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동남 남쪽으로 활몸 모양의 곡선을 이루며 뻗어,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마천령 산맥, 이 산맥에는 높이가 2,000m넘는 산들이 많은데, 그 남쪽 끝 부분에 마지막 높은 재가 있으니 마천령이다.
마천령의 높이는 725m. 동쪽으로 이십리에는 성진, 남남 서쪽으로는 단척이 오십리 쯤에 있다.
마천령을 이판령이라고도 하는데,
"이판"이란 말은 옛날 여진족의 말로 "소"를 일컫는다.
어느 날, 여진 사람이 마천령 아래에서 송아지를 팔았는데, 어미 소가 송아지를 찾으러 높은 재를 넘어가는 통에 길이 생겨 소 임자가 그 길로 좇아간 다음부터 여러 사람이 왕래하면서 이재이름을 이판령 즉 소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천령의 산세가 웅장하여 영기가 서린다고 부근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노인들이 말을 하였다.
마천령과 그 남쪽 바닷가의 중간지점에 명천 고을의 조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고, 그 마을에 이씨 성 가진 사람이 있었다.
조선시대 말엽, 서기 1854년(철종 5년)에 이씨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씩씩하여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이씨는 기뻐하여 아이 이름을 용익이라 했다.
용익이 자라면서 산세의 기상을 띠어 성품이 담대하고, 동네 아이들을 위압하여 따르지 않는 아이가 없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집안에서는 어버이를 받드는데 그렇게 효성이 지극할 수가 없었다.
이 용익의 부친은 걱정이 생겼다.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에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썩이지 않나 싶어서다. 더구나 함경도는 산이 많고 땅이 기름지지 않아 서당이나 서원 같은 문화시설이 귀하므로 보낼 데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낮에는 먹고 살기에 힘쓰고 저녁에는 아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몇 년이지나, 경성 군수 벼슬을 살던 박가라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왔다.
용익의 아버지는 그 박군수에게 아들을 맡겼다.
세월은 흘러 이 용익도 청년이 되었는데, 사서오경을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이 용익은 글을 익다가 뜻밖의 발언을 했다.
"영감님"
"왜 그러느냐?"
"글을 읽는 것은 책속에 쐬어 있는 대로 행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글을 읽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글을 배우나마나 아닙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언제 그 많은 책을 읽어서 언제 다 행합니까? 글을 읽다가 세월을 다 보내고 말겠읍니다"
"그렇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하려면 많은 책을 읽어서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 아니냐?"
"그거야 그렇습니다 마는, 저를 가르치시는 영감님은 그 많은 책을 읽으시고도 겨우 경성 군수를 지내시고, 이제는 훈장질밖에 못하시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박 군수는 말문이 막혔다. 이 용익은 사실상 자기 어버지가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무한한 고생을 하는 것이 안타까왔다.
이 용익은 공부를 그만두었다.
(돈이 없이 무슨 성공이 있느냐. 쩔쩔매면서 글을 읽어서 무엇을 하겠느냐? 돈이 있어야 한다)
이 용익은 돈이 있어야 입신도 양명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돈벌 궁리를 했다.
(돈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땅속에 있다. 금과 옥은 모두 돈인데 땅속에 묻혀 있다. 이것을 캐내야 한다. 땅속에는 금도 있고 구리도 있고 쇠도 있다)
이 용익은 광산에 눈을 뜬 것이다. 그러나 광산을 하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없다.
(돈이 필요한 것은 광부 삯 때문이다. 광부만 있으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생활에 쪼들리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의논을 했다.
"내 청좀 들어주게"
"뭣 인데?"
"우리가 이왕 할 일이 없어서 놀고있는 판인데, 놀고만 있으면 뭣하나 허송세월 할 바에야 한번 어떤 일을 해보고 잘되면 한 밑천 잡는 것이요, 잘 안되어도 본전 아닌가, 한번 안해 보겠나?"
"무슨 일인데 그래?"
"금을 파는 일이네"
"그러지. 어차피 놀고 있으니까 한번 해보세"
그들은 이 용익이 잘나고 게다가 글공부까지 했으니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고, 또 지금까지 말을 안듣다가 혼도 날일이 있으니 아니할 수도 없고 이판 저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이 용익은 친구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연전에 서울 사람들이 와서 금을 파다가 실패한 금패원에 갔다. 땅 이름이 금패원이니 그 이름에 무슨 까닭이 있을 것 아닌가. 파 보자.
파기 시작한지 네댓 달이 되어도 금은 나오지 아니하여 친구들이 그만 두자고 하기도 했으나, 내친 걸음이다. 한길만 더 파 보자고 이 용익은 우겼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아닌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이 파다 말고 버린 금패원에서 금줄기를 발견해 냈다.
이 용익은 금줄기 발견과 함께 그 지질과 지세, 토질들을 자세히 살폈다. 금은 쏟아져 나왔다. 이 용익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광부들에게 후히 삯을 주고, 자기 아버지에게도 큰집을 장만하여 잘 살게 하고, 글 가르쳐준 박군수 영감에게도 후히 사례를 하였다.
금패원에 커다란 광업 사무소를 짓고 널리 광부를 모집하여 크게 일을 벌였다. 파는 족족 금이 나왔다. 이 용익은 금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파냈다.
(내가 금을 캐내자는 것은 내가 먹고 입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요, 입신양명해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임금의 총애를 받아야 한다)
그는 많은 금뭉치를 싸서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이 임금이 된지 10년 되던 해(1873년)11월에 최익현이 대원군을 탄핵하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였으나, 이듬해(1974년)5월에는 국고가 말라 꼼짝도 못할 지경인 그런 때가 고종은 이 용익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이 용익의 나이 스물 한 살 때 수십만 금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이 용익은 궁내부에 전국 금광 채굴권을 요구했다. 궁내부에서는 고종의 재가를 얻어 이 용익에게 조선 팔도 금광 채굴권을 주어 버렸다.
이 용익은 금패원 만이 아니라 전국 어디든지 금맥만 있으면 찾아 파낼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파는 곳마다 금은 쏟아졌고 그때마다 금뭉치를 고종께 바쳤다.
국고가 윤택해지자, 고종은 함경 감사 박 기양에게
"이 용익은 비록 서민이나 충성이 남다르니 올려 보내라"
는 전교를 내렸다.
박 감사는 이 용익을 불러 그 뜻을 전했다.
(됐다. 이제는 기회가 왔다)
하며, 이 용익은 상경길에 올랐다. 한성부윤을 통해서 경복궁에 들어가 고종을 배알하고 꿇어 엎드린 즉, 고종은 웃는 낯으로 묻는다.
"네가 이 용익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너의 충성을 기특히 여기노라"
"황공무지하옵나이다"
고종은 만족한 웃음을 띠며 이 용익으로 하여금 민비를 배알하게 했다.
민비도 이미 말을 듣고 있는지라 곧 만났다.
"네가 충성을 다하여 국고를 튼튼히 하니 가상한 일이다"
영광도 이런 영광은 없다. 이 용익은 망지 소조하여, 다만
"황공무지로소이다"
하였지만 진실로 감격하였다.
민비 또한 이 용익의 늠름한 풍채와 당당한 태도에 놀랐다.
(쓸만한 인물이다. 광산은 하고 있지만 천민은 아니다)
별전으로 보내어 사찬까지 내렸다.
궁궐을 물러나온 이 용익은 당시의 대관 현직을 찾아 인사를 했다.
얼마 아니 되어 이 용익은 함경도 남병사를 제수 받았다. 남병사 벼슬을 하면서도 심부들을 시켜 여전히 금을 파내어 국고에 바쳤다.
얼마 아니 가서 이 용익은 함경 감사가 되었다. 함경 도민들은 깐짝 놀랐다. 깜짝 놀란 것은 함경 도민만이 아니지만 특히 함경 도민은 지금까지 박 기양 감사가 백성을 잘 다스렸는데.
"이 용익은 한낱 광부출신으로 돈 모으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니, 백성의 돈을 긁어모을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익 감사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어진 정치를 했다. 그뿐 아니라, 경제정책에 눈이 밝아 함경도가 부자사회가 되었다. 이 용익은 조야의 칭송을 받는 영웅이 되었다.
고종은 이 용익이 재정에 밝아 그 수단이 비상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며, 지금 나라 재정 사정이 말이 아닌 판에 이 용익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지방관으로 있는 것이 아깝게 생각되었다.
마침내 이 용익은 내장원을 맡게 되었다. 내장원은 세전물 장원 그 밖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내장원경이 되어 쓸데는 많고 돈은 달리고 하여 생각다 못해 궁리해 낸 것이 인상 전매제도와 광산국유화 제도다.
그로부터 내장원과 경리원의 창고에 인삼과 사금, 삼베 등으로 가득 차고, 그것을 시세 따라 방매하니 국고 사정이 윤택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정세는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대원군과 민비와의 대립으로 시끄러운데다가 정계가 청국을 의지하려는 사대당과, 일본의 세력을 업으려는 친일당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는 친로당들이 서로 버티어 치고 받고 하는 통에 난마와도 같았다.
청일전쟁이 벌어지게 한 불씨가 사대당과 친일당의 알력이요, 그 뒤 일로 양국간의 사이가 벌어진 것도 친일당과 친로당과의 알력 때문이다.
어느 날, 고종은 이 용익을 불렀다.
"재정이 극도로 곤란한 이 때, 까딱 잘못하다가는 국고가 말라 큰일일 것이요, 일로 양국의 사이가 험악하니 국방을 함부로 할 수 없어 경은 재정과 국방의 재주를 겸비한 터라 짐의 뜻을 잘 받들지어다"하고, 군부 대신과 탁지부 대신을 제수했다. 그리고 전환국 총재까지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