릴 것이 아닌가 ! )
박문수는 가만히 건너 방 문 앞까지 다가가서 귀를 기울이고는 방안의 동정을 살핀 다음 문을 박차고 비조와 같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사내의 목덜미를 그 예리한 비수로 푹 찔렀다. 다음 순간 놀라 일어나려는 계집을 찔렀다.
시뻘건 선혈이 대줄기같이 쏟아지며 두 남녀는 동시에 황천객이 되어버렸다.
아랫방으로 돌아온 박문수는 종이로 칼에 묻은 더러운 피를 씻어서 행장 속에 깊이 간수한 후에 자리에 들었다.
『손님, 주무십니까?』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이 문을 열었다.
박문수는 잠든 체하고 대답을 아니했다. 소년은 문을 닫더니 다시 건너 방 문 앞으로 가서 아주머니를 불렀다.
그리고는 건너 방 문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후 다시 문을 닫고 나오는 기척이 들리기에 가만히 일어나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소년이 무엇을 무겁게 짊어지고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필연 중놈의 시체를 묻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날이 활짝 밝았는데 돌연 안으로부터 슬피 우는 곡성이 들리더니 잠시 후 소년이 아랫방으로 들어왔다.
박문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런데 별안간 곡성이 들리니 왠일인가?』
하고 물었다. 소년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간밤에 우리 형수님이 자결을 하였습니다. 석달 전에 형님이 작고 하였을 때부터 자꾸 따라 죽으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말려서 지금까지 무사했는데, 어젯밤 제가 없는 틈을 타서 먼저 가신 형님을 따라간다고 유서를 써 놓고 칼로 자기가슴을 찔러 그만 돌아가셨습니 다.』
라고 말하는 소년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이 말을 들은 박문수는 마음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글도 배우지 못했을 터이고, 산 속에서 듣고 본 것도 별로 없이 화전이나 일구며 자라난 일개 촌아이로서 이와 같이 슬기 있고 용이주도하게 큰 일을 처리하는 수단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지 삼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박문수는 과거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있다가 영남어사가 되어 패의파립으로 행색을 감추고 민정을 살피며 두루 경상도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맨 나중으로 문경 땅으로 들어서서 그 소년 집에 이르러보니, 뜻밖에도 문 앞에는 열녀문이 서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거기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열녀 임씨가 죽은 지아비를 따라 죽었으므로 그 열절을 정표한다>
이것을 본 암행어사 박문수는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순된 세상일을 개탄하였다.
저녁상을 물린 암행 어사 박문수는 이제는 주인이 된 총각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는 민정을 대강 알아보고 다시 이렇게 물었다.
『문 앞에 선 열녀문은 그때 돌아간 자네 형수씨의 사적인가?』
『그렇습니다.』
하고 총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자네는 형수씨가 진실로 열녀가 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물음을 들은 총각은 홀연 낮빛이 변하며 허리에 찼던 날이 시퍼런 낫을 빼어 들었다.
『그때에 저지른 일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것은 우리 집을 생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용서하였지만, 만일 또 다시 쓸데없는 간섭을 한다면 이 낫으로 사생을 결단할 터이니 알아서 하시오!』
이 추상같은 총각의 호통에 그만 어사는 움찔하여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패를 꽁무니에 차고 폐의파립에 죽장망혜로 영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민정을 살피던 박문수가 어느 날 풍기 땅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날이 다 기우러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게 된 박문수는 어느 조그마한 초갓집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비를 피해 쉬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한술 저녁밥을 얻어 먹고 초저녁부터 쓰러져 자다가 자정이 훨씬 지났을 무렵 밖으로 나가 소변을 보고 돌아서려니까 옆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무슨 얘기들인가 하고 귀를 기울이고 엿들어 보았다.
『그래, 얼마나 받아왔소?』가냘픈 여자의 물음이었다.
『쉰 냥이야! 이것만 가지면 뒷벌 논 열 마지기는 사게 될 것니까 인제 우리는 양식 걱정 안하고 살게 되었네.』
『아이 좋아라. 정말 그 많은 돈을 구두쇠 김첨지가 줬어요? 그까짓 모가지 하나 묻어 주었는데요?』
『쉿 ! 너무 떠들지 마. 그까짓 게 무어야? 캄캄한 밤중에 모가지 없는 송장을 업고 고개를 넘느라고 얼마나 땀을 뺐다고 ! 』
뒷말들은 너무 가늘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던 방으로 돌아온 박문수도 피곤하던 끝이라 이내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이른 아침 그 집을 떠날 때 동네 사람에게 물어서 그 집주인의 이름이 변창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약 이십 일 동안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풍기 땅으로 돌아온 박 어사는 죄수들의 죄를 심리하다가 우연히 아내를 죽이고 잡혀와서 사형선고를 받게 된 정덕칠이라는 젊은 죄수가 있는 것을 보았다.
군중에게 물어보니 덕칠은 인근 장판으로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대구 장날에 가서 물건을 팔아 가지고 여러 날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젊은 아낙이 외간 남자와 간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격분한 끝에 아내의 모가지를 잘라 죽인 살인범이라고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박 어사는 즉시 덕칠을 불러 재심문을 하였다.
『네가 네 아낙의 목을 잘라 죽인 게 사실이냐 ? 』
『예. 이 죄인 그저 속히 죽여주십시오.』
『언제쯤이냐 ? 』
『지금부터 스무날 전입니다. 어둑어둑한 새벽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외간남자를 품고 누웠기에 순간 울화를 참지 못하여 고만 죽여 버렸습니다.』
『그때 간부는 어찌 되었느냐?』
『간부는 도망해 버렸습니다.』
『네 아낙의 나이는?』
『금년 열 아홉 살이옵니다.』
『내 보건대, 너는 사람을 죽일 악한같이 뵈지는 않는다. 여기엔 필연코 무슨 숨기는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느냐? …… 나는 봉명한 암행어사다. 추호도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아뢰어라. 경우에 따라서 너의 목숨을 구해 줄 수도 있느니라』암행어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덕칠이의 눈이 이상하게 빛나더니 이윽고 박문수의 얼굴을 우러러 보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조용히 머리를 떨구었다.
그러더니 혹독한 고문으로 정갱이가 부러져서 다리를 세우지 못하고 엉거주춤 엎디어 있던 덕칠의 어깨가 들먹였다.
『네 원통한 사정이 있거들랑 조금도 어려워말고 어서 말해 보아라.』
박문수는 자애스럽게 물었다.
『어사님, 하나님이 굽어보시지만,
정말 소인은 아무 죄도 없사옵니다···
그날 새벽에 장사를 나갔다가 여러 날만에 집에 돌아왔습죠. 그런데 방문을 열고 들어서려니 피비린내가 확 끼치기에 불을 켜고 본즉, 모가지 없는 아내의 시체가 아랫목에 누워있지 않겠습니까. ····어사님, 소인이 아는 것이라곤 그저 이것뿐이옵니다. 일월같이 밝으신 어사님, 억울하게 죽게 된 이 가련한 소인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간신히 말을 마친 덕칠이는 통곡하며 우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사또 앞에서는 아니, 조금 전가지만 하더라도 네 손으로 죽였다고 그랬느냐?』『처음에는 여러 말로 사실을 아뢰었읍지요. 그러나·…··그만 고문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거짓자백을 한 것입니다. 이 정갱이 부러진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또 이, 볼기짝을 좀 보십시오·…‥.』
덕칠이는 바지를 까 내렸다.
살가죽과 살이 흩어지고 심줄이 드러나 있었다.
이 꼴을 본 박 어사는 한숨을 길게 내 쉬며,
『괴롭겠다.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하여라.』
하며 사령에게 덕칠이의 목에 씌운 칼을 벗겨 주도록 명령했다.
그날 밤 객사로 돌아온 박문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암만해도 덕칠이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것 같은데……그러나 사형선고를 번복할만한 증거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어찌한다? 가만 있자. 여자 나이 열아홉이면 갓 피어나는 목단 같아서 필연 사람의 눈을 끌었으렸다? 하물며 남편이 장사 나가고 집에 없었고…‥·말하자면 임자 없는 땅에 핀 꽃과 같아서 자연 나비가 날아들기 쉬우렸다? 만일 그러한 사실이 성립되었다고 가정한다면, 한 번 금단의 향기로운 열매 맛을 본 터이라 길이 제것으로 만들고 싶었다면‥·‥·그렇다면 어떻게 하든지 여자를 빼돌려야겠는데 남편 있는 유부녀인지라 뒤탈이 무섭고, 그러니까 모가지 없는 다른 여자와 슬쩍 바꿔 놓을 것 같으면 세상에서는 그 여자가 죽은 줄로 알게 될 것이고····‥따라서 남편되는 자는 살인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을 받게 된다. 그렇지 ! 미상불 있을법한 일이군.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면 이 일을 꾸민 자는 대체 누구일까? 또 모가지 없는 여자 시체는 어디서 난 것일까··…·)
여기까지 궁리를 하던 박문수는 홀연 스무날 전 변창돌네 집에서 엿듣던 말이 생각났다.
『옳거니 ! 』
그는 벌떡 일어나서 캄캄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역졸을 시켜 변창돌을 잡아다가 꿇게 하였다.
『네 이놈! 네가 변창돌이냐?』
『네.』
『너는 스무날 전 밤중에 김 첨지의 청을 받고 어떤 여자의 모가지를 비밀히 간수한 뒤에 다시 목 없는 시체를 업고 고개 너머 덕칠이네 집 안방에 갖다 눕힌 일이 있으렸다? 네 이놈! 조금이라도 은위한다면 죽고 남지 못할 것이니 바른 대로 아뢰어라!』
추상같은 호령을 하며 형구를 차려놓고 당장이라도 주리를 틀 형세를 보이며 위협하였다.
변창돌이 그야말로 귀신같이 잘 알아 맞추는 바람에 청천벽력을 맞은 듯 정신이 아찔하고 전신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서 감히 꾸며댈 생각조차 못하고 사실대로 자백했다.
실 이튿날 아침.
돈 많은 부자로 유명한 김 첨지를 붙들어다가 주리를 틀며 모진 고문을 한 결과 비로소 전부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원래 김 첨지는 세력이 당당한 자였는데, 덕칠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김씨를 꾀여 간통을 하게 되었으나 항상 눈 속의 가시 같은 본 남편 때문에 마음 놓고 같이 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던 나머지. 하루는 덕칠과 같이 장사를 나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그로부터 삼 일 후면 덕칠이가 돌아오게 되리라는 말을 듣게되자, 전부터 눈독을 들여오던 자기 집 계집종 추월이를 사랑방으로 불러들여 반 강제로 관계를 맺은 후에 그대로 끼고 자다가 예리한 칼로 추월의 목을 끊어 살짝 독에 넣어서 평소부터 통정을 하고 지내던 소작인 변창돌로 하여금 아무도 모르게 모가지를 매장한 후에 다시 추월이의 시체를 업어다가 덕칠이 집 안방에 눕히고 그 대신 김씨를 업어오게 하여 뒷방 속에 감추는 한편, 사또와 아전을 막대한 뇌물로 매수함으로써 영문도 모르고 잡혀온 덕칠을 살인범으로 몰아서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박문수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영조대왕은 엄명을 내리셨다.
『뇌물을 먹고 죄 없는 덕칠이를 죽이려 한 사또와 아전은 파면시키는 동시에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덕칠이의 아내 김씨는 등에 북을 매달아 이웃동네에 조리를 돌린 후에 관비로 만들고, 덕칠이는 석방하는 동시에 몰수한 김 첨지의 재산 중 절반을 주어라. 그리고 그 나머지 절반을 억울히 정조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어버린 계집종 추월이의 남동생에게 주어 원통히 희생된 고혼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 주게 하여라. 아울러 악인 김 첨지는 사형에 처하느라!』
이렇게 하여 죄 없는 덕칠이의 누명을 벗겨주고 어디런지 또 가버리는 박문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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