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등극한 지 얼마 안된 후의 일이다.
아직도 햇살이 따가운 초가을 어느 날 충청도 계룡산 산길을 석양을 등에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두 나그네가 있었다. 묵묵히 땅만 내려다보고 걷고 있는 그들의 발걸음은 천근이나 무거워 보였다. 짚신 감발에 홀가분한 차림새이건만 등에 지고 가는 개나리 짐의 무게일까? 아니면 먼길을 줄창 걸어오느라 발이 부르터서일까? 앞서 가는 젊은 나그네는 거의 발을 끌다시피 옮겨 놓는 것이었다.
뒤따라가는 중년객도 눈에 띠이게 두발을 절뚝거리고 있었다.
「아유! 이젠 더 못 가겠소. 여기서 좀 쉬어가요.」
앞서 가던 젊은이가 큰 노송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뒤따르던 중년객은 얼른 자기 봇짐을 내려놓고, 젊은이 등에 있는 조그만 보따리를 공손히 끌러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막 주저앉아 다리를 벗고 쉬는데, 마침 그들이 걸어온 길로 나무꾼 한 사람이 나무를 한 짐 지고 뒤미쳐 와서는 그도 역시 나무 밑에 짐을 받쳐 놓고 앉아 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그리로 쏠렸다. 나무꾼은 이제 한20세 가량 되어보이는 준수하게 생긴 총각이다.
「어디를 가시는 나그네 이시온 지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마침내 총각이 입을 열어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젊은 나그네는 왠일인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중년객 또한 난처한 기색으로 서울서 오는 사람인데, 생전 처음 먼길을 걷다가 그만 노독이 심하여 쉬는 중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시골길이 이렇게 멀 줄은 몰랐소! 」중년객은 어색하게 말했다.
총각은 안되었는 듯, 두 나그네를 번갈아 보다가 약간 의아스럽다는 양 고개를 갸우뚱하곤 하였다. 분명히 차림새로 보아 남자임에 틀림 없는데 특히 젊은 나그네의 아리따운 용색이라던지, 이제 중년객의 대답하는 말소리가 여자의 음성임에 놀라서였다.
이윽고 총각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오늘은 날도 저물어 가고 또 여기서인가 있는 곳을 가려면 아직도 한 마장은 더 걸으셔야 할 텐데, 기왕 남에 집에 유숙하실 바에는 저의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같이 가시는 게 어떠실련지······』
하고 물었다. 그 말씨나 태도가 매우 공손하고 믿음성스러울 뿐더러, 그야말로 두 나그네에게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의 처분이었다.
그리하여 총각의 뒤를 따라가게 된 그들은 깊숙한 산중으로 더 들어가서 숲속 바위 밑에 자리잡고 있는 움집으로 안내되었다. 어떻게 이런 심산 중에 외딴집 한 채를 짓고, 더우기 가족도 없이 총각 혼자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겁도 나고 의아심 또한 적지 않았으나 워낙 총각이 공손하고 다정스런 언행이며 또 수월찮게 차려 놓고 지내는 가구들을 살펴보고 안도를 느끼는 그들이기도 했다.
그날 밤, 총각이 지어다 주는 밥을 먹고 여로에 지친 몸을 쉬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중년객은 봇짐을 끌르더니 한 움큼의 보물을 꺼내 총각에게 주면서 팔아 쓰자 하였다. 총각은 보더니 놀라면서
『아니 이 물건을 어데서 가져오셨습니까? 이건 궐내에나 있는 물건인데요. 지금 이런 걸 잘못 팔다가는 큰일납니다. 어서 감추어 두십시오. 나도 몇 해 먹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하고 사양하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두 나그네는 며칠을 거기서 더 쉬게 되었는데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총각은, 아무래도 그들이 범상한 나그네가 아니란 것과 또 두 사람이 모두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년객으로 차리고 온 중년객이 총각을 불러 말하는 것이었다.
『저희들은 본시 서울 대갓집 규중 여인이 온데 큰 화를 당해 변장하고 숨어 다니는 중이옵니다. 이제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실토하는 터이오니 아무쪼록 숨기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있던 총각의 얼굴빛은 순간 달라지면서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고는 목 메인 소리로 그도 역시 화를 피하는 길이라 하며, 어차피 같은 처지이니 함께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그 뒤 그들은 한 솥에 밥을 먹고 한방에서 기거를 하게 되니 부지중에 젊은 두 남녀는 정이 들게 되었고, 또 이성간에 무시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을 가리어 청수를 떠놓고 성례를 하여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되자 총각이 먼저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어느 댁 마님이시오? 우리 기왕 한 몸이 되었으니 숨길 게 무엇이겠소?』
그러자 색시는 수줍은 듯, 차마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떨어뜨릴 뿐인데 중년 부인(중년객)이 대신 지금껏 숨겨 온 나머지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 놓았다.
세조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롭고 영리하여 집안의 귀염을 받고 자라왔다. 그런데 세조가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마침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딸은 몹시 안타깝게 여기면서
『부왕마마 왜 어진 재상들을 모두 죽이시나이까. 그리고 어린 왕이 가엽지 않으세요?』
하고 항의 비슷히 했다. 그러나 어린 딸의 말 한마디쯤으로 마음을 돌이킬 세조가 아니었다.
뒤 이어 성삼문 등 충신들을 몰아 죽이고 어린 단종까지 영월로 내쫓아 살해하여 버리자 공주는 비통한 눈물을 금치 못하면서, 부왕 세조를 향하여 극간하였다.
『아바마마! 어쩌자고 충신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죽이시고 이제 또 죄 없는 상왕마저 살해하시나이까? 후세에 아바마마를 어떻다 하겠사오리까 너무 하시나이다.』
하고는 말문이 막혀 그대로 통곡하는 것이었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였다.
『어린 계집애가 방정스럽게 무슨 괴이한 잔말이냐. 너도 같이 죽어 보련?」
사실 세조에게는 딸 하나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이리하여 곧 사약으로 죽이려 하는데 왕후 윤비가 눈치를 채고는 자식을 사랑하는 모정에 차마 그냥 둘 수 없어 몇 번이나 남편 세조에게 매달려 구명을 청하였으나 고집불통인 남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다 못한 윤비는 마침내 금은과 물을 한 보퉁이 싸서 유모에게 맡기며 이대로 있다가는 공주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어디이던지 모시고 나가 숨어살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남복으로 변장을 한 유모와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대궐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가랴? 구중심원 깊은 궁궐 안에서 살아온 공주! 그녀에게는 세상이 있다하나 그저 앞만 캄캄할 뿐이었다. 유모가 가자는 대로 지향없는 발길을 내어 디디어 낮에는 머물고 밤이면 걸어서 내려오게 된 곳이 계룡산이었고 다행히 여기서 하느님의 지시로 배필을 만나게 되어 오늘 밤 이 자리를 베풀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한숨과 눈물 속에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신랑은 갑자기 일어나 공주를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목 메인 소리로 자기의 신분도 밝히었다.
『당초에 귀인이신 줄은 짐작했습니다만 참으로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절제 김종서의 둘째 손자올시다. 집안이 온통 도륙을 당할 때 하인의 친절한 주선으로 도망쳐 나와 이곳에 숨어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주와 유모는 깜짝 놀라면서도 더 한층 야릇한 감정이 솟아오름을 느끼었다.
원수끼리 맺어진 신랑 신부! 그러나 젊은 그들은 한껏 정답고 단란하기만 했다. 실로 꿈같은 현실 속에서 꿀 같이 단 세월이 흘러갔다.
차츰 경계가 누그러지는 듯 하자 그들은 값진 보물을 팔아 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집과 땅을 사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몇 년이 흐르자 이들은 귀여운 아들 딸을 낳았다.
그런데 그 무렵 세조는 우연히 전신에 부스럼이 나서 백약이 무효이었다. 그것은 꿈에 현덕왕후가 침을 뱉았기 때문에 난 것이라 했다. 그래서 행여 고쳐질까 하고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며 기도를 드리는데 마침 충청도 계룡산으로 행차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공주 내외의 집은 바로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초입 길가에 있었다. 오래 동안 그리던 아버지가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공주는 그때 여섯 살 난 아들과 세 살 짜리 딸을 불러 놓고 『오늘 이리로 상감님의 행차가 지나신단다. 상감님은 이 나라의 임금이시고 너의 외할아버지 되시는 어른이시다.』
하고 무심코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요란스러이 들리는 소리와 함께 시조의 행차는 그 마을에 다다르고 또 우연히 마을 앞에 행차를 머물게 하여 쉬게 되었다. 동내 아이들은 왠 구경거리냐고 일제히 내달아 바라보는데 공주의 아들 딸 남매도 앞장서시 뛰어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세조가 무심히 그 아이들을 내려다보다가 맨 앞에 서 있는 두 어린 남매에게 눈길을 유심히 주어 훑어 보았다. 생김 생김이며 차림 차림이 여러 다른 아이들과 비하여 훨씬 돋보이는데다 그 두 어린이의 모습이 어쩌면 옛날에 죽었다고 여겼던 자기 딸의 얼굴과 그렇게 흡사한지…… 세조는 문득 마음이 동하여 그 두 아이를 가까이 불러 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러 가지 말을 물어보았다. 미상불 천륜의 쏠리는 정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세조는 이내 그 아이들에게 생사불명이 된 자기 딸이 여기서 살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그러시는데 상감님이 외할아버지시라고 하면서 오늘 이리로 지나가시게 될 거라고 하였어요.』
순간 세조는 반가운 빛을 용안에 가득히 띠우고
『그래 너의 엄마가 지금 집에 있느냐?』
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두 아이를 앞세우고 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집에 들어가 보니 마침 젊은 여인 하나가 흐느껴 울고 있다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세조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아바마마‥·…』
여인은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떠듬떠듬
『그때 죽을 목숨이 어머님의 주선으로 빠져 나와 오늘까지 이곳에서 구차히 살고 있는 소녀로소이다.』
하고 엎드려 통곡하는 것이었다. 세조는 이 너무나 뜻밖의 일에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핏줄기의 따뜻한 정과 새삼스러이 지난날 자신의 너무도 악착스러웠던 행위에 대한 뼈아픈 뉘우침이 솟아올랐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세조는 천천히 입을 열어
『내 너의 어미 말만 믿고, 네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줄만 알았구나. 내가 너무 지나쳤었다. 과거는 어쩔 수 없는 일……그래 네 남편이 누구며 지금 어딜 갔느냐?』
하고 물었다. 공주는 옷깃을 여미고 그가 김종서의 손자와 만나 같이 지내다가 결혼하여 여기와 살게 된 경로를 자세히 아뢰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세조는 긴 한숨을 쉬더니 『하기야 김종서가 무슨 죄가 있었더냐? 그의 손자가 네 남편이 되었다니 도시 운명이로구나! 지난 일을 다 덮어두고 네가 이제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내 어찌 그냥 둘 수가 있겠느냐. 서울로 돌아가면 이내 부마궁을 마련해 놓고 너희들을 부를 터이니 내외다 올라오도록 하여라·』
이렇게 당부하고 세조는 떠나갔다. 그 뒤 지방장관이 인마를 거느리고 서울로 모셔가고져 찾아가 보니 이미 그들의 집은 텅 비어 있고 행적은 묘연할 뿐이었다.
아마도 김종서의 절개를 이어받은 자손인지라 구차한 원수의 참회의 보답이 싫어서인지 영화를 마다하고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을 이끌고 첩첩산중으로 행적을 감추었으리라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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