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해라는 사람은 이조 때 과거에 장원하여 예조판서까지 지낸 사람이다.
나이 열 여덟에 비로소 장가를 들어 처갓집에서 삼일을 치르기 되었다.
그런데 삼일째 되는 날이 마침 음력정월 보름이었으므로 다리를 밟으며 달구경을 하며 소요하다가 공교롭기도 한 글방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고금을 막론하고 새로 결혼한 사람에게 한턱 울겨 먹으려고 하는 것은 오백년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풍속이라, 그날 밤에도 시해 소년 역시 장난꾸러기 친구들에게 붙들려서 어느 술집에 들어 술을 한턱 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밤이 상당히 으슥해지도록 술들을 마신 끝에 모두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제각기 집이 돌아갔다. 그러나 시해 소년은 먹지도 못하는 술을 친구들 강권에 못 이겨 지나치게 받아 마신 터이라 휘청대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며 아찔아찔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처갓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어느 집 담 모퉁이에 쓰러져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길가에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며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자기를 일으켜 둘러업고는 어디론지 달리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으나 도무지 사지를 꼼짝할 수도 없고 눈도 떨어지지 아니하여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업히어 가는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얼마쯤 지났을까.
시해 소년은 갑자기 목이 타는 듯하여 취기로 몽롱해진 눈을 실낱같이 떠보니 보름달이 대낮같이 비추이는데 자기 몸은 산수평풍이 드리어 있고 비단장막이 드리운 아늑한 방 속 부드러운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곁에는 꽃봉오리같이 곱고 애띤 색시가 조용히 자고 있지 않은가!
고이 내리 감은 두 눈 그리고 볼에 연지가 찍힌 도화 같은 두 뺨, 콧잔등에는 송글송글 내솟는 구슬땀이 더 한층 풍정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옷차림과 윗목에 벗어 놓은 족도리로 보아 갓 혼인한 신부가 분명하나, 달빛아래가 되어서 그런지 평소에 보던 얼굴보다 몇 곱절이나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만 정신이 아찔해진 시해는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흥분이 온 몸에 일렁임을 느끼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치 못하여 신부의 향긋한 몸을 힘껏 끌어당겨 안았다.
이 바람에 잠이 깬 신부는 함초롬이 젖은 듯한 가는 눈매로 자기를 끌어안는 사람이 바로 신랑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미소를 짓고는 다시 눈을 사르르 감았다.
원래 이 신부집은 정참의 라고 하는 그때 서울 장안에서는 몇째 안가는 부자집이었고 그 신부는 그 집의 무남독녀 외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신부의 신랑도 결혼한지 삼일 째 되는 날 밤에 거리로 답교를 나갔다가 역시 그의 친구들에게 붙들려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하여 정신을 잃고 그만 그 술집에서 그대로 쓰러져 자고만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는 신부집에서는 신랑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하인배들을 시켜 사방으로 찾도록 하였다.
한참을 신랑을 찾아 헤매던 하인들은 마침 어느 집 담 모퉁이에 쓰러져 한참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시해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 하인배들은 그가 저의 집 신랑인줄 그릇 알고는 덮어놓고 들쳐업어다가 신방으로 들여 눕혔던 것이다.
그리고 신부 또한 신랑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옷도 입은 채 벽에 기대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가 계집종들이 술에 만취되어 정신 모르는 신랑을 부축하여 자리에 누이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으나 워낙 잠이 몽롱해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냥 불을 끄고 신랑 옆에 누웠던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꿈 같은 밤을 보낸 시해는 이튿날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과 술이 한꺼번에 깨어서 일어나 보니 전에 자던 방이 아니고 낯설었다.
시해는 앞이 아득했다. 깜짝 놀라는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어찌된 연유일까······?)
시해는 겁이 버럭 나서 옆에 자는 신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신부는 곤한 잠에서 깨어나 부끄러움을 잔뜩 머금고 돌아앉아 옷을 입었다.
「대체 이 집은 뉘 집이며 또 나는 어찌되어 이 집에 있게 되었소?」
하고 시해는 열쩍은 얼굴로 물었다.
이 소리를 듣고 비로소 시해를 돌아본 신부는 갑자기 얼굴이 새파레지며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제서야 시해는 일의 자초지종을 짐작했다.
『나도 새로 장가를 들어 처갓집에서 삼일을 치르다가 어젯밤 답교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다가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그만 주기를 이기지 못하여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를 귀댁의 하인배가 귀댁의 신랑으로 그릇 알고 이런 일을 저지른 모양이오. 그러나 이제 와서 지난 일을 가지고 한탄해 본댔자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소. 재론할 것도 없겠지만, 도대체 이 일을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다소곳이 앉아 있는 신부에게 의논조로 말을 걸었다.
신부는 옷깃을 여미며 얼굴 가득히 부끄러움을 띄우고는 나직이 말했다. 『양반의 집 규중처녀로서 이 같은 불의의 변을 당하였사오니 부녀도로 논지하오면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오나, 저는 무남독녀로 태어난 몸이오니 만일 이 몸이 죽사오면 늙으신 부모님께서도 역시 돌아가시게 될 것이옵니다. 따라서 저의 집은 아주 멸망하고 말 것이오니 이것을 생각하오면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옵니다』
신부는 말하는 도중에 옥 같은 두 뺨 위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줄줄 흘리며 울먹였다.
이 모양을 본 시해는 뼈 속 깊이 사무치는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부의 섬섬옥수를 잡아 자기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며 품안에 끌어안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이렇게 된 것은 결코 우리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잖소. 천지신명께서 지시하신 천정가연이 아닌가 하오. 그러니까 부질없는 생각은 말고 차라리 앞으로 취할 선후척이나 강구토록 합시다.』
시해는 정다운 말씨로 신부를 위로했다. 이 맡을 들은 신부는 한초름히 젖은 눈매로 시해를 쳐다보다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차피 실절한 몸이라 다시 본부를 대할 면목이 없사오매 비록 첩으로 된다 할지라도 더럽게 여기지 마시고 이 몸을 거두어 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나도 일부러 저지른 과실이 아니며 신부 역시 자의의 소치가 아닌 즉 그것도 무방하나, 다만 한가지 염려는 나는 아직 나이 어린 서생의 몸으로 과거도 못 보았고 또 집에는 엄친이 계셔서 이만 일을 허락치 않을 것이니 딱한 노릇이오 ! 』
시해는 정말 가슴이 답답하고 난처하였다.
『그러시다면 흉허물없는 일가댁에라도 잠시 이 몸을 숨겨주시오면 좋겠습니다만, 이 몸을 맡길만한 곳은 없을까요?』
『홀로 된 고모댁이 있기는 하오만 말을 잘 들어주실는지가 의문이오.』
『······어찌되든 날이 새기 전에 이 몸을 그 댁으로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어떤 시기가 오기까지는 서로 만나지도 말고 일체 비밀로 붙여 두었다가 이 다음 과거에 장원하시게 되는 날 두 집 부모님께 고하여 다시 단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까요?』
실상 신부는 자못 불안하고 초조했다. 날이 새어 아침이 되면 집안 사람들이 이 골을 보는 날에는 대체 어찌된단 말인가?
이리하여 그 자리에서 신부에게 치마를 치워서 아무도 몰래 빠져 고모댁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 사정을 세세히 말씀드리고 양해를 얻어 당분간 신부를 맡겨두게 되었다.
한편-
정참의 집에서는 날이 활짝 맑은 후에도 신방의 기동이 없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방문을 열어보니 신랑 신부가 한꺼번에 없어진 게 아닌가.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사방으로 사람을 놓아 찾아보아도 도무지 종적을 알 수가 없어 모두들 근심에 싸여 있다가 그날 늦게서야 진짜 신랑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온 것을 보고 비로소 어젯밤의 그 신랑은 가짜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연 질색하였다.
허나, 이미 엎질어진 물, 어찌한단 말인가. 할 수 없이 머리를 짜내어 신랑 집에는 신부가 밤중에 변소에 갔다가 호환을 당하였고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 정씨를 고모 집에 맡기고 처갓집으로 가서 진짜 신부를 데리고 본집으로 돌아온 시해는 그 이튿날부터 사랑방에 들어앉아서 글공부에 전심전력을 다 기울였다.
세월은 흘러서 어느 덧 엄동도 지나 따스한 봄이 찾아들었다.
연못가에 늘어진 버들가지에는 잎이 파릇하게 돋아나고 화단에는 갖가지 꽃들로 봄을 화사하게 단장하였다.
『아! 갔던 봄이 다시 돌아왔구나!』시해는 읽던 책을 덮어두고 잔잔히 불어온 미풍으로 잔주름이 족족 잡힌 연못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서서히 눈을 들어 아지랑이 낀 들판을 바라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중 문득 고모 집에 맡겨 둔 정씨 모습이 떠올랐다, 그 귀염성 있는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쯤 정씨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현듯 정씨가 그리워지는 동시에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여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과거 보기 전에는 절대로 만나지는 말자고 서로 맹세했던 말이 떠올라서 사내 대장부의 체면으로 함부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책을 펴놓은 시해는 모든 생각을 떨어버리고 공부에 전염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책장 위에는 앵도 같은 입술에 미소짓는 정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또한 책에 쓰여진 글자는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허······이거 야단났는걸? 내 마음이 왜 이다지도 산란하단 말인가?)
시해는 다시 눈을 감고 꿇어 앉아서 정신을 통일시키려 하였으나 마음은 더욱 생숭생숭하여 걷잡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봄바람이 부드럽고 은은한 월광아래 어른거리는 꽃 그림자는 마치 사뿐사뿐 걸어오는 미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리만치 고요하고 운치 있는 밤이었다.
(아‥·…정씨도 지금쯤 독수공방 차디찬 이불 속에서 외로운 베개를 끌어안고 눈물깨나 흘리고 있을테지…···)
다음 순간 시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만히 뒷문을 빠져 나와 고모 집을 향하여 걸음을 빨리 하였다. 그리하여 고모댁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밤은 으슥히 깊었고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나지막한 담장을 기어올라 안마당으로 사뿐 뛰어 내렸다.
고모는 잠이 들었는지 안방은 칠흙 같이 어두웠고 건너방 정씨가 거처하는 방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선뜻 마루로 올라선 시해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건너방 방문을 소리 없이 조심하여 열었다. 만수향을 피워놓고 촉하에 단정히 꿇어앉아 대학을 보고있던 정씨는 머리를 들어 시해를 돌아보더니 책을 덮어두고 조용히 일어서서 시해를 맞았다.
『밤이 이미 깊었는데 아무런 통지도 없이 어이된 일이옵니까? 혹 사고라도 생겼사옵니까?』
『별 사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저 좀 와보고 싶어서·…‥』
열적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전에 약속으로 말씀하오면 과거보시기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만나지 않기로 되었사온데·····」
단정히 앉아서 쳐다보는 정씨의 맑은 눈동자는 서릿발 같이 차고 매워서 감히 범하기 어려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비록 약속은 그러하였지만 하도 궁금하기에 하룻밤 정이라도 들어볼까 하고 온 길이오.』
시해는 약간 겸연쩍었다.
『선비가 다른 곳에 마음을 두면 글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아시고 계시옵지요 ? 』
『암, 그런 것쯤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좋은 밤이 헛되어 보낸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니오?』
이렇게 말하고 슬그머니 정씨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이 손을 놓으시고 저만큼 물러앉으시오.』
쌀쌀하게 손을 뿌리치고 정씨 자신도 몇 자쯤 물러나 앉았다.
시해는 다시 한번 정씨의 꽉 짜인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약속대로 과거에 장원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만나 뵈지 않을 것이오니 그리 아시옵고 어서 돌아가셔서 글을 읽도록 하옵소서』
이리하여 그 밤으로 망신을 톡톡히 받고 돌아온 시해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오직 글공부에만 전심을 기울여 밤잠도 자지 아니하였다. 그 보람이 있었던지 이듬해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다. 시해의 고모는 이때서야 양가에 그간의 일들을 모두 알려 드디어 정씨를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