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이야기다.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병들로 인해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된 선조대왕은이 위급한 사태를 명나라에 알리고 구원병을 청하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이여송을 제독으로 한 구원병을 보내 주었는데 이 여송이란 자는 성격이 오만불손하고 횡포무쌍한 자로서 생사지탈권까지 겸하고 있어 심히 다루기 힘든자였다.
그런데 이 여송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선 때는 이미 왜병들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는지 오랜 때였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본국으로부터 와야 할 보급 물자는 모조리 바닷물에 고사를 지내고 있던 형편인지라 전의를 상실하고 있는 판인데 별안간 명나라의 대군이 쳐들어 온다는 바람에 왜장 소서행장은 부득이 군대를 해주 방면으로 철수시키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이여송의 군대는 왜병과 얼마 싸우지도 않고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여송은 자기의 전속 통역관을 구해내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래서 뽑힌 사람이 평양성으로 피난 와 있던 김아응이라는 청년이었다.
김웅은 나이 고작 이십미만이었지만 명나라 말에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살결이 희고 날씬한 키에 용모 또한 아름다운 미남 청년이어서 이여송은 첫 눈에 혹하여 그날로 진중에 머무르게 하고 침식은 물론 잠시라도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명나라 제독의 통역관이 된 김웅은 주로 김통사로 통했는데 이여송이 아끼는 품은 웬만한 애첩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김통사 또한 영민하여 매사에 재치있게 움직이니 이여송은 날이 갈수록 김웅을 사랑하여그가 원하는 일이면 안 듣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조정에서는 이여송과, 접촉하는데 여간 부드러워진게 아니다.
그런데 왜군이 평양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명나라의 군사를 두려워 해서가 아니였다.
용전분투하는 이순신 장군 때문에 부득이 황해도 해주에 있는 혹전장정에게로 작전상 후퇴를 한 것 뿐이다.
그러나 흑전장정 역시 보급물자의 부족으로 고민하던 중 소서행장의 부대까지 합치게 되니 더 지탱해 멀 길이 없어 서울로 퇴군하게 되었다.
이런줄을 모르는 명 나라 군대는 그 위를 추격 했다가 벽제군 한 싸움에서 여지없이 패하고 맡았다.
그렇게 되자 이여송은 전의를 상실하고 평양성으로 회군하면서부터 밤낮으로 우리 조정에 트집이나 잡는 것으로 체면을 유지하다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갈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우리 측으로서는 명나라의 군대가 철수 한다면 두가지 큰 손실을 맛보아야 했다.
우선 국내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이라던지 장병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은 물론 군비가 부족하여 싸우려해도 싸울수 없는 처지였고 더구나 이순신 장군의 해전과 아울러 육지에서 밀고 내려가야 할 그런 전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모든 굴욕을 참아가며 이여송의 비위를 맞추게 됐는데 미모의 김 통사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어쨌든 명나라는 수군까지 증파하여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힘이 돼 주었다.
이리하여 7년 풍진도 걷히고 이여송 제독은 위세를 떨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여송이 미모의 김통사를 놓지 않고 데려 가기로 한 바람에 김통사는 본의 아니게 부모처자와 생이별을 하게 돼 버렸다.
우리 조정에서도 그 공로에 비해 이런 조그마한 문제에 인색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여송의 군대가 기세도 당당하게 요동지방에 접어들어 유문이란 곳에 당도하게 되자 이여송은 조선땅에 원정 갔을 때 군량미를 때 맞춰 보내주지 않았던 요동도통을 잡아 가두고 군법에 따라 처벌키로 하였다, 군량위반죄란 죄명이어서 사형에 해당되었다.
이래서 요동도통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그런데 요동도통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삼형제는 깜짝 놀라 유문으로 달려오게 되었다.
맏아들은 시랑이란 직위이 있었고 둘째는 서길사라는 벼슬을 하며 셋째는 신승이란 도학자로서 황제를 보필하는 지위로 모두가 명나라의 고관대작이었건만 안하무인 이여송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본래 이여송이란 사나이는 넓은 만주벌판에서 자라났고 광활하고 비옥한 도지를 개척하며 농사와 목축을 장려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를 양성하여 새 세력을 이룩한 무장이었다.
이러한 이여송의 신흥세력은 광활한 만주지역을 손아귀에 휘어잡고 명나라를 위협 했었다.
이 힘차게 일어나는 이여송의 세력은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큰 두통거리의 존재였기에 명나라 조정은 이여송을 달래는 수단으로 병마도통이라는 벼슬을 제수하여 무마하였던 것이며 이여송은 이여송대로 대명제국의 고관이라는 영광에 얽혀 스스로가 명나라의 고관행세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차에 조선의 급보를 받게 된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여송의 세력을 꺾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그를 즉시 제독으로 승진시켜 조선으로 출병케 하여 왜군과의 싸움에서 그의 세력을 줄이게하려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전후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요동도통의 삼형제는 서뿔리 아버지를 구하려고 나섰다가는 이여송의 비위만 거슬리게 되어 도리어 아버지를 죽게 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심히 걱정을 하던 나머지 구명 운동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데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묘안이 나지 않아 조바심을 하던 중, 하루는 세째 신승이 이여송과 김통사의 소문을 얻어 듣고는 형들과 상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다 하는 명나라의 고관인 자기들이 일개 통역관에게 굽신거린다는 것은 너무한 일이긴 했지만 일이 하도 다급한지라 삼형제는 김통사를 찾아 부탁하기로 했다.
이러한 연유로 이여송의 진영에 있던 김통사는 그들로 부터 만나 뵙자는 간곡한 청을 받게 되었다.
『요동도통의 아들 삼형제가 진문밖에 와서 소인을 만나고자 하니 어찌하오리까?』
내막을 모르는 김웅은 어리둥절해서 곧 이여송에게 이 뜻을 물었다.
그러자 이여송은 한참을 묵묵히 있더니
『필시 그자들이 저희 부친의 목숨을 구해 내려고 그러는 게로구나. 여하튼 그들은 대국의 고관지위에 있는 신분들이요, 너는 일개 외국의 역관에 지나지 않는 신분인 즉, 어찌 감히 네가 그들의 면회 청원을 거절할 수가 있겠느냐? 나가 만나보도록 하여라.』하고 나가 만나라고 했다.
김통사가 진문 밖으로 나간즉, 과연 그들 삼형제는
『우리 가친께서 불행히도 군법이 저촉되어 살아날 길이 막연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귀공께서 제독께 잘 말씀 드리셔서 목숨을 구하도록 하여 주시기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하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김 통사로서는 실로 황공한 노릇이었다.
자기 신분상으로 보아 분수에 넘치는 청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른다고 딱 잡아뗄수도 없는 일이어서
『소인은 일개 외국의 역생인 신분으로서, 어찌 그와 같은 군법상 중대한 일에 관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인들께서 어버이를 위하시는 정성이 이렇듯 간절하시오니 어찌 제가 그 간청을 소홀히 물러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즉 그 하회는 예측 할 수가 없사오나, 우선 이 사정을 제독께 간곡히 아뢰겠읍니다.』
하고는 총총히 진중으로 돌아왔다. 이 때 이여송은 김통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들이 무어라 하더냐. 필시 저의 부친의 구명운동이었겠지?』
『과연 그러하더이다. 그들이 오직 어버이를 위하는 효성으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 같은 사람에게 간절한 청탁을 하는 것을 보니, 소인 비감한 마음 어디다 비할 바가 없었읍니다.』김통사로선 숨길 수 없어 죄다 털어놓았다.
그러자 김통사를 물그러미 바라보던 제독은
『네가 평생 거칠은 전진 속에 횡행하며 허다한 풍상을 겪어올적에, 오직 공사의 분별을 엄히하여 사사로히 공사를 소홀히 한 일이 일찌기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와 같이 귀인들이 우리 진중의 미미한 존재인 너를 찾아와, 군법을 범한 사형수의 구명 운동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키도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이것은 오로지 그동안 네가 나의 신변에 있어서 그 얼마나 절실한 존재였던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일이로다. 그런데, 내가 오늘날 너를 데리고 여기가지 오기에 이르러 무엇하나 생색 낸 일이 없은 즉 내 한번 지엄한 군율을 늦구어, 낯을 세워주리라.』
하며 넓은 아량을 베풀지 않는가.
너무나 감격한 김통사는 이 소리에 머리를 조아려 사은하고 즉시 그들 삼형제에게 제독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이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김통사에게 절하며
『그대의 은덕으로 우리 부친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그 은혜 하늘보다도 높고 황해보다도 깊도다. 장차 어떻게, 또한 무엇으로 그 은덕을 갚으리오.』
송구스러운 김통사는『천만의 말씀이외다.』하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즉 그들 삼형제는
『그러면 그대의 신분이 통역에 지나지 않은 미미한 존재이니 우리가 조정을 통하여 그대에게 재상 벼슬을 제수하도록 함이 어떠할까요?』
하자 김통사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문의 지체 구별이 엄격하여서 아무나 그렇게 단번에 높은 벼슬을 못하는 법 입니다. 그런즉 소인은 중인의 신분인데 가사 귀국의 주선으로 고관의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도리어 세상에 조소를 사게 될뿐이오니, 부당한 줄로 아뢰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마음 속으로, 자고로 조선은 동방 예의지국이라 하더니 과연 심덕이 착하구나 하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그저 말로만 치사를 그치고 돌아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보은하여야 겠는데 장본인이 이것 저것 다 싫다고 하니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들 삼형제는 다시 김통사를 둘러싸고 이번에는 사정조로 그대의 말은 다. 옳고 사리에 지당한 의 견인줄로 아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이야기 해 봅시다. 그대라면 이 경우에 그저 이대로 작별하고 돌아설 수 있겠소? 그런즉 그대는 이상 더 사양치 말고, 우리의 고소청 하나를 말해 주면, 그에서 더 기쁜 일이 없겠소 아무리 지귀난득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대의 뜻대로 봉부하겠소.』
하고 더욱 간절하게 말했다.
김통사는 더 이상 그들의 호의를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잠시 침묵에 잠기었다. 어떻게 할까. 무슨 소원을 할까. 시간이 일각일각 흘렀다. 언게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귀인들께서 정 그러신다면, 제가 어찌 용렬한 고집만을 세우겠습니까. 소원이라야 별로생각하여 본바도 없지만, 구태여 말하라 하시면···천하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한번보았으면 하는 바이올시다.』
하고 말을 하니 그들 삼형세는 서로 바라다 보며 아연실색 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소원이란 상상외의 엉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귀중한 물건이라면 금은 보배가 있고 또 권력으로 되는 일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아니지만 엉뚱하게 천하일색을 한번 보게 해 달라는데는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서로 바라다볼 뿐, 무어라 대답을 못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세째 아우 신승이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잘 알았소. 어렵지 않은 그대의 청인 줄 아오, 다만 얼마동안 시일을 요하여야 할 일이니 그대가 제독을 모시고 회군하여 입경하게 될 때, 다시 만나기로 상약하십시다.』
하고 심각하게 말하더니 떠나갔다.
그들과 작별한 김통사가 진중으로 돌아오니, 제독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그들이 반드시 너에게 보은하려 하였을터인데 너는 무슨 소원을 말하였는고?』
하고 물었다. 김통사는 사실대로 그 사연을 얘기했다.
그러자 제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김통사의 등을 어루만지며
『허, 참 장하도다. 일개 역생에 불과하는 신분인 네가 어떻게 그렇게도 기개가 큰 대장부다운 소리를 하였단 말이냐. 과연 너를 사랑하였음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후, 이여송은 군대를 이끌고 여러날만에 명나라 서울에 당도하였다.
김통사는 제독 관아에서 그 동안의 노고를 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 삼형제가 손수 찾아왔다.
그들은 원로의 수고로움을 위로하면서 자기네 집으로 초청하기에 김통사는 별로 하는 일도 없고 그들의 호의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그 초청에 응하기로 했다.
김통사가 그들을 따라 가본즉, 그 집은 명나라 서울에서도 빠지지 않는 웅장한 저 택 이 었다. 대문과 중문을 지나 다시 여러번 작고 큰 문을 거쳐서 한 누각으로 안내하는데 올라가 보니 금벽사창에 주렵장막이 여러폭으로 드려워져 있고 벽화가 너무나도 찬란하여 심신이 황홀하였다.
주인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으니 계집 하인이 차를 가져왔다. 주인은 차를 들어 김통사에게 권하며 넌즈지 말했다
『오늘 밤은 돌아갈 생각을 말고 이곳에서 하루밤 지내도록 하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채 깨닫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지음 안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향내가 방 안을 휩쓸었다.
김통사가 눈을 들어 그 곳을 바라보니 주령장막을 소리없이 헤치고 유두분면에 찬란한 옷차림을 한 이팔소녀 수십 명이 혹은 향로, 향합, 혹은 홍백상차를 받들고 양쪽으로 열을 지어 사뿐사뿐 걸어나와 김통사를 중심으르 그 앞에 시립하는 것이다.
김통사가 보니 그들이 어찌나 예쁜지 이 제상에선 처음 보는 미인들이었다 .
한 동아 황홀해진 채 앉았던 김통사는 슬그머니 자릴 떴다.
그만 돌아가려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주인 삼형제가 앞을 가로 막으며
『어찌 일어 나시요?』하고 물었다.
『이제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만 가려하오 ! 』
그랬더니 그들은 펄쩍 뛰면서 그녀들은 천하 일색의 시녀에 지나지 않는데 가다니 안될 말이라면서 김통사를 굳이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통사로선 그녀들 이상의 미녀가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대관절 얼마만큼 더 예쁜 여자를 구해놨기에 그러나 하고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난사의 향기가 진동하여 맞은 편의 주렴장막이 소리없이 움직이더니 옥패와 금패의 갖은 패물들이 서로 부딛치는 음향이 은은히 들리며, 십여 여인의 아름다운 시녀들에게 옹위되어 한 떨기 꽃 송이 같은 낭자가 나타나는데 김통사는 그만 안광이 무디고 심신이 황홀하여 몸 가질 바를 몰랐다.
그 낭자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뿐사뿐 걸어나와 김통사의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좌정하였다.
김통사의 눈에는 그 여자의 얼굴 외형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요, 도무지 그의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가 없고 다만 의장지분으로 아름다운 덩어리를 빚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에 주인 삼형제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원하던 천하일색이 바로 저 낭자로다 과연 그 미색이 어떠신지?」김통사는 무어 라 대답을 못하고 다시 그 여자를 바라 보았다.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그 여자의 몸을 장식한 금은 진주 등 패물의 광채가 서로 반사하여 아롱거릴 뿐 도무지 확실한 모습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얼빠진 사람 모양 멍하고 있는데 삼형제는 다시
『상견례는 그만하고 이제부터 화촉동랑을 차리도록 하오.』
하고 웃으며 재촉했다.
이 말에 정신이 바짝 난 김통사가
『나는 천하일색을 한번 보기 원했던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오!』
하고 정색 을 하자 삼형제는 깜짜 놀라며 그럴 수가 있느냐 했다.
『그대는 천하일색을 보기가 소원이라고 할때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것은 천자의 권세로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요.』
하면서 천하일색을 구하게 된 그간의 고심담을 털어 놓았다.
연전에 운남국이 적국의 침략을 받아 위급했을 때 명나라가 구해 준 일이 있었는데 운남왕은 그 당시의 은공을 갚으려고 여러차례 소원을 물어 왔다는 것으로 마침 그에게 말이 있어 천하일색이라는 소문이 김통사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그날로 운남왕에지 사자를 보내 김통사와의 사연을 얘기하고 혼담을 전냈다가 승락을 얻어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운남국은 여기서 삼만리라는먼 거리인데 김통사가 입경하는 시기까지 완수하기 위해 그동안 천리마 세필을 꺾고 은자 수만량을 허비하여 왕녀와의 혼인을 마련토륵 했는데 그의 말마다나 여자를 한번 보기만 하고 만다면 어쩌라는 것이냐는 것이다.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일국의 왕녀의 신분이고 또 애당초부터 그런 약속이 아니었더니 만큼 자신들의 체면으로도 그럴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어찌 일개 노리개 모양 이국 남자에게 한번 슬쩍 보게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김통사는 말을 듣고 보니 도저히 자리를 밀치고 일어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주인이 하라는 대로 묵묵히 몸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
이윽고 밤은 점점 깊어가고 호화롭게 장식한 누각 안에는 휘황찬란한 화촉동방이 벌어졌다.
능라금주로 둘러싼 장막 속에 원앙금침을 펴 놓고 김통사는 천하일색과 운우지정을 맺었 다.
이튿날 김통사는 주인 삼형제를 찾아 별당으로 갔다. 그들은 김통사를 보더니
『그대는 장차 피녀를 어떻게 처우하려는가?』
하고 운남공주와의 일을 물었다.
『소생, 미천한 몸으로 만리타국에서 창졸간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 선후지책이 막연할 뿐이니 원컨대 끝까지 선도하여 주심을 바랄 다름이외다.』했다.
이에 주인들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피녀를 귀국할 때 데리고 가라고 했다.
이 말에 김통사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예절상 부모를 모신 몸으로 외국에서 작첩을 해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못하는 노릇이다. 그래서 김통사는 난처한 점이 있다 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천하일색을 하룻밤 인연으로 영별할 작정이란 말인가?
사실이지. 김통사로서도 천하일색의 운남공주를 하루방 인연으로 영원히 작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벅찬 애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괴로운 심정의 김통사를 바라보던 삼형제는 저희끼리 한 동안 상의 하더니
『우리가 그대에게 태산같은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 그대의 일에 범연할 수가 있겠소 피녀를 우리가 맡아가지고 일생 생활을 보장해 줄 터이니 안심하고 다음번 들어오는 사신의 역관으로 수행하여 다시 오도록 하여 자주 거래하면 그 편에 도리어 피차간 애정이 새로워지고 좋지 않겠소!』했다.
이제까지 침울해 있던 김통사의 얼굴에는 생기가 솟아 올랐다.
이윽고 김통사는 만리 타국에서 기연을 맺은 천하의 미인을 홀로 남겨두고 명나라 서울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 김통사는 삼년만큼 한번씩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의 전속 역관이 되어 명나라 서울을 왕래하게 되었다.
이들이 이렇게 삼년만큼씩 만났다가 애달피 헤어지고 하는 장상이란 마치 견우 직녀의 전설을 방불케 하였다.
그로부터 무정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 어느덧 그들 사이에는 일남 일녀가 생겨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만고 풍상을 겪은 선조도 가시고 광해군의 폭정도 속절없이 흐르고 반정 의거가 일어나 인조가 새 정원을 수립하였다.
이때, 명나라에서 인조 즉위를 하례하고자 파견된 칙사가 있었는데 그 수행원으로 조선나라에 청년 외교관이 한사람 있었다.
얼굴이 수려하고 두드러지게 예쁠 뿐 아니라 우리 나라 말을 유창하게 썼다.
그 청년 외교관은 스스로를 조선 사람이라 했다. 그는 곧 김통사와 천하일색인 운남국 공주 사이에 출생한 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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