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효종때의 일이었다.
충청도 조치원에 박시양이라고 하는 선비가 살았다.
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서 십년 동안이나 글만 읽으며 지나보니 어느듯 얼마되지 않는 재산을 모두 곶감 빼어먹듯 써버리게 되어 늙은 모친을 모시고 그날그날 먹고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해 겨울식량이 떨어져서 온종일 꼬막 굶고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모친이 하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시집올 때 끼고 왔던 금가락지를 팔아오게 하여 비로서 저녁밥을 지어먹게 되었다.
저녁밥을 마치고 모친은 문득 의상 속에서 문서 보따리를 내어놓고 뒤적거리다가 종 문권을 한 뭉치 내어놓았다.
「이것은 너의 조부시대에 부리던 종들의 문권인데 너의 부친때 와서 집안형편이 가난해지니까 저희들끼리 떼를 지어 도망을 쳤는데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까 전라도 연도라는 섬으로 가서 자작농을 하고 아주 부유하게 지낸다는구나. 집안 살림이 이렇게 형편이 없으니 네가 이것을 가지고 찾아가 속량을 해준다고 하면 반드시 후한 보수를 받을 것이다. 한번 가보는게 어떻겠느냐」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 시양은 눈이 번쩍 뜨여서 그 이튿날 모친께 하직을 고한 후 길을 떠난 여러날 만에 전라도 연도에 도착하여 종들이 산다는 촌락을 찾았다.
문권을 보이고 내력을 이야기하니 백여호 대촌에 대부분이 그들의 족속이라 그 중의 연장자 몇이 모여서 의논을 한 결과 돈을 모아 속량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던지 박생(박시양)을 돌려가며 하루씩 청하여 융숭한 대접을 하고 떠나올 적에 상당한 돈과 필목을 주는 것이었다.
박생은 그 자리에서 문권을 불태워버린 후에 길을 떠난지 여러날 만에 공주 금강 나룻터에 이르렀다.
때는 마침 초겨울이라 살을 에이는 듯한 북풍이 사정없이 몰아치는데 추운 강변에 머리가 반백이나 된 늙은 부부와 며느리인 듯한 젊은 여인이 서로 붙들고 통곡을 하다가 갑자기 강물 속으로 뛰어들라치면 마누라와 젊은 며느리가 영감의 옷을 붙들고 함께 빠지려 한다.
박생이 급히 쫓아가서 붙들고 연고를 물으니 영감이 대답하기를 자기는 공주 감영에 사는 사람으로 삼대독자 외아들이 감영 아전으로 뽑히어 전곡을 맡아보았는데 못된 친구의 꼬임에 빠져 감영공금을 친구에게 주어 함경도로 명태무역을 보냈던바 일년이 지나도록 친구되는 자는 돌아오지 아니하고 감영으로부터 세찬 독촉이 빗발쳐 내일까지 축낸 공금 이천냥을 물어 놓지 못하면 사형을 면치 못할 절박한 처지이나 워낙 가난하여 연장할 힘도 없고 그렇다하여 외아들이 비명으로 죽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내가 먼저 강물에 빠져 죽으러 한즉 마누라와 젊은 며느리가 죽지 못하도록 건져 놓으므로 부득이 셋이 같이 죽기로 결심을 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록 남의 일이라 할지라도 사정이 몹시 딱하고 가련하여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현재 자기가 갖고 가는 돈과 필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늙은 모친을 모시고 십여년 동안은 편안히 지낼 수가 있으나 재물은 다시 벌면 생길 수도 있지만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 날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즉 차라리 우리가 고생을 할지라도 당장 죽어가는 네 사람의 귀중한 목숨을 구해줄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그 자리에서 다섯 마리 소에 실은 돈과 필목을 몽땅 그 영감에게 내어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처분하면 넉넉히 이천냥이 될 것이니 감영에 돈을 물어주고 죽게 된 아들을 살리도록 하시요」했다.
박생의 이런 처사에 늙은 부부와 며느리는 못내 감격하면서
「제발 우리 집으로 가서 하룻밤 쉬어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높으신 존함과 거처를 알아 두어야 후일에 신세를 갚겠으니 꼭 가르쳐 주십시요.」
하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박생은 후일 갚음을 받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만큼 자기는 집에서 노모가 기다리고 계시므로 한시 바삐 가보아야 되겠다고 도망하듯 떠나가는 나룻배에 뛰어 올라 집에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노모는 먼길에 무사히 다녀옴을 무한히 기뻐하면서 갔던 일의 성공여부를 물었다.
박생은 모천 앞에 앉아서 속량을 해주고 수천냥을 얻어 오게된 사실을 일일이 고하였다.
모친은 심히 만족해하는 안색으로 고생했음을 재삼위로하면서 속량해 주고받은 돈은 어떠한 방법으로 가져 왔느냐고 물었다.
박생은 심히 죄송하고 난처하여 한참동안 망실이다가 어쩔 수 없이 금강 나룻터에서 생긴 사연을 낱낱이 고했다.
「잘했다. 잘했어! 참으로 너는 내 아들이로다. 그래야지 ‥······
설사 우리가 굶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당장 네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구해주지 않는다면 사람의 도리라고 할 수 없을 뿐더러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며 무한히 만족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박생의 집안 형편은 더욱더 곤란하였다.
삼년 전에 상처를 하였으나 집안 형편이 구차하여 새사람도 맞지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겸하여 살림이 궁핍해져서 조석도 제때에 끓이지 못하게 되고 보니 가장 충실하던 늙은 종 내외까지도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내빼버렸다.
밥을 해먹을 식량조차 구할 도리가 없을 뿐더러 혹 약간의 곡식이 생긴다할지라도 추운 겨울날 얼음이 언 물로 밥을 지을 사람은 늙은 모친 밖에 없으므로 효성이 지극한 박생은 자신이 물지게를 지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어서 모친을 봉양할 수밖에 없었다.
원체 가까운 친척이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
먼 일가로 전일에 박생의 집 신세를 진 사람도 여러 사람이었고 개중에는 부친이 별세하자 장례치를 돈이 없어 박생의 도움에 힘입어 장례를 치룬 사람 또 농사를 지어 식구를 먹여 살리라고 땅까지 열마지기 씩이나 떼어준 일이 있는 그런 사람조차도 박생의 집안이 궁해진 후로는 통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박생의 집은 마치 선불맞은 집같이 개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는 일이 없었다.
지난날은 칠팔명의 종을 부리고 수백석의 추수를 하여 곡식과 고기가 광에 그득히 쌓였을 때에는 동네에서 혹 고사를 지낸다거나 잔치 같은 일이 있으면 으례히 맨 처음에 박생의 집으로 음식을 보내오는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저희들끼리만 나누어 먹고 박생의 집은 고스란히 빼어 놓는 것이었다.
박생은 세상 인정이 메마름에 대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머금고 장차 살아갈 일을 생각하매 눈앞이 캄캄하여 부지중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광경을 본 모친은 역시 눈물을 머금고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다가 문득 의장 속에서 족자 하나를 내어놓으며
「이제는 팔아 먹을만한 것은 다 팔아먹고 오직 이 족자 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집 세전지물로서 옛날 신라때 솔거라고 하는 화가가 그린 명화인데 이것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작자만 만난다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을 가지고 마을 어귀에 있는 물방아간을 사도록 하자. 그렇게 되면 방아세만 받더라도 일년에 벼 삼십석은 될 것이니 몇 식구는 살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하는 모친은 수척한 뺨에 눈물을 지었다.
어릴적부터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온 모친이 가난에 쪼들려 육십이 넘자 고기 한점 제때에 자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가끔 조석끼니마저 건너뛰는 관계로 얼굴이 몰라보리만큼 초췌하고 파리해진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자신의 무능한 소치로 단 한 분밖에 없는 모친을 편안히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시 오장이 끊어지고 뼈 속에 사무치는 듯한 슬픔이 복받치어 모친을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모친은 눈물을 거두고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천불생무록지인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우리집 운수가 비색하여 못살게는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남에게 적악한 일은 없으니 천도가 무심치 않다면 반드시 살아 날 길이 있을 것이니 과히 서러워 하지말고 정신을 가다듬고 살 도리를 차리도록 하여라.」
하고 자애롭고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박생은 모친의 지극한 사랑에 못내 감격하여 그 길로 뭍을 길어다 한독 채워놓고 또 자기가 애독하던 책 열권을 가지고 친구에게 가서 사정이야기를 하고 책을 팔아 그 돈으로 한달 동안 모친 혼자 지낼 수 있을만한 쌀 반찬 나무 등을 사서 나머지를 노자로 하여 이튿날 새벽에 길을 떠났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서울에 도착한 박생은 남대문 안에 있는 물상객주를 찾아가 족자를 보이고 팔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객주에 출입하는 수십명의 거관이 그림을 가지고 당시 서화를 좋아하는 재상가 집으로 다니며 광고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전문가의 감정으로 솔거의 그림이 틀림없다는 것이 인정되어 은자로 이백량을 받고 팔게 되었다.
(당시에 사용하년 엽전은 부피가 휴대에 불편하였으므로 큰 돈 거래는 주로 어음이나 은자로 셈하였다.) 박생은 닷냥중을 떼어서 구전과 객주 집 셈을 치러 주고 다시 모친께 드릴 자알 털 배자를 사서 나머지 은자와 같이 보따리에 싸 짊어지고 고향으로 향했다.
이튿날 저녁 때 박생은 수원 객주집에 들어 쉬게 되었는데 한밤중 쯤하여 담 하나를 격한 옆집에서 슬피 흐느껴 우는 여자의 소리가 들러 왔다. 그을음 소리는 마디마디 창자를 끊어내는 듯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까닭 없이 슬픔을 자아내지 않고는 못배기게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처량한 처지에 있는 다감한 박생인지라 자연 설움이 복받쳐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염없는 눈물로 베개를 적시다가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조반을 먹고 숙박료를 셈해 준 후 보따리를 짊어지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옆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인데 마침 삽작문 안으로부터 웬 중년 사나이가 예쁘고 가냘픈 소녀의 손목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삽작문 밖으로 끌고 나오고 있었고 그 뒤로부터 오십 가까이 된 부인이 울면서 소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우악한 발길로 부인을 사정없이 걷어차면서
『늙은 것이 가만있지 못하고 왜 이리 등쌀이야! 나도 이 계집애를 데려가고 싶어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돈을 못내니깐 어쩔 수 없이 데려다가 밑천의 절반이라도 뽑아 보려는 것이다. 공연히 더 얻어터지기 전이 썩 놓지 못할까! 』
하고 발길을 들어 다시 한번 위협했다.
『그렇지만 세상없어도 이 애는 못 데려갑니다. 무남독녀 외딸을 내놓고 늙으막에 누구를 믿고 살라는 말이오? 돈은 돈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돈 못 갚았다고 사람까지 데려가는 법이 어디 있소? 아무래도 못 놓겠으니 차라리 나를 죽이고 데려가오.』
모친인 듯한 부인은 한층 더 소녀의 허리를 굳게 끌어안고 늘어진다. 그러나 강약이 부동이라 예의 사나이는 우격다짐으로 울며 앙탈하는 소녀를 질질 끌고 가는 것이었다. 늙은 부인은 역시 소녀에게 매달린 채 질길 끌려서 따라간다. 사나이는 또 다시 발을 들어 걷어차려 하는 것이었고 소녀는 자기 몸으로 부인의 몸을 가리며 슬피 통곡한다.
이 광경을 보게 된 박생은 인정상 차마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어 그들의 앞으로 가 사정을 물어 보았다.
이제 그 부인의 하는 말을 요약하건대 소녀의 부친 양씨는 살아생전에 빚을 얻어서는 수백마자기의 방축논을 풀었다가 실패를 하자 화병이 나서 죽어 버렸다.
그런데 빚은 이자에 이자가 붙어 은자로 백 이십냥이나 되었는데 이것을 갚지 못하자 다만 하나 있는 외딸을 빼앗아다 술집여자로 팔려 하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모녀의 목숨이 끊어지는 힘이 있다할지라도 고이고이 길러 놓은 귀여운 외딸을 갈보로 내어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가련하고 딱하기 짝이 없었다.
앞길이 창창한 꽃봉오리 같은 소녀가 빚 때문에 희생을 당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모친 되는 부인도 살지 못할 것 같으니 불과 백 이십냥의 빚 때문에 두 목숨이 희생되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 이백냥 인즉 백이십냥을 갚아 준다 할지라도 오히려 팔십냥이 남는다. 이것으로 당분간 모친을 모시고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니 차라리 우리 모자가 고생을 더하게 될지라도 불쌍한 두 목숨을 구제해 주는 것이 인정상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게 되자 그 자리에서 은자 백 이십냥을 건네 주고 차용증서를 찾아 불살라 버린 후에 떠나려한즉 예의 모녀는 감격하여 울면서 박생의 옷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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