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 기건은 다 쓰러진 헛간 암에 서서 감개가 헤아릴 길 없다 삼간누옥이란 말은 들었어도 이건 삼간도 못 된다. 이건 누옥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누옥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이 거처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이 헛간에서 그분이 일생을 마치다니.)
기전이 "그분" 이라고 한 사람은 다른사람이 아니라 송설헌 권홍을 이르는 말이다.
권홍은 조선시대 태종 때의 명신이다. 그의 딸이 태종의 빈으로 있었고, 그는 영가군이라는 군호까지 받았다. 태종15년(서기 1415년)에 판도령부사(왕실의 친척의 친목을 위한 사무를 처리하던 "돈령부"의 종1품 벼슬)가 되었고, 세종 5년(서기 1423년)에는 영중추부사가되였다. 중추부는 왕명의 출납·병·숙위 등을 맡아보던 관청인데 그 무렵에는 중추원이라고 했다. 그 중추원의 으뜸 벼슬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그만두었는데, 왕실에 소속된 벼슬은 주목을 받게 마련이어서 모함도 많이 받는다. 권홍도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주도까지 밀려와, 삼간도 못되는 헛간 같은 누옥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기건은 지금 그 권홍이 거처하다가 간 헛간 같은 누옥을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기전은 제주목사로 부임해왔건만 마치 작기도 권홍처럼 쫓겨온 비운의 인간처럼 여겨져 어찌 그분에 한한 일이겠는가. 나 또한 그런 신세가 안 된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하고 비감한 마음을 역누르지 못한다.
기전은 기현의 후예다. 기현은 고려 공민왕 때 신돈 일파로 신돈이 그의 집에 기거한 일도 있고 신돈을 반들기를 상전처럼 하다가 신돈이 몰락할 때, 최사원 등과 함께 모진 최후를 마쳤다. 그러니, 그 후손들이 행세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는데. 기건이 천신만고 끝에 명민에서 발탁된 것이 조선 왕조 세종 때에 이르러서다.
사헌부(경치에 관하여 논의하고, 모든 벼슬아치의 비행을 고사하여 그 책임을 물으며, 풍기,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있으면 가러 내어서 풀어 주는 등 부조리를 없애고 서정쇄신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5품 벼슬인 지평을 지냈다. 행주기씨로서는 중흥의 기틀을 잡은 셈이다.
그러한 기건이 귀양길도 아닌, 당당한 목사로서 부임했는데, 하필이면 권홍의 최후를 마친 누옥을 돌아보며 눈물마저 흘리다니.
아마 제구도가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에 유배지처럼 되어 많은 어질고 곧은 이들이 귀양살던 곳이라 그랬는지 혹은 자기 스스로 한탄하는 것처럼 운명적인 예감에서 그랬는지 어쨌든 그는 허무한 인생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예까지 와서 마음 괴로움을 맛볼바에야 차라리 오지나 말것을)
그는 도리어 지금의 지위를 원망하는 심경에 젖는다.
그의 발길은 허무한세상과 통분한 심정을 새기기나 하려는 것처럼 파도소리에 이끌러 바닷가를 향한다.
바다는 모든 사람을 잇게 한다. 뭍의 인간들은 온갖 추잡한 행동들을 하지마는 그런 건 아랑곳없이 바다는 항상 푸르고 너그럽다. 기건의 발걸음이 바닷가를 향하는 것도 자연의 섭리 일는지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잡념이 없는 바다를 바라보는 기건의 마음은 아까 권홍의 유적지를 바라보고 산란했던 것이 적이 가라앉는 것 같다.
(해가 저무는군. 끝없는 서해의 물결 위에 깔린 붉은 햇빛이 찬란도 하다 사람의 마음도 저 같이 밝게 빛났으면 좋으련만)
바다위로 향한 눈길을 거두어 돌아서려는 찰나, 저만큼 검은 바위가 보인다. 그 바위는 바닷물에 씻겨 패었는지 동굴을 이루고 있다. 그 동굴 어귀에 서너 명의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
해질 무렵에 웬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궁금증이 난다. 자연히 그쪽으로 한 발 두 발 다가간다. 그러다가 몸을 구부린다. 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자세로 바위 가까이의 언덕 위에가 숨는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바위 동굴 어귀에 광경이 한눈이 들어온다.
"앗!"
기건의 입에서 놀라는 소리가 뛰어나온다.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가 부리고 있는 제주목 직원들이다. 여러 사람이 어린 한 사람을 족치고 있는 중이다. 비웃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말로 차기도 하며 위협도 한다.
(저런 저 애는 길운이가 아닌가.)
기건은 더욱 놀란다. 길운은 자기가 가까이 부리는 통인(지방관청의 우두머리 가까이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있는 소년이다. 그 소년이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통인 아이는 얌전하고 영리하여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로부터 시기 질투도 당하고 눈치도 보아 오는 터였다(그런다고 저토록 어린것을)
기건은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바다를 바라보고 불의의 세정에 대한 감정이 가라앉는가 했더니, 금방 바로 그 바다와 접한 뭍에서는 또 저런 미운 인간들이 몹쓸 것을 해 보여 주니 답답한 마음을 누를 길 없다. 기건은 야속한 인심이 분했다.
자세히 보니 길운은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팔다리는 묶이어 있다.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뺨을 갈기고 옆구리를 치니 소리도 못 지르고 괴로워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 호통을 쳐서 길운을 구해 내고 싶지만, 꾹 참는다. 생각할수록 분하다. 자기 앞에서는 잘난 체하고 어진체 하며 굽실거리는 직원들이, 돌아서면 저런 무리배 짓을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도대체 길운이를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잠깐 두고 보자.)
그는 슬슬 더 내려가 동굴 가까이 가서 몸을 숨긴다. 보이지는 않지마는 그 대신 말소리가 들린다.
"이놈, 네놈이 우리 일을 사또에게 나쁘게 고해 바쳤지?"
"내가 저번에 사또의 근원이 평민이라고 비웃은 것을 고해 바쳤지?"' 사또의 태도를 보아라. 안색이 좋지 않은 깃은 네놈이 고자질해서 고민한 탓이야.
"그래 참, 사또가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고약해. 이놈이 고자질해서기분이 나쁜 거야."
모두들 한 마디씩 하며 치고 차고 하는 것이다.
(저런 놈들 봤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당장 내닫고싶지만 내친 김이라 더 들어 볼 양으로 참고 기다린다. 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길운을 곯려 주기 위하여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떠들어댄다.
"저 자식이 아마 내가 사또 수청 기생을 건드린 것까지 일러 바쳤을 거구만."
"그뿐이겠는가. 자네가 사또의 돈 훔쳐낸 것도 필시 저놈이"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온다. 길운은 입에 재갈이 물러져 있어 말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한다. 그들은 또 저희끼리 수군수군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 같더니 이런 말을 한다.
"너를 요정을 낼 일이로되 살려줄테니 우리말을 들어라."
"좋게 말할 때 들어야 네 신상에 좋다."
"지금 풀어 줄테니 오늘밤 사또 방의초를 쓰러뜨려 불을 질러라. 그러면 네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그 통에 훔쳐낸 돈도 나눠주마. 하겠느냐 못 하겠느냐."
그러나, 길운은 묶이고 재갈까지 물려 옴싹달싹도 못한다. 물론 말도 못한다.
"옳지 저놈이 할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니 재갈을 풀어 주어야겠다." 하고 그 중한 사람이 재갈물린 것을 풀어주는 모양이다.
"우리도 사또를 태워 죽일 생각은 없다. 불난 통에 살짝 용돈 좀 훔쳐내자는 것뿐이다.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일 아니냐, 그렇게 하자."
거기까지 듣고 있던 기건은 대강 짐작을 했다. 가엾은 길운을 협박해서 한패로 만들어 돈을 훔쳐내자는 짓이다.
(나쁜 놈들.)
기건은 한편 놀라며 한편 분개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길운을 달래고 으른다
"네가 불을 질러도 너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의 한사람이 문초를 받다가 만다. 절대로 네게 죄가 돌아가게는 아니 할테니 우리말을 들어라."
"누가하고 싶어서 이런 짓을 하겠느냐. 사또는 무섭고 배는, 고프고 어떻게 하니? 우리를 살리는 셈치고 그렇게 해 다오."
"어려을 것 없다. 사또가 잠든 틈에 촛불을 쓰러드리고 도망해 나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길운은 아무 대답이 없다. 그들은 초조해진 모양이다. 실패하는 날이면 살아 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놈, 말을 안 들을 테냐."
그제서야 길운은 입을. 연다. 기건은 귀를 기울여 길운의 대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싫다. 나쁜 놈들의 패가되기 싫다 사또님이게 죄를 지으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이 말을 들은 기건은 감격하여 그만 뜨거운 눈물이 주루루 흐른다.
(길운아 고맙다. 이 세상 어딘가 이는 정의가 살아 있어 불의가 망하는 것을 보아야 할 께 아니냐, 길운아 너는 바로 정의의 편이다. 내가 설마 네 힘이 안 되어 주겠느냐.)
소리는 들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슨 짓을 깔는지 모르니 그 광경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기천은 물러나 아까 바라보이던 자리로 올라가서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또 무슨 숙덕공론을 하더니 길운을 물가로 끌고 가 뾰족한 바위에 잡아맨다. 그리고는 히히덕 거리면서 바다 쪽을 손을 가리키며 뭐라고 씨부리고 웃는다. 들리지는 않으나,
"지금은 물이 빠졌지만 오늘밤이 물이 들면 너는 물 속에 잠겨 살수가 없다. 그래도 고집을 부릴테냐. 고기밥이 되기 전에 우리말을 들을테냐." 고 다짐하는 것 같다. 길운이 뭐라고 했는지, 아마
"고기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 말은 못 듣겠다."고 했겠지. 그들은 욕을 퍼붓는지 주먹질을 한다.
(착한 놈.)
기건은 길운이 성인처럼 여겨졌다. 세상이 저런 사람으로 가득차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 직원 중에 나쁜 사람이 많지마는 단 한 사람이라도 저런 거룩한 사람이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민에서 발탁되어 목사가 되어 와서 자기로서는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고 선경을 베풀어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노력했다고 자부도 해왔지만, 다름 아닌 자기 직원들 중에 저런 악한이 있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 한이 없다. 그러나 길운 같은 선량한 아이로 위로를 받아 비어있는 마을 한구석이 꽉 차는 것 같다.
(내 덕이 아직도 부족하다.)
길운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운 것 같다(저 착한 아이를 수장을 하다니.)
악 당들은 비웃음을 남기고 돌아갔다(고약한 놈들.)
이를 악문 기건은 한달음에 바위 동굴 어귀로 쫓아갔다. 길운은 바위에 묶인 채 반쯤 물에 잠겨 있다. 의식을 잃은 것 같다.
"얘야, 길운아 !"
불러도 대답이 없다. 기건은 밧줄을 풀면서 자꾸 길운이를 부른다.
"길운아, 정신 차려라." 그러나 축 늘어진 길운은 대답도 못한다. 기건을 길운을 묶은 밧줄을 다 풀어 등에 업는다.
(오냐, 대가 다 알았다. 길운아 원수를 갚아 주마. 경신 차려라."
길운을 업고 귀청한 기 건은 길운을 소생시키는 한편 그 악당들을 문초하여 처형했다.
그 뒤로도 여전히 기건은 선경을 베풀어 불의를 없애고 밝은 사회를 이룩하는데 힘썼다.
그러자 그 해 가을에는 내직으로 영전했다. 세종22년. 세종대왕은 그의 선청을 높이 평가하여 내직으로 룰러들인 것이다. 내직으로 들어온 기건은 예조 판서, 대사헌 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예조판서는 지금의 문교부장관, 대사헌은 지금의 잠사원장, 중추원사는 중추원의 으뜸 벼슬이다.
그동안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도 잠깐, 단종대왕이 쫓겨나 세종대왕이 등극하는 것을 보니 아무 뜻도 없었다. 그는 단종 때 이미 벼슬을 사퇴하고 나아가지 아니했다.
세종대왕이 그를 내직으로 불러 대사헌까지 시킨 것을 보면 그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세종대왕이 승하한 뒤로는 세상 만사가 귀찮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나이 쉰도 다 못 되어 은퇴해 버리고 말았다.
세종대왕은 아쉬운 김에 기건을 끌어내려고 애를 섰다. 그러나 응하지 않고 있다.
기건은 청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반듯한 집한칸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기건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제주도에 부임했던 그 관청의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서 길운이 아버지를 발전한 것이다.
꿈속에서도 길운이 바닷물에 잠겨 정신을 잃었던 그 때 일이 생각났는지 길운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길운이는 잘 있는가."
그랬더니 길운이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예, 잘 있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마는 유명이 다른지라 어찌 자세한 것이야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기건이 서울로 온 뒤에 길운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알았다.
"그런가, 자네는 산사람이 아니라 영혼이란 말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소인뿐 아니라 여기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이 모두산사람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이 영혼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들 왔는가."
"치하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그러면서 길운이 아버지가 기건에게 땅에 엎드려 절을 하니까 다른 영혼들도 따라 절을 하는 것이었다. 길운이 아버지가 말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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