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제10대 연산주는 부왕 성종의 뒤를 이어 1495년에 임금의 자리에 앉았으나, 포악하여 이름 있는 많은 문신들을 죽였다.
1498년(연산주 4년)에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끼이어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고, 이극돈과 유자광이 연산주에게 고해 바쳤다.
연산주는,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고,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을 선왕을 나쁘게 기록하였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고,
강겸·표연말·홍한·정여창·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귀양을 보내고,
이종준·최부·이원·이주·김굉필·박한구·임희재·강백진·이계맹·강혼 등은 방조죄로 귀양 보내고,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순·김전 등은 태만죄로 파면하였다.
그리하여, 유자광만 득세하고, 사림은 사기를 잃었다.
이 사건은 4대 사화의 첫 사화로서, 사초 문제로 일어났는데 그 해가 무오년 이였으므로 무오사화라고 한다.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1479년(성종 10년)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음해에 사약을 먹고 죽었다. 임사홍이 이 사실을 1504년(연산주 10년)이 연산주에게 일고했다.
연산주는,
후궁 엄·정 두 숙의를 죽이고, 안양군·봉안군도 죽였다.
그 포악한 행위를 꾸짖었다고 조모 인수대비를 병상에서 때려죽었다.
윤씨 복위를 반대한 권달수를 처형하고, 이행을 귀양 보냈다.
윤씨를 폐하고 약을 내린 데 찬성하였던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권주·김굉필·이주 등 10여명을 사형에 처하고,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파·정여창·난효온 등의 관을 파서 시체의 목을 베고,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벌을 주었다.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이 참화는 갑자년에 일어났으므로 잡자사화라고 한다.
연산주는 문신들을 극도로 싫어했고 어문까지 학대하게 되었다.
1474년(성종 5년)에 태어난 이장곤이란 사람은, 자를 희강이라 하고, 호를 금재·학고·우만이라 하였다. 체격 용모가 큼직하고 잘생겨 어려서부터 장군감이라 하였다.
1502년(연산주 8년)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명나라에 거슬러 거제도로 귀양갔는데, 반란을 일으킬까 하여 연산주가 늘 두려워하매 더 죄를 받을까 무서워서 몸을 빼어 도망길에 올랐다.
이 교리에 대한 역사상 정식 기록은 그러하지만, 그에게는 중종 때에 재등용 될 때까지의 젊었을 동안에 다음과 같은 기구한 사연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교리도 문신이므로 연산주의 미움을 받았지만, 그보다도 연산주에게 철천지 한을 품은 일이 있었다.
연산주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썩은 무리들이 환심을 사기 위하여 "이 교리의 처가 비길 데 없는 천하일색이라고 하옵니다……"한데서, 연산주가 이 교리의 처를 불러들이라고 명령하계 되었다.
아무리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피할 도리도 있을 수 있었을 텐데, 말도 못하고 처를 궁중에 들여보낸 자기의 어리석음, 궁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마 속에서 처는 품고 있던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양반의 처로서 부끄럽지 않게 목숨을 청산했다.
그 원수를 갚기 전에는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썩은 무리들에게 천벌이 내리고, 천하가 전과 같이 밝아지기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 남아야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름을 우극이라 고쳐 정체를 숨기고 산과 들을 헤매다가 이른 곳이 전라남도 보성의 어떤 궁벽한 시골이었다.
이 교리는 목이 말랐다.
(어디 물 한 모금 없을까.)
대낮에 무모하게 여염집의 대문을 두드릴 수도 없고, 사람들을 함부로 만날 수도 없다. 바람 소리, 풀의 흔들림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다.
도망길에 오른지 10여일, 갓은 찢어지고, 옷은 뜯어지고, 몸은 때 투성이,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었으나, 이제 어디서 포졸들에게 들킬는지 모른다.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목이 말라죽을 지경이었다. 어디서 물 한 모금만 마셨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여름의 햇볕은 사정없이 내리 쬔다. 할일 없이 피해 다니는 몸, 어디라고 정해 놓고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찌 어찌해서 여기까지 숨어 오기는 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그래서 속이 더 탔다.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어디, 시내라도 흐르는 데가 없을까.)
참다 참다 못한 이 교리는 발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저 멀리 버드나무 밑에서 물을 긴고 있는 시골처녀의 모습이 눈이 띄었다.
(들우물이 있는가 보다. 가 보자.)
힘을 얻은 이 교리는 바쁜 걸음으로 버드나무를 향하여 갔다. 거기에는 생각하던 것보다는 깨끗한 들우물이 있고, 둘러 쌓여 있는 돌에는 이끼가 끼어 푸른빛을 띠고 있었는데, 시골 처녀 한 사람이 동이에 물을 길어 이러는 참이었다.
"아가씨, 나그네입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까요?"
이 장곤은 문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오품 벼슬인 홍문과 교리를 지냈으며, 교리이면 옥당이라는 별칭이 붙고, 뒤에 연산주가 쫓겨나고, 중종 2년(1507년)에 남곤에게 불리어 병조판서를 지내고 우찬성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말하자면 당당한 양반이다.
그럼에도, 정체를 숨기며 쫓겨다니는 신세라 말씨조차 달라져 상것들 앞에서도 존대하는 말을 했다. 이 교리가 사정을 하니, 처녀는 들릴 듯 말듯 한 소리로 대답을 하고,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서 내밀다가 주춤하더니, 휘늘어져 있는 버드나무 가지에서 잎사귀를 한 줌 뜯어서 바가지 물위에 띄워
"자, 드십시오." 하고 다시 내밀었다.
물을 주는데 버드나무 잎을 띄워서 주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목이 어찌나 마른 지 물을 벌떡벌떡 마셨다.
한 바가지의 물을 다 마시고 난 이 교리는 바가지를 돌려주면서 처녀의 얼굴을 건너다 봤다.
나이 열 여덟이나 열 아흡쯤, 두드러지게 예쁜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있는 얼굴 모습이었다. 나그네에게 물을 떠 주면서 일부러 버들잎을 띄운 것은, 단순한 심술쟁이 짓이나 장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고맙소. 덕택에 목마름이 가셨소" 그런데 아가씨! 별스러운 것을 묻는 것 같으나. 아까 아가씨가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운 것은 어인 까닭이오?"
이 교리가 묻는 말에, 처녀가 잠깐 대답을 망설이더니,
"별로 까닭이란 것까지는 없습니다"
뵙기에 대단히 피곤하신 모양이어서…… 그런 때 급하게 물을 잡수시면 체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버들잎을 불어 가면서 천천히 잡수시면 물에 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라고 대답했다.
생각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이런 시골구석의 젊은 처녀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한 일이었다.
"그렇습니까. 친절하게도…… 고맙습니다."
이 교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어떤 집안의 처녀일까? 시골서 살기는 해도 틀림없이 내력 있는 집안의 사람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이 교리는 그 처녀의 혈통과 가문이 궁금했다.
"집은 어딥니까?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처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들어, 마을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한 채의 집을 가리켰다.
"저것이 저희 집입니다. 제 아비는 고리장이로 천한 백성입니다."
당시에는 고리장이라고 하면, 농민보다 더 천대를 받고 있었다. 고리장이는 고리백장이라고도 하여 고리버들로 고리짝이나 키를 만들어 파는 신분으로 농민들과 교제도 못하며, 혼인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고리장이의 딸이란 말을 듣고 이 교리는 더욱 놀랐다. 가문은커녕 낮은 계급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이 아닌가. 그런 집안에서 이런 영리하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나다니. 이 교리는 아무래도 이상하기만 하였다.
이 교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말했다.
"나는 오랜 나그네길에 피곤합니다. 아가씨의 집에서 이삼일 쉬어 가게 해줄 수 없겠소?"
보통사람 같으면 고리장이란 말만 들어도 도망치는 것이 예사다. 그런데 이 나그네는 쉬어 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처녀는
"누추한 집입니다마는 괜찮으시다면"
하고, 이 교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고리장이 부부는, 딸이 데리고 온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사인을 듣고 나서는 서슴지 않고 맞아들었다. 처음부터 신분도 밝히지 않고 그저 서울 사람이 망하여 의지할 데도 없이 되어, 목적 없이 떠도는 뜨내기 나그네라고만 여기게 해 두었다.
아무리 망했다고는 하지만 갓을 쓴 사람으로, 고리장이에게는, 비길 수도 없는, 신분이 다른 양반이다. 고리장이 부부는
"잘 오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언제까지 계셔도 좋습니다."
하며 대환영이었다. 이 교리는 그 집에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신분이 처한 고리장이의 집이 도리어 숨을 곳으로는 알맞기도 했다. 정오품 교리 벼슬을 하던 이 장곤 같은 신분인 사람이 설마 그런 천한 사람의 집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눈치챌 리는 없었다.
지낼수록 이 교리에게는 처녀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차차 알아지는 것 갈았다. 신분이 다른 처지라고 서먹서먹하던 주인도 어려움이 사라지고 끝내는 사양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게끔 되었다.
"어떨까, 그대가 내 사위가 돼 줄 수 없을까."
이 당돌한 의논을 이 교리는 미심쩍으면서도 승낙했다. 한 바가지의 물이 인연이 되어 드디어 이 교리는 고리장이의 사위가 되었다.
그래, 처음에는 천한 신분으로서는 바라 볼 수도 없는 갓장이(갓 쓴 양반)의 사위를 맞았다고 기뻐했던 고리장이도 석달, 반년, 일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이 게으름뱅이 사위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일의 도움은 무엇 하나되는 것 없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이라고는 책 읽는 것과 낮잠 자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쓸모 없는 사내인지 몰랐다. 저 모양이라면 밥 먹여 주기 위해서 사위를 삼은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고리장이 주인은 화가 나서, 이 교리의 밥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딸에게 명령했다. 밥이 절반으로 줄어도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바보 사위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이 교리는 역시 날마다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딸은 달랐다.
(이 사람은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믿고, 설사 부모가 뭐라고 하더라도, 자기는 본심에서 남편을 극진히 섬겼다. 밥이 절반으로 줄어든 다음부터는 자기 밥을 남겨서 몰래 남편의 방에 갖다 주기도 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어느 덧 이 교리가 고리장이의 사위가 된 지 삼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서는 1506년에 연산주가 쫓겨나고 중종이 임금이 되었다.
본래, 연산주는 성종과 그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뒤를 이은 폐비 윤씨와의 사이에서 1476년에 태어난 아들이요, 중종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뒤를 이은 셋째 정현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 1488년에 태어난 진성대군이다.
원본글 : 산림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