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구
음차생활을 통하여 사용되었던 차구는 기본적인 것으로서 찻종과 차정, 차건, 찻잔, 차탁, 향로, 약탕관, 차선, 차시, 차반 등의 10종을 이용하였다.<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
차 문화를 발전시켜온 선사와 학자 및 차인
신라시대에는 선덕여왕(631∼647) 시대에 당나라에서 전차와 전단차를 수입하여 와서 달여 마셨으며 경덕왕(AD.765) 시대에는 황룡사의 대종과 석굴암이 창건된 신라문화의 꽃을 피웠던 시대로서 당시 충담 스님이 경주의 남산에 있는 삼화령에 모신 미륵세존에 해마다 중삼중구일(3월 삼짇날과 구월 구일날)에 공차하였다 하며 경덕왕에게도 헌차하였고 또한 충담 스님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통하여 차 문화 발전의 선구자적 공헌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충담을 차승, 또는 시승, 연승이라고도 널리 알려졌던 바 있다.
신라 흥덕왕 3년(AD.828)에는 당시의 회당사(견당사라고도 하였음)였던 김대렴이가 당나라의 인덕전에서 문종황제의 사연에 참석하였을 때 천태산산 차나무 종자를 4말 당시 중국식의 네모난 10되입의 말을 가지고 와서 흥덕왕의 명에 의해 지금의 지리산(당시는 삼신산)에 파종한 것이 처음이었다.
한편 화엄사 사적기에는 연기조사 가 진흥왕대에 지리산에 절을 세우고 화엄사라고 하였고 연기조사도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서 절을 세움과 동시에 차나무 종자를 장죽전에 파종하였더라는 근거로 차는 현재의 지리산 쌍계사 주변이 아니고 화엄사 주변에 심었다는 논란이 있으나 고 효당 최범술씨나 차산 정약용씨의 증언에 의하면 오늘날의 지리산 쌍계사에는 화엄사가 건립되기 이전에 옥천사라는 절(사찰)이 기히 앞서 건립되었기 때문에 전자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최근 AD. 1980년 5월 l0일 차의 날 선포와 더불어 쌍계사 입구에 한국차인회의 주선으로 김대렴 공의 공적을 기린비문을 세운 바도 있다.
또한 신라의 화랑사선의 차구가 동해안지방에서 발견된 바 있었고 경포대에는 화랑이 차를 마시던 석정이 있으며 한송정에도 화랑의 석정이 있어 화랑이 차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이규보가 부산하원효방을 심방하였을 때의 전설가운데 원효와 사복간의 차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진감국사의 비문 중에도 차에 대한 문헌이 나타나있다. 차가 신라에 와서 차라고 발음된 것이 일본의 차 발음과 같은 것은 불승들이 일본으로 차를 가지고 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구주의 세부리야마(척진산)에 처음 심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의 국가제의에서 고대의 습관이 통용되어 차주와 차가 공히 사용되었으나 그 중세서도 차가 더 중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성종원년에는 중신 최승노의 상소문을 보면 고려조에는 차례가 형식화하여 지나치게 사치화 되고 폐단이 심하였으므로 이를 개혁코자 상소문까지 올리게된 사실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경향은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약간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 인종(원년에도 송나라 사절이었던 선화봉사의 고려도경의 기록에 보면 송나라와 같은 호화스런 차구와 사치스런 차례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중엽 이후에는 대체로 차인과 선객이 일치된 차선일체의 시대이었다. 대각국사 고려왕자는 세계 불교문화 사상 최고의 금자탑의 하나인 팔만대장경을 감수완성 시킨 위대한 불교학자로서 차선일치의 경지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오백년간에는 대대로 궁중에서의 관례의식이었던 차례의 제전이 계속되었고 민간에 있어서도 차인이 불절하였었다.
서산대사는 중종 15년∼선조 37년 안주인으로서 속성은 완산 최씨 이름은 여신이라 하였으며 자는 점응 호는 청허당이라하여 묘향산에서 기거하였었다. 지리산 영관대사에 청법하고 임진란시에는 풍신수길이 가침공할 때 팔도 십육종도를 수명하여 제자인 송운영이 비격하고 승병을 순안 법흥사에 거하여 모란봉전에서 적을 격퇴한 바 있었다. 평소에 차선에 힘쓰고 유시하여 만국도성여지의 천가호걸익계일창명월청허 무한송풍운불재라 하여 차 솥에서 끓는 물소리(송풍)가 한결같지 않은 무한성을 고요히 관찰하는 철인이었으며 여말 포은선생은 보국무효노서생 끽차성벽무세정 유재독와풍설야 애청석병송풍성이라 하여 고독 속에서도 차에서 고요한 심정을 달래었었다.
정다산은 영조 38년∼헌종 2년, 나주인 진주목사 재원의 아들로서 자는 약용 당호를 여당이라 하였다. 경세제국지세가 있어 경사를 비롯하여 법제, 농정, 수리, 천문, 역사, 측량, 추험 등 실화에 힘쓰고 의학에 통하였으며 저서가 무려 3백4권이나 있었으며 호를 차산이라 하고 차와 재배와 법제를 연구하였으며 차신계를 조직하여 차인으로서 만년의 유배생활을 유유히 자적하였었다.
초의 장의순은 이대왕시의 사람으로서 무안인 장중학선을 금단에서 배우고 초자와 신상을 잘하였으며 정다산에서 유서와 평부를 배웠으며 교리에 정통하고 선경을 개척하였다. 저서에는 초의 집 2권과 동다송 1권, 차신전 1권의 귀고가 있다. 차에 대하여는 한국의 육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차인으로서 차의 연구와 차 생활을 개척한 분이었다. 차신전에서는 차 생활의 신묘한 행사를 전한 것으로 상 채차, 조차, 변차, 장차, 화후, 탕용, 노눈, 포법, 마잔건, 차위 등의 절목으로 나누어 상세히 논하였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차는 물을 끓여서 간이 맞게 마시는 중정의 도라 하였다. 채주기모 조주기정 수득기진 포득기중 체여신상화 건여영상병 지차이차도주 그리고 중정의 도인 차 생활을 통하여 인간실생활의 중정의 대도를 실천할 것을 고래성현구애차 차여군자성무라고 표현하였으며 차인 생활의 본회라는 것은 법희선열을 양식으로 삼고 묵묵한 대자대비의 행원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고유의 전통 차례
차례는 고래로부터 연중행사로서 행하는 정월원단 추석의 명절제례 또는 관혼상제의 식전에서 행하고 제사를 차례 올린다고 하였다. 또한 봉차의식이 있었는데 봉차의식은 혼인서 정혼이 되면 납폐물로서 차나무의 종자나 차를 봉하여 보내게 되어있었는데 이는 차나무의 특성이 이식하면 잘 죽는 것으로 출가후의 여성이 개가를 하지 않는다는 정절을 맹서하는 뜻에서 행하는 풍속이었으며 혼례가 끝난 후 신부가 시가 댁 사당에서 선령을 배알할 때에는 친정댁에서 마련한 차식과 차과를 제상에 올러 놓고 헌차례식을 올리게 하였다. 이것은 차에는 신, 산, 고, 삽, 감의 오미가 있어 이 오미는 인생의 모든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부는 이 고난을 극복하여 가문을 빛내 여야만 한다는 뜻에서 나온 풍속이었던 것인데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없어졌으나 필자가 본 바에 의하면 일본의 구마모도껭 지방이나 사가껭 지방에서는 지금도 이와 같은 차 결혼식을 올리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의 봉차의식을 일본이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범절이라 함은 신부가 마련한 차식, 차과, 헌차에서 잘되고 못된 것을 평하는 뜻으로서 범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 한국인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교양이 있나 없나를 평하는 말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
이상과 같이 몇 가지의 풍속과 용어 등으로 보아 우리 민족에게는 고유의 전통 차례생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 고려, 조선 왕조를 통하여 선각자는 대부분이 훌륭한 차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차는 문화인의 기호품으로서 그 생활 속에서는 인생과 자연을 묘사한 철리를 내포하고 있었고 이 철리가 항상 어느 사회에서든지 그 사회를 발전시키고 창조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