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7대 임금 인종때에 큰 내란이 두 번 있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다.
이자겸은 1108년에 고러 16대 예종(인종의 아버지)에게 둘째 딸을 시집 보내어 급사중(문하성 정4품 벼슬)이던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무를 총할하고 간쟁을 맡은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로 뛰어오르고, 익성공신, 동덕추성 좌리공신 소성국개국백에 책봉되었다.
예종 17년(서기 1122년) 3월께부터, 임금은 앓기 시작하여 소생의 가망이 없었다.
예종 비 순덕왕후(이자겸의 둘째딸. 예종이 죽은 뒤 문경 태후)가 낳은 맏아들 해는 14살인데 예종10년에 왕태자로 책립되었으므로 응당 예종의 뒤를 잇게 된다.
이자겸의 기쁨은 예종의 병환과 정비례하여 커갔다.
그해 4월에 임금의 병은 위중하여, 마침내 45세로 승하했다.
예종이 승하하자 왕태자가 14살 밖에 안되므로 왕제들 중에서 왕위를 넘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 자겸은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재빨리 태자를 만들어 즉위하도록 하니, 이가 곧 인종이다.
이자겸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 자겸은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가 되었다. 국권을 마음대로 하게 된 이자겸은 인종 2년(1124년), 7월에 조선국공으로 책봉되고, 8월에는 세째딸을 왕비로 삼았다. 그러니 인종은 자기 어머니의 동생 즉 이모를 아내로 삼은 것이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며 장인도 되는 것이다. 그래도 모자라서 다음해(1125년) 정월에는 또 다시 그의 네째딸을 왕비로 삼았다. 예종은 이모 둘을 아내로 삼을 셈이다.
4월에는 인종이 이자겸의 집에 행차하여 술을 마셨다.
이쯤되니, 이 자겸의 권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왕성해졌다.
연약한 임금 아래 억센 신하가 있으면 평온하지 않는 법.
이자겸에게 미움을 사서 50명이 넘는 신하가 처형당했다면 알 만한 일이며, 귀양가거나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난 사람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신분 유지와 입신 출세를 위하여 이자겸 집에 모여드는 사람이 매일같이, 몇백 명씩이나 되었다. 문전성시란 말이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먹고 남아 썩은 고기가 항상 수만 근씩 버려졌다고 한다.
욕심에는 한이 없는 것, 이자겸은 남의 전답이나 하인이 마음에만 들면, 염치 코치 없이 뺏어 들었다.
그러니, 주위에서 겉으로는 무서워하는 체하면서도 뒤돌아 서서는 혀를 내밀고 욕을 했다.
인종이 차차 나이 들어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 자겸에게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얌체 같은 이자겸은 군병 지휘권까지 손아귀에 넣고 싶어 자기 입으로 인종에게 넌지시 졸랐다.
인종은 그만 정이 뚝 떨어졌다. 인종이 임금이 된지 4년 되는 해 정월에, 이자겸의 행패를 전해 듣고
"외조부만 아니라도.……"
하고 중얼거리었다. 인종도 그 때에는 나이가 18세이니 세상 물정을 대강은 짐작하는 나이다.
인종의 옆에서 이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이 있다. 내시로 있는 김찬과 안보린이다.
김찬이 소곤거린다.
"안공, 상감께서 외조부인 이자겸을 옳게만 보시는 줄 알았더니, 탄식을 하시는 것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는 모양입니다."
"글쎄, 그런가 봅니다. 우리도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야지."
"김공, 입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지만 그자가 참위설을 믿고 있단 말을 들으셨소?"
"참위설이라니?"'
"십팔자가 임금이 된다는……"
"그게 무슨 말이오? "
"아따, `십팔자'를 하나의 글자로 맞추면 `이'가 되지 않소?"
"그렇구료, 그런데?"
"이가가 임금이 된다는 참위설을 이자겸이 믿고 있다는 말이오."
김찬도 알아들었다. 얼굴이 붉어지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 같다.
"아니, 그럴 수가.……"
"그러니까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디라지 않소."
"그 자를 꺾자면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무신들과는 접촉이 없으니.…‥" 김찬이 통분함을 참지 못하고 한탄하니, 안보린이 가만한 소리로 말한다
"김공, 좋은 사람이 있소." "
좋은 사람?"
"추밀원사 지녹연도 우리처럼 이자겸의 행패를 미워하고 있소. 그리고 그 분은 군부와도 잘 통하는 분이오."
추밀원사는 왕명의 출납, 숙위, 군기등에 관한 일을 맡은 추밀원의 종2품 벼슬이다.
지녹연은 성질이 사납고 무인다우나 학문을 즐기지 않았다.
김찬과 안보린이 찾아가서 의논하자 두말 없이 찬동했다.
그들은 입궐하여 인종께 아뢰었다.
"이자겸은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난신입니다.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화근은 싹부터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인종은 속으로는 됐다 짚었지만 함부로 할 일이 아니었다. 김찬을 보내서 믿을 수 있는 공신 이수, 김인존 등의 의견을 물은 즉,
"'안됩니다. 가벼이 움직여서는 도리어 화를 크기 합니다."고 펄쩍 뛰었다.
이 보고를 들은 지녹연은
"이러니까 학자님들과는 일을 할 수가 없단 말이오. 이미 말은 났고, 거사해서 실패하거나 물러앉아 있거나 죽기는 마찬가집니다. 대의를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고 우겼다.
인종은 그제 야
"경들이게 맡기니 잘 알아서 실수 없도록 하오."
하고 승낙했다.
김찬, 안보린, 지녹연 등은 지체없이 상장군 최탁, 오탁대장군 권수, 고석 등을 불러 이 자겸을 물리칠 계략을 꾸몄다.
무신들은
"이자겸을 치려면 그 앞잡이 척 준경 형제를 없애야 하오."
하고 들고나섰다.
척준경, 척춘신 형제는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15대 임금 숙종이 계림공으로 있을 때 그 문중이 드나들다가 종자가 되었는데, 차차 발탁되어 벼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이 자겸에게 붙어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자겸을 치자는 지녹연등의 계략은 무르익어 만반의 준비를 바라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종4년 2월이 무신들은 일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 날, 궁중에는 척준경의 동생 춘신과 척춘경의 아들 순이 있었다. 무신들은 궁중에 들어가는 길로 우선 이 두 사람을 죽여 시체를 궁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서 이자겸과 척준경을 찾아 나섰다.
이 때, 이자겸은 집에 있었다. 궁중에 배치해 둔 심복으로부터 무신들의 변을 알려 왔다. 때마침 척준경도 거기에 와 있었다.
이자겸은 새파랗게 질려서 덜덜 떨기부터 한다. 척준경은 이미 아우와 아들을 잃은 분노가 폭발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죽고 살고는 나중 문제요."
눈에 띄는 장졸 스무남은 명을 이끌고 궁중으로 향한다.
이자겸은 겁에 질려
"이걸 가지고 어디를 간만 말인가. 도망가서 때를 기다리세."
하고 궁둥이를 뺀다.
"도망은 무슨 놈의 도망이오, 어차피 잡혀 죽을 건네, 차라리 싸워 보고나 죽어야지."
좌우를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20명 남짓한 병력은 그냥 궁중으로 말렸다.
궁문에 당도하자 준경은 부하들이게 이렇게 명령했다.
"잘들 들어라. 병력이 적을 때에는, 되도록 많은 것처럼 허장성세를 부려야 한다. 사방에 흩어져서 야단스럽게 함성을 질러라. 그리고 나서 여기저기 물을 지르면 궁안의 군사들은 깜짝 놀라 어찌 할 바를 모를 이다."
척준경의 부하들은 궁밖에서 요란스럽게 함성을 질러댔다.
궁안에서는 지녹연의 지시에 따라 상창군 최탁 등 무신들이 이자겸과 척준경을 찾고 있었다.
궁밖에서 함성을 지르자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자겸의 패거리들이 대군을 휘몰아 궁을 에워싼 모양이구나. 큰일 났다."
궁 밖의 척춘경의 무리들이 30명도 못되는 약세인 줄은 모르고, 싸울 기운을 잃고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게다가, 여기저거서 물길이 솟아올랐다.
"불이다, 궁궐에 불이 붙었다."
최탁의 무리들은 솟아오르는 불길이 넋을 잃었다. 명령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저 저만 살겠다고 흩어져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척준경은 힙이 솟았다.
"불을 질러라. 모조리 태워 버려라." 척준경 스스로도 부하들과 함께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궁안의 건물들은 안 타는 것이 없고 궁녀들은 울부짖어 궁중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혼란을 틈타 척준경의 무리는 용기 백배하여 마음대로 날뛰었다.
최탁이고 오탁이고 권수 등 왕당파 무신들을 차례로 잡아죽이곤, 궁중에 남아있던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한편, 인종은 불길이 내전까지 타오자 조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선 산호정으로 피했다.
이자겸의 위세에 눌러 모두 끽소리도 못하고들 있었으나, 궁궐의 불길을 바라보고 인종의 신변을 염려하여 분통을 터뜨리는 충신도 없지 않았다.
상서, 육부를 통할하는 상서도성의 좌북야.(정2품 벼슬)로 있는 홍관이라는 노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자겸의 무리가 궁궐에 물을 지르고 난리를 일으키는데, 신하로서 내 어찌 가만히 있을수 있는가."
늙고 몸놀림도 자유스럽지 못하니 가족들이 말리건마는 막무가내였다.
집을 나서, 몇 차례나 넘어지면서도 헐레벌떡 궁문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담을 기어올라 내리뛰니 마리 뼈가 부러졌다고도 전한다.
어쨌거나 갖은 고생을 하면서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기어서 인종의 곁에까지 다가갔다.
이 난리통에 궁중은 잿더미가 되고, 타고남은 건물이라고는 보잘 것 없는 산호경, 상춘정, 상화정 따위 정자 몇 개와 제석원의 회당 수십 간뿐이었다고 한다.
이자겸의 아들 의강이 승병300명을 이끌고 와서 척 준경과 합세하였다고 하니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요행히 왕당파에게 이긴 이자겸은 살아 남은 왕당파를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고 싹 쓸어버린 다음, 임금이 궁중이 남아 있으면 또 무슨 개교를 꾸밀는지 알 수 없고, 다행이 궁안이 잿더미로 화하여 거처할 곳도 없기는 핑계로 멀리 떨어진 연경궁으로 "김인근이나 이수의 말을 들을 것을 괜히 옳았다고 한다.
이때 홍관은 늙고 병든 몸이지만 억지로, 인종의 곁을 따랐으나, 워낙 몸이 말을 안들어 부러진 다리로는 더욱 걸을 수가 없었다.
척춘경이 홍관을 보고
"늙은 것이 무엇 때문에 추근거리는가. 하고 목을 베어 버렸다.
연경궁에 갇힌 인종은 어이가 없었다. 자유도 없고, 나라 일도 처절할 수없고, 항상 이 자겸 일당에게 감시를 받게 되었다.
"김인근이나 이 수의 말을 들을 것을, 괜히 지녹연의 말을 듣다가 이꼴이 되었군."
뉘우쳐 본들 소용이 없었다.
일설에는 처음에 인종이 이자겸의 집으로 옮겨졌다고도 한다.
이자겸으로 봐서는 명분상 임금을 잘 모신다고도 할 수 있고, 떨어져 있어 일일이 감시 꾼을 보내서 신경을 쓰느니 보다는 자기 집에 인종을 가두어두는 것이 편했을 것이니 수긍이 간다.
이 북새통이는 희한한 일이 있었다.
김수자라는 사관이 역사책을 짊어지고 산호경·북쪽으로 피신해 땅을 피고 묻어 두었기 때문에 그 역사책만은 타지 않고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인종은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대다가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세상 만사가 귀찮아졌다.
(더 이상 임금자리에서 버티다가는 또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이자겸에게 이 자리를 내 주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실로 엉뚱한 생가까지 하게 되었다. 남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을 임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때 형편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내비쳤다.
이 맡을 들은 이 자겸은 마음속으로는 기뻤지마는 그런다고 "예 고맙습니다"하고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문하성이니 사헌부이니 하는 데서 어떻게 나올는지도 모르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사양하는 체하면서
그런데, 지난번 인종의 거사할 것을 말린 이수가 이 맡을 들었다. 이 수는 중서시랑 명장사중서 문하성의정2품 벼슬)로 있는데, 이자겸과 다른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설령, 상감께서 양위한다고 하시더라도 이 공은 그런 일에 귀 기울이는 분이 아니오."
하고 좌중을 돌아보고 다시 이자겸에게 "그렇지요?"
하고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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