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은 개성근처 예성강을 중심으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왕융(王降)이 처음으로 이 부근의 호족(豪族)으로서 큰 뜻을 품었다. 소년 왕건은 아버지를 따라 예성강에서 수군에 대한 수련을 많이 하였으며 나이 二十세 되는 때는 벌써 궁예가 강성하여 여기까지 그의 세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아들을 데리고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궁예왕의 충실한 일군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한 번 궁예의 부하가 되자 이제부터는 그 부근을 점령하여 궁예왕의 환심을 사기로 하였다. 우신 장군이란 신분으로 개성근처를 점령하고 정주로 내려가 행군하던 중 여름날이 되어 큰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그 앞에 내가 있어 맑은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살벌한 무부의 마음도 한결 청명한듯 하였다.
언제 나왔는지 개울가에는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것저것 행구더니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모양인지 자기가 쉬고 있는 버드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왕건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앞으로 가까이 오자 처녀에게
『너 어디 사는 처녀이냐』
하고 물었다. 처녀는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이
『바로 이 안말 사는 여자이올시다』하며 동리를 가리켰다.
『누구의 딸이냐』
『안말 장자집 천궁의 딸이올시다』
『이 안에 부자집이 있구나』
『세상사람들이 부자집이라고 합니다』
대답하고 다시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거칠은 장군의 마음은 더욱 무엇인가 필요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바로 천궁의 집으로 찾아갔다. 천궁은 왕전의 씩씩한 모습을 보자 크게 환대하며 왕건의 부하군대까지 환영하여 큰 집을 치어주며 점심을 먹이고 다시 저녁이 되자 풍성한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다.
왕건은 저녁을 잘먹고 홀로 따로 떨어진 방에 앉아있을 때 밤이 이슥한 후에 천궁의 딸이 들어왔다.
『장군의 금침을 퍼려고 왔나이다』
고운 목소리에 왕건의 생각은 정이 드는듯 하였다.
『너무 환대하니 부끄럽다』
『별말씀을』
조금도 수줍어하는 빛이 없이 고은 금침을 펴놓고 나갈려고 한다. 바로 이때 왕건은 재빠르게 처녀의 손을 잡았다.
『나홀로 자라고』
하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안되오이다』
말로는 거절하는 듯하나 과년한 처녀는 억센 남성이 싫치 않은 모양이었다.
오월의 밤은 짧았다. 신정이 흥족치 못한 사이에 동천이 환해오자 처녀는 어느틈에 빠져나갔다.
새벽에 간단한 아침을 마치고 군사를 인솔하며 왕건은 떠났다. 지난 밤의 감미로운 생각이 머리에 젖어 있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서 광주, 청주, 충주 등을 점령하고 29세 되던 해에는 저멀리 금성)을 치러 내려갔다. 이번에는 수군으로 왕건이 그동안 예성강에서 연마한 수완을 보일 때이다.
서해연안을 따라 내려가 견훤의 해외통로를 차단하는 작전이다. 즉시 금성을 공격하며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금성뿐 아니라 그 인근의 십여군을 차지하였다. 왕건은 즉시 궁예에게 승전한 사유를 적어 올리고 다시 점령지대를 순찰하였다.
목포근처에 이르렀을 때 조그마한 항구안에 오색구름이 영롱하게 비치었다.
『신기스러운 구름이 끼었구나』
혼잣말같이 하고 있을 때 구름이 걷워지며 바로 그 구름이 있던 곳에 한 처녀가 무엇인가 만지고 있다. 역시 빨래하는 모양인지 방망이가 번쩍 들리고 있었다. 왕건은 여자의 처소로 가까이갔다.
『무엇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여자는 깜짝 놀라 일어서며
『장군이 이런 곳까지 오시어 황송하오이다』
하고 절하였다. 고운 태도는 왕건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벌써 바닷길만 여러 달 다니다가 이제눈 앞에 아리따운 여성이 나타났으니 왕건은 매우 흡족해하며 자기 진영으로 데리고 갔다.
부끄러워하는 여자를 자기 영문안에 두고 밤이 된 후 장군이 쓰는 방으로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살풍경인 영막안이 환해지며 쓸쓸한 장군의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너 어디 사느냐』
『예 바로 목포항구에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계시냐.』
『예 계시오이다,』
『아버지 이름이 무엇이냐.』
『다린군(多憐君)이라 하옵니다』
『그러냐. 이리 가까이 오너라』
처녀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왕건의 앞으로 다가왔다. 청년 왕건은 그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마당에서 때때로 여자를 다루어 보았으나 이 목포의 여성만큼 잘 어루만져주는 여자는 별로없었다. 비록 수줍은 처녀라 하지만 원활한 수단은 도저히 당할 수 없없다.
그럴수록 왕건의 마음은 봄날의 얼음풀리듯 환연하여 무아의 경까지 이르렀다. 마음부터는 언제나 자기 영내에서 살도록 하였다.
천우(天祐) 2년(905)에 그의 나이 31세가 되었다. 잠시 철원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때부터 궁예의 부하로서 남정북벌의 한가한 날이 없었다. 수년간 쉴새 없이 싸우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가 2년간 진도(珍島)를 중심으로 싸웠으며 남쪽의 수군의 웅자로서 이름을 떨치었다.
왕건이 나이 42세 되던해 5월 그믐께 궁예의 태봉국을 없애고 6월에 송악산아래 송도로 들어와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천수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후원 궁궐안에는 먼저 얻은 천궁의 딸인 신혜왕후가 거처하고 있다. 그러나 왕후는 소생이 없고 다음 목포의 여자는 장화왕후로서 그 몸에서 아들을 낳았다.
천수 2년에 궁궐을 짓고 삼성육상서구사(三省六尙書九寺)제도를 채용하는 등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쪽에 견훤과 신라가 있어 이것을 없애는데 19년간 걸렸다. 먼저 태조 18년에 신라가 들어오고 다음해에 후백제까지 완전히 합쳤다.
왕은 백제에서 승리하고 들어오자 위봉루에 올라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으며 백성들의 치하까지 받았다. 이때 왕의 나이는 60이었다.
그동안 정식 왕후만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왕후등 6명이었고 다시 후궁의 부인만도 14명이나 되어 궁중은 여성들로 꽃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초방의 여성들은 늙어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였다. 천수 26년(943) 왕건 태조의 나이는 이미 67세가 되었다. 4월에 대광 박술회에게 후세에 자손들에게 전하라고 훈요 10조를 남기고 만족한듯이 세상을 떠났다.
농사꾼과 벼슬
왕의 후궁으로 들어가면 언젠가는 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궁녀로 들어가면 왕의 사랑을 받고자 가진 교태를 다 부려본다. 그래도 정식으로 왕을 맞이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김지대는 시골 평산사는 빈농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먹고 살기 어려워 딸을 서울로 올려 보냈다.
『서울가서 벌어먹어야 살 수 있다. 시골서는 살 수 없다.』
『그래도 여자는 궁 근처가서 살아야 먹을 수 있다』
왕궁을 중심으로 몰려드는 사람은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 한 사람만 궁중에 들어가면 이것이 연줄이 되어 그들의 일가친척이나 아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궁성안으로 들어가 임금 한 사람을 바라고 사는 현상이었다. 전체주의적인 나라에서는 한 사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많았다.
김지대의 딸은 순박한 시골처녀이다.
서울에 올라와 남의 집에서 잔심부름이나 해주며 얻어먹고 살았다. 어려운 사람들은 한 식구를 치는게 그만큼 생활의 여유가 생긴다고 하였다. 김지대도 집이 가난하여 내보낸 것이다. 김씨는 남의 집에서 살며 충실하게 일해 주었다. 바로 옆의 집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궁중에 출입하는 나인(內人)이었다. 이 궁녀는 김씨라는 처녀가 믿음직하고 충실하게 남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슬그머니 꾀어내어 궁중 깊숙히 데리고 들어갔다.
중종은 신하들에게 휘둘려도 후궁의 수는 남보다 많았다.
어느날 중종이 후원에서 놀고 있다가 시골처녀인 김씨를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후원에 있는 궁녀들은 모두 서울출신으로서 깔끔하게 차렸다. 이중에 시골처녀가 나타나자 어수룩한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자. 머리는 길게 땋아 치렁치렁 내려 보기 좋았다. 왕은 자꾸 처녀에게 눈이 끌리어 후원 어느 별당으로 불렀다.
김씨 처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더욱 보기 좋았다.
『이리 가까이 앉아라』
이 말에 김씨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어전으로 가까이 와 큰절하였다. 왕은 자기 앞에 나선 수줍어하는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듯 손목을 잡아 끌었다. 시골 처녀인만큼 왕이 하는데로 내버려두었다.
『성례도 치르지 않고』
혼자서 중얼거리었다. 왕은 이말을 듣고 역시 민망하게 여기였다.
『아들이나 많이 낳아라 숙용이나 봉해주마』
이때야 다시 공손한 태도로 나와
『항공하오이다』
하고 곱게 앉았다.
다음부터 김씨의 처소를 하나 정해주고 그 밑에 무수리 몇명을 두어주었다. 어느듯 왕자 하나를 낳았다. 얼마 후에는 정말 숙용을 봉해주었다. 이제는 품위있는 내명부(內命婦)가 되었다. 어느날 왕이 김숙용의 처소에 들어왔다.
그날밤 훈훈한 이불 속에서 속삭이었다. 왕은 이때야 궁금한지 가정의 상황을 물었다.
『숙용의 아버지는 무엇하나』
『시골서 농사짓고 계십니다』
『그럼 고생하겠구나. 무슨 벼슬이라도 한 자리 주어 서울서 살게할까?』
『아니오이다. 아버지는 농사밖에 하실 줄 모르오이다. 어찌 무식한 농부가 벼슬하겠읍니까』
세상에서는 서로 벼슬할려고 패를 지어 싸우고 있지만 순박한 농민인 김숙용의 아버지는 그런 것은 바라지 않고 자기의 일만을 충실히 하는 인물이었다.
왕은 숙용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귀여워 했다. 얼마 후에는 아들을 또 낳았다. 둘째 아들을 덕흥군(德興君)이라 하였다.
후에 덕흥군의 아들이 왕이 되자 그때까지도 김지대는 여전히 살고 있었다. 김숙용은 세상을 떠났어도 김지대는 근력이 전과 같았다. 왕자의 외조부가 아니라 왕의 외증조부가 되었다.
나이 80이 되니 눈이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왕은 외증조부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수달피두루마기를 하사하였다. 가지고 간 사람이 김지대의 솔직한 심정을 알고 있으므로 어명을 거역하기 어려워 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내려가 먼저 늙은 그를 보고
『나라에서 수달피 두루마기를 보낸다고 합니다』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며
『나같은 천인에게 나라의 상감이나 입으시는 수달피옷을 주신다니 될말이요 받지 못하겠소』
하며 고집을 세운다. 가지고 온 사람도할 수 없어 다시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상주하였다.
『너희들이 모르는 말이구나. 늙은이가 안 입겠다고 한 것도 이치가 있다. 이번에는 다시 가지고 가서 개껍질옷이라고 하여라 그러면 받을듯하다』
이 말을 듣고 다시 내려갔다.
『상감마마가 주시는 물건을 받으시오』
『무어 저번에도 거절하였는데 또 가지고 오다니 큰일이군. 너무 왕명을 거역해도 죄가 되고 그렇다고 귀한 물건을 천한 사람이 받을 수도 없구 그저 죽는게 좋겠군』
『아니요 이번에 하사한 물건은 강아지 껍질로 만든 두루마기요. 추운데 입으시라고 하신 것이니. 왕의 뜻을 받으시요』
『강아지 가죽이라면 받겠소』
김지대는 수달피 두루마기를 만지며
『얘 그 털이 매우 부드럽고 따듯하구나. 시골서 먹이는 개는 털까지도 꺼칠한 모양이지. 서울의 상방(尙方)의 개는 종자가 다르구나』
하고 받아 입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적순부위의 관직을 하사하였다. 이때도
『시골사람이 적순부위를 해도 괜찮은가 요넘어 김진사댁 가서 물어보아라』하며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리의 김진사까지 와서
『적순부위는 시골 농사꾼에게만 주는 관직이라오 받아두오』
하여 겨우 받았다.
부원군이 되면 딸의 덕이라고 하여 누구나 궁중에 딸을 넣을려고 야단이다. 그러나 김지대만은 벼슬이나 하사하는 물건까지 받지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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