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정지성이란 벼슬 높은 대감이 나이 많아지자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아들손자들과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이웃에 김가 성 쓰는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농부 어찌된 셈인지 나랏님 이상으로 정 대감의 덕망을 흠모하고 있어 이 하늘아래 정 대감님 같은 어른은 없다고 여기고 농사일에도 이골이 난 처지였건만 정 대감의 본을 받아 대감이 밭을 갈면 자기도 본따서 밭을 갈았고 대감이 논을 갈면 자기도 논을 갈곤 하여 매사를 꼭 대감이 하는대로만 몇해를 두고 하였다. 어쨌든간에 김가 성 쓰는 농부는 이렇게 해서 다른 때와 달리 많은 수확을 얻어 한뼘 만큼의 논은 이제 제법 그전의 두배 정도로 불어나게끔 되어 집안 살림이 제법 기름기가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대감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인지 전답을 모두 남에게 경작하도록 흩어서 빌려주고는 도통 농사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어째서 농사를 짓지 않으시고 저러실까?……』하고
매년과 같이 정 대감을 따라 농사 지어오던 김서방으로서는 이같은 정 대감의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아졌다.
대감을 따라 농사를 안짓자니 내년에는 필경 세정을 내어 먹어야 살테고 그렇다고 멋대로 농사를 짓자니 그 또한 성패여부를 알 수 없어 은연중 고민에 쌓이게 되었다.
그런데 때는 벌써 한식을 지나 곡우가 이삼일간이 격하였으므로 사방에선 논두렁 가래질들을 시작하고 있지 않는가. 일이 이쯤 되자 김서방은 어쩌지도 못하고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앓다가 하루는 집에 있는 누룩으로 약주 술을 빚어 걸른 다음 제일 살찐 씨암탉으로 안주를 만들고는 밤중에 대감을 찾아갔다.
『대감마님 주무십니까?』
김서방이 사랑방 문턱에서 고즈넉이 아뢰니 칠순이 넘은 정 대감은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거 누구시요?』
하고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봤다.
『아니 옆집 김서방이구만, 이 밤중에 어쩐 일이냐?』
나이 늙어 잠 못 이루던 대감은 김서방이 찾아온 것을 반가워하는 듯했다. 농부는 보따리에 싼 것을 툇마루에 올려 놓으면서
『소인 집에서 마침 제 애비 제사를 지냈는데 술 빚은게 좀 있어서 대감마님께 드리려고 가져 왔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린다.
『뭐 술? 나는 네 애비 제사인것도 몰랐구나. 기왕 가져왔으니 어서 이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너라』
대감은 한층 반가운 기색을 나타내며 김서방에게 자릴 비워 주기 위해 몸을 비키자 김서방은 한껏 송구스러워 했다.
『아이구 대감마님 망녕의 말씀도 다 하십니다. 어디라고 감히 대감마님 계신 곳에 소인 같은게 들어 갈 수 있습니까?』
김서방은 더욱 어쩔줄 몰라한다.
『원 별말을 다 하는구나. 내가 들어오라면 들어오너라 어서!』
대감이 자꾸 권하자 김서방은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가선 들고 간 술과 안주를 꺼내 대감에게 권했다.
대감은 취홍 좋게 받아 마신 뒤 그 잔에 손수 술을 따뤄 김서방에게 권하기도 하며 어려워하는 가운데 술잔이 오고가다보니 그럭저럭 술 두되에 닭 한마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집에서 담근 밀주에다 정성 들여 걸른 술이다 보니 늙은 대감은 아는 새 모르는 새 주기가 만면해지며 취기가 도도해 가는데 언뜻 보니 농부 김서방의 태도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보였다.
<이놈이 필연코 무슨 할말이 있나보다>했으나 짐짓 아는척 할 처지도 못됐다.
농사일을 여쭈어 보긴 해야겠는데 차마 어려워 입을 떼지 못하는 김서방을 보자 대감이 먼저 눈치를 챈 것이다
『너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
『왜 말을 못하냐? 할말 있거든 어려워 말고 해 보아라!』
『저……여쭐 말씀이 있습니다만 참아 황송해서 못 여쭈겠습니다.』
『무슨 말이 그리 어려우냐? 어서 해라 나도 자야겠다. 자정이 넘었구나』
『…실은 다른 것이 아니올시다. 대감마님께서 몇해전에 한양서 내려오셔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래서?』
『소인의 무식한 소견에는 평일 대감마님을 하늘같이 믿어서 대감마님이 농사를 시작하시던 해부터 오늘까지 소인은 꼭 대감마님 하시는 대로만 따라 농사를 지었습니다.』
『헛허허 알다가 모를 일이군 그래서?』
『대감마님께서 밭을 가시면 소인도 따라 갈았고 씨를 뿌리면 소인도 곡식을 심어 이제까지 농사를 실수 없이 지어 제법 잘 지낼 수 있었는데 금년 들어서는 어찌된 사연인지 대감마님께서 농토를 모두 남에게 빌려주시고 농사를 짓지 않으시니 소인의 생각에는 대감마님께서 필연 무슨 곡절이 있으시려니 하는 생각이 들어 저희 혼자서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저녁은 특별히 여쭈어 보러 온 겁니다.』
김서방은 겨우 용기를 얻어 지나간 일과 그간의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옛끼 이 사람아! 참 무식한 쌍놈의 소견이로다. 그까짓 걸 뭐 물어 볼 것이 있나 내가 짓기 싫어서 안 짓는 것인데 그걸 일부러 물으려 오다니…… 그게 그처럼 묻기 힘들어?』
하고 대감은 김 서방의 말을 일축하는 것이다.
허긴 자기 짓기 싫어 안 짓는다는데 할 말이 있을리 없다.
그렇다고 김서방 마져 안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김서방은 필경 무슨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털어 버릴 수 없어서
『아니올시다. 대감마님께선 필연 앞일을 내다보시고 안 지으시는 듯하니 우매한 소인을 가르쳐 주십시요.』
했다. 그러나 대감은 여전히
『내가 어떻게 앞일을 짐작하겠느냐? 농사일은 나보다 너희들이 더 잘 알텐데 내가 오히려 배워야 할 껄.』
하고 딴전만 부리는 것이었다.
대감이 모른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김서방은 더욱 의심스러움이 앞서
<대감께서 알고 계시면서 어째 모른다고만 하실까? >
<금년 농사를 안 지으면 영낙없이 세경을 얻을 수밖에……>
진정 김서방에게는 마누라와 자식들이 함께 배곯아하는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건만 대감의 얼굴은 취기가 도도할 뿐 아랑곳없다는 표정이다. 대감의 표정을 바라보던 김서방은
<에라 모르겠다. 대감께서 그렇다면 나도 오기가 있다구…… 어디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한옆이 쪼구리고 앉아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어허 그 사람 고집한번 세구먼! 내 그럼 대충 알려줄테니 귀를 좀!』
하면서 단둘뿐인 처지면서도 사뭇 비밀이나 되듯 김서방에게 소근거렸다. 그리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김서방은 그제서야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면서 알았다는 듯
『잘 알아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틀림없이 올까요?』
하고 의아스러워하자 대감은「쉬-」하며 입을 닥치라는 시늉을 했다.
그 다음날부터 김서방은 논두렁 높은 논만 얻으러 돌아다녔다.
그리고 예년보다 농사를 더 많이 지었다.
이해는 다른 해보다 비도 적절하게 와서 못자리도 때 넘기지 않아 풍년을 예상하게 되었다.
칠월이 되자 네 논 내 논할 것 없이 벼가 길길이 자라 이삭이 쑥쑥 치밀어 오르니 사람들은 논자리마다 수문을 죄다 열어서 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는데 김서방만은 초열흘이 지나면서부터 어쩐일인지 다른 사람이 뽑아 낸 논물을 죄다 자기 논에 잡아넣어 둑의 높이만치 벼이삭만 남기고 찰랑 찰랑하도록 하였다.
『아니 이 사람 정신 좀 어떻게 된 것 아니여? 아 지금 때가 어느 때라고 논물 뺄 생각은 않고 물을 채워 벼를 못쓰게 하려고 하는 거여?』
하고 다른 농부가 주의를 줄라치면
『아니여 며칠만 이렇게 두어야겠어. 우리 벼는』 하고 딴소릴 하였다.
아뭏튼 사람들은 이런 김서방의 바보짓을 보고
『허허 저 미친 사람 때문에 아까운 벼만 버리는군!』
『그저 그렇게만 말할게 아니라 잘 타일러 물을 빼도록 해줌세』
하고 나이든 농부가 권하자
『김서방이 한해 두해 농사를 지어 보았나 그 정도는 알고도 남을 것인데 그럼 필시 경신이 돌아버린게 틀림없구먼 ! 딱하기도 하지……』
동네 사람들이 쉬쉬하며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경작 장본인인 김서방은 태평한 얼굴로 나날을 보냈다.
그달 보름 김서방은 새벽녘에 자릴 빠져 나와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잎사귀를 한잎 따서 달빛에 비춰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여름 삼복에 된서리가 내려 있었다.
<아하 대감께선 정녕 선견지명이 있는 도사이시여 >
김서방은 그저 아연하기만 했다. 대감은 이어 몇 개월전부터 오늘 밤 서리가 내릴 것을 내다보고 계셨던 것이다.
김서방이 그날밤
『네가 그처럼 자꾸 캐물으니 대강 알려준다. 오는 칠월 보름께 밤에 서리가 내려 초목들이 다 죽게될 형편이라 농사는 지어 뭘 하겠느냐……방법은 단지 이러이러 하느니--』
하시던 대감의 얼굴이 새삼 우러러 보였다. 김서방은 그로부터 날이 샐 때까지 꼬박 뜬 눈으로 지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들로 나가 보았다. 그렇게 잘 영글었던 다른 집 벼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소금으로 저린듯이 하얗게 느러져 있는데 김서방네 것만은 여전히 목까지 찬 논물에 고개만 내놓고 싱싱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이렇게 되어 김서방네 추수는 흉작을 면해 농사를 잘 지었다는 것이다.
정대감은 천지변화를 내다 볼 줄 아는 그런 위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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