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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애끓는 비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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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님, 저번에 대감께서 데러오신 처녀가 보통으로 예쁜것이 아닙니다."
"그렇더군. 나도 잠깐 본일이 있는데, 참 복숭아꽃같이 예쁘데."
말을 주고받는 사람은 청지기와 스무살이 될까말까한 청년.
원나라 대승상 탈탈의 집이다.
탈탈공이 변방 순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웬 처녀아이를 데려왔던 것이다. 그 처녀에 대해서 승상댁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런 어여쁜 처녀를 어디서 데리고 오셨을까요 ? "
궁금한지 청지기가 청년에게 묻는다.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대감께서 순시를 도시다가 어느 깊은 숲속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알아 보게 하였더니, 하인이 그 처녀를 데리고 왔다나봐."
청년의 이아기는 계속된다. 하인이 가본즉, 어떤 무뢰한이 그 처녀를 끌고 가려고 하는데 처녀는 안 끌려가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이 느닷없이
"대감 행차시다! 길 비켜라."
하고 호령을 했다. 무뢰한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버렸다.
하인은 처녀를 데리고 대감께 그 사실을 고했다.
"대감께서는 그 처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집으로 데려오셨다는 거야."
청년은 승상 부인에게서 들은대로 대강대강 청지기에게 이야기 한다.
"어떻게 된 처녀일까요?"
"글쎄 잘 몰라."
"어쨋든 불쌍한 처지입니다. 부모나 형제는 있는지. "
"부모 없는 자식이 있겠나마는, 무슨 이유인지 나쁜 놈에게 살해를 당했다던가. 그리그 형제는 없다던가......"
"거 참 안됐네요. 세상에 못된 놈도 있지. 사람을 죽이다니."
"그러나 저러나 대감께서는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수양따님으로 하시는지, 여종으로 두시는지요."
청지기는 퍽이나 궁금한 모양인지 꼬치꼬치 캐어 묻는다.
"따님으로야 하시겠나, 아마 대방마님 몸종으로 두시려는가봐,"
청년과 청지기가 가엾은 처녀를 놓고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도 흥미는 있으나 그보다도 그 이야기하는 분위기 또한 이상하다. 청지기야 그런 것이지마는 청년의 태도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집 가족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식객 같지는 않고 다니러 온 사람 같지도 않다.
그렇다. 그는 특수한 존재였다. 원나라 대승상 댁에서 원나라 옷을 입고 원나라 말을 하고는 있으나 그는 원나라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려 사람이다.
고려 말엽의 국세는 쇠퇴하였고, 신흥국 원나라는 강성하여 고려는 대항을 못하고 눌려 지냈다.
고려 임금은 원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고려의 좋은 집안 처녀들이 원나라로 뽑혀가 원나라 왕실의 희궁이 되거나 대신들의 처첩이 되었다. 고려에는 원나라의 풍속제도가 물밀드시 들어오고 고려에서는 왕자나 종실이 원나라로 볼모가 되어 갔다.
그러던 무렵의 일이다. 청지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청년은 고려 백천사람으로 이름은 조 반이다.
조 반이 열 살쯤 때일까. 그의 누님이 원나라로 뽑혀을때 따라온 것이다. 누님이 탈탈 대승상의 부인이 되자 조 공자도 탈탈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누님이 있기는 하지미는 부모슬하를 떠나 온지라 조공자는 외로운 처지에 있었다.
다행히 대승상 탈탈이 원만한 사람이었고, 누님이 비록 몸은 원나라 승상부인이 되어 있으나 동생에게 마음을 써서 조공자는 공부를 열실히 하였고 약관 전에 벌써 학문이 깊어 이름을 떨치게 되고 원나라에 온 고려선비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조공자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더구나 그는 이역 땅의 외로운 몸이다.
청지기와 이야기를 하면서 머릿속에 그 처녀를 그리고 있었다. 그 처녀가 의지할 데 없는 외도톨이라는 처지가 측은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동정심이 구름 일듯 일었다.
자기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처녀의 외로운 처지를 동정하는 줄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다. 동정이 아니라 동경인 것같다. 동정과 그리움과는 별개다. 그리움은 동경인 것이다.
그날 밤, 조공자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생각 뿐이였다. 처음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공상만 했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는 조 공자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춘삼월 백화가 난만하고 새는 노래 부르는 어느 날 밤, 조 공자는 이불을 걷어차고 창틈으로 새어드는 달빛을 따라 밖으르 나왔다. 춘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윽한 항기를 따라 발길을 후원으로 옮긴다.
고요한 달빛 아래 부드러운 봄바람은 이 귀여운 공자의 마음을 훈훈히 감싼다.
꽃향기에 취하여 목적도 없이 이리저리 거닐던 조 공자는 활짝 핀 복숭아나무 밑 잔디 위에 주저 앉고 만다.
달밤에 보는 꽃은 그 더욱 아름답구나. 꽃은 예로부터 미인으로 비기는 것을 미인도 달밤에 보면 그 더욱 아름다울 것이 아니냐. 부질없은 생각임을 모르랴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데에야 어찌하랴.
그런데, 저게 무슨 소리냐? 어디선가 여자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조 공자는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여자의 울음소리라니. 조 공자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다.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며 귀를 기울인다. 더 똑똑히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그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 간다. 아마도 그 울음소리를 엿듣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겠지.
울음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찾아낸 조 공자는 가만가만 다가간다. 과연 여자가 울고 있는데 어린 여자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조 공자를 발견한 여자는 쭈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서서 저 쪽으로 가려고 한다. 그 여자는 얼마전에 대감이 데려온 처녀였다. 조 공자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조 공자는 긴장했다.
"얘."
처녀는 떼어 놓으러던 발을 멈추고 돌아선다.
"이름이 뭐지?"
"월낭이라 합니다."
죄나 지은듯이 어찌할바를 모르는 월낭은 달빛을 받아 황홀한 느낌을 풍긴다.
"밤중에 단 둘이 만난다는 것은 떳떳한 일은 아니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이 있다. 우선 왜 우는지 그 우는 연유나 말해 다오. 고향이 그리우냐."
조 공자는 조용조용히 은근하게 말을 건네였다.
"서방님, 쉰네가 당돌하게 울음소리를 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듣자니 너의 사정이 퍽 딱한 것 같다기에 지난 내력을 듣자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쉰네를 그처럼 불쌍히 여기셔서 물으시니 말씀하오리다."
하면서, 월랑은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쉰다.
"그래, 네가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사양하지 말고 자초지종을 말해보아라."
월랑은 조공자의 다정한 말에 친근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월랑의 부모는 한족으로, 선조가 대대로 벼슬을 살아온 집안이었는데, 원나라가 되자 영락하여 월랑의 부모는 살림조차 어려운 형편이였다.
월랑의 아버지는 처자가 굶게 되자 이웃에 사는 부잣집으로 가서 빚을 얻어서 살림을 꾸려 왔다.
월랑의 아버지에게 빚을 준 부자는 그 빚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못 갚게되는 것을 기화로 그 대신에 월랑을 빼앗으려고 했다.
월랑 아버지는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딱하기는 하나 그런다고 딸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놓으라거니 줄 수 없다느니 옥신각신 싸움이 벌어지고 날이 갈수록 감정이 악화되여 결국에는 원수처럼 되였다.
부자는 월랑을 뺏기 위해서는 월랑의 부모를 없애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심복을 시켜 월랑 부모를 살해하고 그집에 불을 지른 다음 월랑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황금에 어두워 죄를 저지른 무뢰한은 월랑을 들쳐업고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왜 숲속으로 도망쳤을까? 돈을 준 부자에게 월랑을 데려다 주어야 할것이 아닌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즉, 그 무뢰한은 어차피 못할짓을 한판이라 제정신이 아니였다. 월랑에게 자갈을 먹이고 팔다리를 묶어 꼼짝못하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어쩌라는 것인가?
아무리 부자라도 죄는 죄다. 무뢰한은 그 부자도 무섭지 않았다. 이 아까운 월랑을 그냥 넘겨 주기가 싫었다. 그래서 부자의 집으로 가지 않고 숲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으슥한 곳에 다다르자 월랑을 내려놓고 야욕을 채우려 하였다. 월랑은 죽을 힘을 다하여 항거하나 힘이 부쳐 위험한 찰라였다. 그때 탈탈 대승상의 행차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무사히 구출은 되었으나 억울하게 죽은 부모 생각이 나서 울음으로 나날을 보낸다는 것이다.
말을 마친 월랑은 그만 가슴이 북받쳐 잔디 위에 쓰러진다.
조 공자는 체면 차릴 겨를더 없이 쓰러진 월랑을 일으켜 안았다. 월랑은 까무러친 듯 정신을 못 차린다.
"월랑아, 정신 차려라."
상반신을 가볍게 흔들며 흐트러진 머리 카락도 쓰다듬어 주고 팔도 주무른다.
이 광경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다만 봄달이 비추어 줄 뿐이다. 눈을 감고 숨소리만 높은 월랑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던 월랑은 조공자가 흔들어서 정신이 드는 것일까. 눈을 뜨더니, 자기몸이 조공자 무릎 위에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다.
"아아고머니, 서방님께 실례를......"
하며 옷매무새를 만진다.
"괜찮다. 쓰러지기에 놀랐다. 정신이 드느냐."
앉은채로 안심한 듯이 월랑의 얼굴을 쳐다본다.
"죄송합니다, 서방님을 놀라시게 해서. 쉰네는 이야기 끝에 아찔한 것까지는 기억이 있는데 그 다음은 기억이 없나이다."
일어서면서 조 공자도
"그럴 테지. 듣고 있던 나도 치가 떨리는데, 직접 당한 사람이 어찌 그러쟎겠느냐."하고 말을 잇는다.
"월랑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구먼. 어쩐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른지 모르나 내가 니를 처음 봤을때부터 남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너는 내머릿속에 항상 그려져 있었다. 나는 사랑하고 있다."
조 공자는 월랑의 따뜻한 손을 끌어다가 꼭 쥔다. 손을 맡기는 것을 보니 월랑도 싫지 않은 모양이다.
"쉰네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뭐라고 여쭈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그러나 서방님과 쇤네는 신분이 다른데 어찌 그같은 일이 있을 수 있사오리까."
"월랑아, 당치도 않은 말이다. 서로 처지는 다르다마는 사랑에 무슨 존비가 있으며 국적이 있느냐? 내가 변변하지는 않으나 그런 것에 구애하겠느냐."
"서방님께서야 그리 생각하실지라도 대방마님이나 대감님께서야 어찌 허락하시겠나이까"
"그야 반대하시겠지. 하지만 우리만 마음이 맞는다면야 못할 것이 무엇이냐? 나는 이미 결심한 바이니 염려할 것 없다."
"서방님의 참뜻은 알았나이다. 미천한 몸이오나 거두어 주시고 버리지 않으신다면 평생 서방님을 모시오리다."
월랑은 감격의 눈물이 쏟아진다.
"고맙다. 내가 이 세상이 나서 이런 기쁨을 맛보는 것은 처음이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조 공자는 월랑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든다.
"쇤네는 울고만 싶습니다."
눈물어린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인다.
"눈물이란 좋을 때에도 나는 법이다. 울기만 할것이 아니라, 우리 저 달님에게 맹세도 하고 복을 빌자."
두 손을 마주잡고 달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사랑을 빌었다.
"자, 밤이 깊었으니 들어가 자자. 그리그 우리 일은 내일 내가 좋도록 하겠다."
꽃다운 젊은 남녀는 헤어지기 싫었으나 각자 처소로 돌아가 행복을 가득 안고 밤을 새웠다.
이튿날, 대방마님과 조공자는 내실에서 심각한 의논을 했다.
"누님, 제 생각이 잘못입니까?"
"그럼 안되다마다. 아무리 계집에게 반했기로서니 대감체면도 있고 내 얼굴도 있는데, 네가 함부로 그럴 수있니."
"그걸 몰라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월랑도 근본이 나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며칠 동안 우리 집에 와서 누님을 모신 것 뿐이지 어느새 신분이 낮어져 몸에 뱃겠읍니까."
"그래도 그러쟎아. 과거에는 아무리 명문 가족의 집안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무도 없고, 더구나 단 하루라 하더라도 몸종으로 있는 몸이 아니냐."
"그건 알고 있읍니다. 저는 씨종이 아닌 다음에야 어쩌랴 싶어서 이미 지난 밤에 언약을 했읍니다. 장부 일언이 중천금인데 어찌 합니까?"
조공자는 물러서지 않고 애원하는 투로 사정을 한다.
"어째? 언약을 했어?"
승상 부인은 조 공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다본다.
"예, 그랬읍니다. 죄송스럽습니다마는 누님께서 동생을 용서해 주시고 대장부가 아녀자에게 실언을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승상 부인도 별수 없는 모양이다. 한참 아무말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반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구나. 그러나 조건이 있다."
고, 엄숙한 표정을 짓는다.
"조건이라니요 ? "
"월랑을 첩으로 한다는 약속을 해 다오."
"누님, 감사합니다. 동생으로서 누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분부대로 하겠읍니다."
조 공자는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승상 부인은 월랑을 불렀다.
"월랑아, 너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것도 한 인연이니 서랑을 모시되 네가 정실이 아님을 명심해라."
"마님, 감사합니다. 쇤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분에 넘치는 가르치심까지 내려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두 젊은이들에게는 그것이 정식 부부가 아니건마는 맺어지는 것만 고마왔다.
어렵게 생각했던 문제가 승상 부인의 승낙으로 쉽게 성공한 셈이다.
그날 밤, 승상 부인은 탈탈 승상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월랑이가 얌전하고 반반하지. 근거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그러나, 세상에 어찌 그런 내막을 알겠소. 덮어놓고 된소리 안된소리 떠들어 댈테니 창피하지 않겠소?"
생각한바와 같이 탐탁하지 않다는 태도다.
"저희끼리 벌써 언약을 했다니 어떻게 합니까?"
"아니 내가 부인보고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지. 부인 말대로 하는 도리밖에 없는 것 같소."
탈탈 승상은 대범한 사람이다. 더 말하치 않고 잔치라도해서 섭섭하지 않게 하라고까지 했다.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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