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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소 이거나 받으시오 - 원주 며느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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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시 봉산동과 소초면 홍양리의 경계에 '모래기’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물이 유난히 맑은 저수지가 하나 있고. 그 저수지 동쪽에 다소곳이 봉우리가 하나 솟아 있는데 이것이 며느리봉이다.
며느리봉의 오른쪽 골짜기 옆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용터지기가 있다. 용이 땅을 뚫고 솟았다는 전설에 걸맞게 지형이 매우 험상궂게 생긴 이곳은 옛날 최 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았단 집터라고 한다. 
최부자는 바람막이 흙집에서 매 끼니 를 걱정하는 마을사람들과는 달리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지만 위인이 인색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가 외양간 에서 거름을 치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바랑 멘 스님이 고개를 숙이며 시주를 청했다.
"흥! 남은 뼈빠지게 일해서 법어 놓았는데 부처님을 핑계 삼아 동냥을 청해?"
최부자는 한동안 스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일만 하고 있었다. 스님이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염불을 외우자 그는 불현듯 쇠스랑에 쇠똥울 푹’ 퍼 들고 말했다.
옛소! 이거나 받으시오. 이것도 밭에서는 금싸라기 같은 귀한 물건이지만 여기까지 온성의를 봐서 내 조금 떼어 주겠소.”
 최부자는 스님을 향해 쇠똥을 내던졌다 스님은 그런 최부자의 태도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쇠똥을 바랑에 넣으며 공손히 합장을 하였다.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이 광경을 부엌에서 지켜보던 며느리는 차마 스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뒤주를 열고 쌀 한 바가지를 퍼 담아 시아버지 몰래 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는 시주를 한 다음 말했다.
"스님. 죄송합니다. 저희 시아버님 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스님은 최부자에게 했던 것처럼 정중하게 합장을 하고 돌아갔다. 
그 며칠 후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면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순식간에 마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며느리는 겁에 질려 어쩔줄을 모르고 대청마루에서 허둥대고 있는데 대문 밖에서 며칠 전에 시주를 청하러 왔던 스님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며느리가 밖으로 나가자 스님은 그녀의 손을 잡고 뛰었다. 한참 소나기 속을 뚫고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스님이 말했다.
"부처님께서 댁의 시아버님을 벌주시기 위한 것이니 이제부터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만약 뒤를 돌아보면 당신도 벌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는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등 뒤에서 천등소리와 벼락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그때마다 마을부근에 있던 산봉우리가 하나씩 무너지면서 최부자의 집이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최부자도 결국 수장되고 말았다. 
스님과 며느리는 봉우리에 올라 잠기는 마을을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서히 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갑자기 커다란 바위에 벼락이 쳤다. 이때 부서진 바위덩어리가 최부자의 집터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터에 묻혀 있던 용이 땅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곳이 오늘날의 용터지기며 며느리가 올라가 수마를 피했던 산을 며느리 봉이라 전해지고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스님에 대한 예우도 각별했고, 시주를 청할 때 문전박대하는 일도 없었 다. 
조선시대의 기득권층인 유생이나 부자들은 불교를 배척했던 만큼 스님에 대한 하시도 보편화된다. 이 전설이 그런 풍조를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조선시대에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산림조합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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