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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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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개 성황당 전설 진남교반 돌고개 마을의 성황당은 영남대로가 지나는 곳이다. 옛날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의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재촉하고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고, 선비는 급제하였으나 약속을 잊어버리고 수년이 흐르게 되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도 돌아오지 않자, 고생을 참다못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하였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 온 사방에 퍼졌다. 선비는 그때야 이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았고, 그..
아들을 낳고 싶었는데. 삼계면 베틀바위 북 임실군 삼계면 금동 마을의 산기슭에는 베틀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간절하게 아들 낳기를 원했던 한 부부의 소망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무참하게 유린된 한 서린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다. 지금부터 대략 400년 전의 일이다. 금동마을에 임 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금슬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웬일인지 혼인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자나 깨나 근심에 쌓여 있는 이들에게 한 점쟁이가 지금의 베틀바위를 가리키며 귀가 번씩 뜨이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 바위 위로 돌을 던져 그 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 득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위를 향해 던진 돌이 떨이 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아야기을 듣고 부부는 즉시 실천에 옮겼다. 얼핏 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겠..
옛소 이거나 받으시오 - 원주 며느리봉 원주시 봉산동과 소초면 홍양리의 경계에 '모래기’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물이 유난히 맑은 저수지가 하나 있고. 그 저수지 동쪽에 다소곳이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는데 이것이 며느리봉이다. 며느리봉의 오른쪽 골짜기 옆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용터지기가 있다. 용이 땅을 뚫고 솟았다는 전설에 걸맞게 지형이 매우 험상궂게 생긴 이곳은 옛날 최 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았단 집터라고 한다. 최부자는 바람막이 흙집에서 매 끼니 를 걱정하는 마을사람들과는 달리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지만 위인이 인색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가 외양간 에서 거름을 치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바랑 멘 스님이 고개를 숙이며 시주를 청..
산신령의 빗나간 계산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 17종과 솔송나무, 섬잣나무 등의 침엽수가 8종, 한 지식물인 주목나무, 향나무 등 모두 총 575 종의 식물이 번식하고 있는 울릉도는 본토로부터 옮겨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많아 망향에 어린 선설이 많으며 또한 작은 바위섬마다 그 모양에 걸맞은 흥미로운 전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울릉도 서쪽 끝 태하동 서낭당에는 지금도 한 청춘남녀의 원혼을 모시고 있다. 그들에 얽힌 전설을 소개한다. 아득한 옛날일이다. 동해에 김인우리는 안무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그의 임무는 매일 배를 타고 동해안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몇몇의 부하들과 기생한 명을 데리고 나와 바람결에 배를 맡긴 채 태평스럽게 바다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잔잔한 바다 위로 난데없이 먹구름이 ..
요씨, 조선년 하나쯤이야 충남 서부의 고봉인 가야산 지맥에서 서 쪽으로 뻗어 내린 부춘산은 일명 북주산이라고도 부른다. 송림과 기암이 잘 조화되어 천연적인 휴식공원으로 손색이 없는 이 산에는 돌로 축성된 길이 540여m의 산성이 있었으며, 기슭에는 국조인 단군의 영정을 모신 단군전과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700여 위패가 봉안된 충령각, 삼선암, 관음사 등 4개의 사찰이 자리해 있다. 이 산 최고봉에는 선녀가 가야금을 뜯는 형상의 옥녀봉이 있는데 옥녀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일본이 강제로 한일합방을 체결한 직후의 일이었다. 서산읍에는 일본인 소유의 금광 이 하나 있었는데 한창 번성해 나갈 무렵 오랜 장마가 계속되어 작업이 중단되었다. 덕분에 밤낮없이 작업에 시달리던 조선인 광부들은 모처럼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지만 이..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는 나지막한 쉼터 대전광역시 남쪽에 위치해 있는 보문산 (457m)에는 보문산성, 보문사지, 야외 음악당, 전망대 유희시설, 케이블카가 있으며 시루봉길등 10여 개의 등산로와 20여 개소의 약수터가 있다. 특히, 시기념물 제10 호인 보문산성은 1991년 12월 백제산성 중 최초로 복원되었다. 본래 이 산은 보물이 많다 하여 보물산이라 부르다가 후에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산이름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한다. 아득한 옛날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나무꾼에게는 골칫거리 형이 한 명 있었다. 방 탕한 생활을 하다가 혼기를 놓친 형은 매일 술을 마시고 주정을 일삼는 것으로 부모와 동생을 괴롭혔다. 사람들은 형의 행실을 손가락 질 하며 형의 몫까지 대신하면서도 불평 은커녕 묵묵히 일을..
벼락맞고 솟은 아홉개의 맑은 샘 구정봉 전남 영암 월출산(809m)은 지리산, 변산, 천관산 내장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 산으로 꼽힌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월출산 서쪽자락에 있는 구림마을에는 유명인물들 이 많이 배출되었다. 멀리로는 일본으로 가 서 일본인들을 무지로부터 구해낸 왕인 박 사가 있고, 풍수지리설을 처음 주창한 도선 국사도 구림마을 출신이다. 그리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기인장수 동차진이 태어난곳도 이곳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비상한 힘을 보인 그는 일곱 살이 돼 자 어른들도 하기 힘든 일을 거뜬하게 해냈 다고 한다.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 올려 돌 밭을 일구고 넓은 밭을 갈아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늘 먹고 살기는 빠듯했다. 집이 가난한 그는 감히 글을 배운다는 생각을..
천상의 여인, 등불로 태어나다 경북 안동에 있는 천등산(天山, 584m) 원래의 이름은 대망산이었다. 이곳은 신라시대 의상대사의 수도처로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의 모체, 봉정사로 더 유명한 산이다.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부르게 된 내력을 설명하려면 의상이 처음 입산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의상은 도를 닦기 위한 수도처로 대망산을 선택하고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봉정사 뒷산에 위치해 있는 천등암에서 공부를 시 작하였다. 천등암 토굴 안에서 비바람과 살을 에이는 듯한 혹독한 산속의 추위를 견 디며 수행을 계속하였는데, 나이 어린 소년 이 자연과 싸우면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노릇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굴 밖에 희미한 그림자 가 비치더니 '어흐흥' 하는 성난 호랑이의 포..
한겨울에 생고사리를 자라게 한 효성 / 충북 효촌리 시루봉 충북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쯤 가다보면 높이 255m의 나지막한 산을 만날 수 있다. 이 산의 정상이 바로 시루봉인데, 이곳에는 정성이 지극한 효자이 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효촌리에 경연 이라는 사람 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책읽기를 좋아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병을 얻게 되었다. 경연은 책을 덮 고 아버지 병구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온산을 뒤져 몸에 좋다는 약초를 캐다 드리고 밤낮없이 아버지 곁에 앉아 시중을 들었다. 그의 지극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누가 보아도 회생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그의 아버지가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얘야, 잉어를 먹으면 내 병이 나을 것 같 구나." 경연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당장 잉어 를 구하기 위해..
팔손이나무의 꽃말은 '비밀' 입니다. 남쪽 나라에 한 공주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공주에게는 아주 고운 보석 반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반지는 돌아가신 왕비가 물려준 것이었지요 공주는 그 반지를 보며 늘 어머니를 생각했고 그래서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반지가 깜쪽같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온 궁궐이 발칵 뒤집히게 되었지요 공주는 어머니를 또 한 번 잃는 듯한 슬픔에 자리에 몸져눕게 되었고 왕은 전국에 명령을 내려 이 반지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반지의 행방은 알 수 없었습니다. 왕은 마지막 방법으로 공주를 보살피는 시녀를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조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주가 평소에 가장 믿고 아끼는 시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