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다시 찾아온 곳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8년 전 이맘때 소나무 전지를 하러 이곳에 일하다가 곤지암으로 다시 가게 되었던 시작점이다. (취업을 하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되던 시절) 정말 잠자리에 들기 전 저에게 한 번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열심히 하겠노라 맘속으로 항상 기원했었고 간절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하던가 조경 설계로 사회 첫발을 내딛고 3년쯤 되었을 때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건가? 매일 야근에 지쳐가는 나는 같은 회사 현장에 계신 학교 선배님과 식사할 자리가 생겨 여쭤보았다. 현장일은 어떤가요 재가할 수 있을까요? 요즘 고민이라서요.
선배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말을 해주셨다
설계하는 친구들을 보면 돈도 잘 벌고 사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에 여름을 보내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지
현장은 비 오고 눈도 오고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돈도 관리직은 덜 벌어 하지만 난 선택을 했을 뿐이다
나는 다 뒤로하고 시간을 선택했을 뿐이야!
시간이요??? 선배는 애가 나는 3명이다. 관리직은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그럼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하지만 설계하는 친구들을 보면 늘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가족이라는 것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한 번에 벽돌을 쌓아 올리려 하면 무너지지
난 그 식사 자리 후 시간이 조금 흘러 회사 이직을 위해 젊은 혈기로 회사를 관두었다. 솔직히 말해 내 한 몸 갈 때 없겠나 였었다. 인생의 쓴맛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장 격력이 없는 날 아무 곳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소한 체격도 한몫했다
일은 해야겠기에 대학 동기 소개로 나무병원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고 원장님이 나의 성향에는 골프장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두 번째 변곡점) 이력서를 그때부터 방향을 바꿔 넣기 시작했고 곤지암 cc에 취업하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것을 정신적 스트레스에 못 이겨 나오게 되었고 취업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할 수 있었다. (이력서를 50곳 정도 넣었는데 능력 부족일까 취업이 안되었고 사는 곳에서 2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가는 지방까지 내려가서 면접을 봤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안 되겠다고 통보받았다. 그때부터 참았던 눈물이 얼마나 흐르던지 차를 세우고 목놓아 울었다(세 번째 변곡점) 그때 전화가 한통 왔다 시간을 선택했었던 선배였다
눈물은 났지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인사를 하니 요즘 어떻게 지내냐? 하신다 솔직하게 취업이 안돼서 면접보고 다닌다고 하니. 그런 건 바로바로 알려서 방법을 찾았어야 하시며 집에 가는 대로 이력서를 보내라고 하셨다. 정말 신기하게 그동안의 아픔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에버랜드 프로젝트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선배가 알아봐 주신 덕분이다)
계약이 끝나고 구직 활동을 하면서 학교 선배님이 하시는 분재원에서 일을 하며 일당일을 하다 헌법 재판소에 일을 하러 가게 되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곤지암 cc -> 곤지암 리조트로 다시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돌고 돌아 지금은 처인 체력단련장에 있지만 다양한 것을 경험한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같은 길을 걷고 싶진 않다
Daily
헌법재판소는 나에게 좋은 기운을 주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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