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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인종과 내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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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은 그 공로로 위사공신이란 칭호를 받고, 문하시중(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던 대신으로 정일품)이라는 최고 벼슬에 올랐다.
척준경은 본시 가난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고 무뢰배와 어울러 지내다가 계림공(고려 15대 숙종 임금의 왕자시절)의 종자가 되어 계림공 댁에 드나들었다.
1104년(숙종 9년)에 평장사 임간을 따라 동여진 정벌이 공을 세웠고, 1107민(예종 2년)에는 윤관 장군을 따라. 또 동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서 상서공부의 원외랑(정육품 벼슬)이 되었다가, 인종 초에 이자겸에게 붙어 이부상서(정삼품으로 지급의 내무장관)가 되고, 이어서 중서문하성(서무를 총할하고 간쟁을 맡은 관청)의 참지정사(종이품 벼슬)를 거쳐, 문하사랑 평장사(문하시낭 평장사=정이품 벼슬)로 승진한 무식한 풍운아였다.
무식한 척준경이 문하시중이라는 최고 벼슬이 되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우쭐거렸다. 안하무인 한 태도는 그만 두고라도 임금조차 안중에 없었다.
인종으로 봐서는 인종을 몰아내고 호랑이를 맞아들인 셈이 되었다.
그 무렵, 정언(중서문하성의 간관으로 종육품 벼슬)으로 있는 정지상는 당대의 시인이었는데, 불학 무도한 척준경을 몹시 아니꼽게 생각했다. 꼬장꼬장한 정지상은 척춘경이 대궐을 침범했다고 탄핵했다. 종육품인 정언이 자기보다 까마득히 높은 정이품 문하시랑 평장사를 탄핵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 자신도 척준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다. 정언의 탄핵을 받아들여 1127년에 척준경을 암타도로 귀양보내 버렸다.
1128년에 다시 척준경은 곡주로 옮겨졌고, 빛을 못 본 채 1144년까지 살다가 죽고 말았다.
인종은 척준경의 독니를 뽑아 놓은 다음, 죽은 이자겸 일파가 뺏어 먹은 땅을 도로 본국 인에게 돌려주었다.
이자겸이 죽은 다음에 인종이 서경에 행행한 일이 있는데 그 연유는 이러하다.
서경(평양)에 묘청이라는 중이 있었는데, 그전부터 음양지리설에 정통하다 하여 신망이 높았다.
음양지리설이라는 것은 사람이나 사회가 잘되고 못되고 하는 모든 것이 지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미신이다.
이 미신은 신라 말엽 깨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인데, 도선이 중국에서 전해온 풍수설을 퍼뜨린 것이다.
이 음양지리설이 민중 속에 파고들어 끼친 영향은 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음양지리설을 중히 여겨 항상 말하기를,
"부처의 가호로 고려 건국의 대업을 이룩하였다."하고, 신하들에게
"도선 절은 도선이 산수의 형세를 살펴서 세운 것이다. 함부로 옮기거나 손대거나 하면 화를 미실 것인즉 각별히 명심하라."고 훈계하였다.
태조가 이러하니, 고려 임금들은 대대로 도선을 숭배하여, 8대 현종은 대선사라 일컬었고, 15대 숙종은 왕사라 했고, 인종은 선각국사라고 추앙했다.
도선은 음양지리설을 내세워
'사람의 몸에 병이 들듯이, 산천에도 병이 든다. 그 병을 다스리려면, 마치 사람이 병들었을 때 침을 놓고 뜸질을 하듯, 질을 세우고 탑을 마련하여 언짢은 지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 나라는 본래 산천의 형세가 험악하여, 나라 안이 안정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흩어지고 조정에도 화가 미치기 일쑤다. 이러 모든 재앙을 없애려면 어디까지나 음양지리설을 거스르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고 주장했었다.
나쁜 땅에 묘를 쓰면 폐가 망신하는 화가 온다든지, 반대로 세가 좋은 땅에 모를 쓰면 자손 만대에 영화가 깃들인다든지 한다는 미신은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풍수설이라 하여 우리의 주위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미개한 고려시대에는 그러한 미신이 지금보다는 더 창궐했을 것이다.
묘청이 그 음양지리설을 끌어내어 여러 사람의 숭앙을 한 몸에 지닌 다든지, 나아가서 그 세력을 궁중에까지 뻗쳐 임금까지 쥐고 흔들었다든지 한 일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때 조정의 일관으로 있는 백수한은 서경 출신으로, 직책상 음양설을 신봉할 수밖에 없었지마는 역시 묘청과 친교가 있었다.
묘청은 백수한과 내통하여 인종에게
"한번 서경에 행행하십사." 고 주청하였다.
음양설 신봉자들은 좌향이 어떻고 길흉이 어떻고 귀아프게 떠들어대니 인종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1127년 2월에 성경 행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서경에 간 인종은 다섯달 동안이나 머물렀다.
인종의 서경 행행은 묘청과 백수한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었다.
바로 이태 전에 개성의 궁궐이 이자겸, 척준경 무리들에 의하여 타 버리지 않았는가
기회는 좋았다.
묘청과 백수한은
(왕도에는 여러 가지 재앙이 잇달고 궁궐까지 잿더미로 화했다. 이 기회에 왕실을 꾀어 도움을 서경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그 공로로 우리는 공신이 되고 따라서 자손 만대에까지 영화를 누릴 수 있다.) 고 기뻐 날 뛰었다.
그 계획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어갔다.
신하들 중에 척준경이 몰아 낸 정언, 정지상이 서경 출신임을 기회로 이들은 정지상을 한패로 끌어들었다.
정지상은 그들의 뱃속을 알지 못하고 두 사람의 구변에 넘어간 것이다.
학자요 시인인 정지상은 단순하여 그들의 꾀에 빠졌지만, 역시 공신이 된다는 것을 실어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정지상은 먼저 김안을 찾았다.
김안은 정지상과 배짱이 맞아서 지난해 송나라와 금나라가 싸움을 벌었을 때 송나라를 도와 금나라를 치자고 함께 주장한 일도 있다.
김안도 찬동했다
이런 식으로 홍이, 이중부, 문공인, 임청경 등 신하들이 차례로 한패가 되었다. 그들은
"궁궐이 타 버린 것도 결국은 도읍의 지세가 쇠퇴한 때문이다. 서경은 왕성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게다가 묘청은 성인의 경지에 든 사람으로서 그가 주장하는 데 틀림이 없다. 임금께 상주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도록 해야 한다." 고 입을 모았다.
누구나 음양지리설에 현혹되어 있는 때이므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결같이
"그렇고 말고요."
"옳은 말씀입니다."
고 의견이 맞아 상소문에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언제나 무슨 일에나 반대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중신 중에 김부식과 두어 사람은 말을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반대하는 사람은 빼 놓고 조정의 백과들이 서명하여 인종에게 바쳤다.
김부식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이다. 일찍이 이자겸이 득세하여 천하를 주름잡고 있을 때, 아첨하는 사람이 있어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이공은 임금의 외조부일 뿐 아니라 나라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임금에게 신이라고 할 것이 아니고, 궁궐에서의 자리도 다른 신하들과는 구별하여 임금 가까이에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중신들이
"그거 좋은 의견입니다." 고 찬성하고 나섰다.
그때, 예부 시랑(지금의 문교부 차관 같은 벼슬)으로 있던 김부식이 그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옛날, 한 고조(한나라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방)가 처음 천하를 취하였을 때, 닷새만에 한 번씩 그의 아버지 태공에게 아침 인사를 드렸소. 그런데 태공의 부하 한 사람이 태공에게 말하기를 '하늘에는 해가 하나 뿐이요. 나라에는 임금이 한 분뿐입니다. 태공께서는 아버지이기는 하나 신하요, 황제 는 아들이기는 하나 임금입니다. 신하 된 사람이 임금의 절을 받아서 되겠습니까.' 고 하자, 태공은 깊이 깨닫고 '그 말이 옳다.'고 하고서, 그로부터 고조의 아침 인사를 받지 않았소. 그뿐입니까. 현재의 장인도 그의 딸인 황후에게 신으로서의 예를 지켰소. 위제의 아버지인 연왕은 또 어찌 했습니까. 아들인 임금이게 글을 올릴 때에 반드시 신이라고 쓰지 않았습니까. 그렇거늘 외척으로 조부 된 사람이 신으로서의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인종은 이 자신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자겸이 무어라고 했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하마터면 소신을 죄인을 만들 뻔했습니다. 김부식의 의견이 옳은 줄 아뢰오."
이자겸으로서 마른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속이야 쓰리겠지마는 자기 입으로는 더 할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자겸이 태어난 날을 경축일로 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에도 김부식은 반대했다.
"당나라 현종 때 처음으로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이라 한 일이 있지만, 그 뒤에 단 한 번도 신하의 생일을 경축일로 정한 일은 없소." 결국 그 일도 좋다가 말았다.
이런 식으로 김부식은 어떤 권세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소신껏 자기 주장을 펴 나갔다.
그의 학식과 문장은 그 때의 중국 문헌에도 '고려 제일'이라는 정평이 불을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용기와 침착을 겸비한 무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김부식이 처음부터 묘청 일파의 움직임을 괴이하게 여겼다. 하지만 묘청을 반대하는 사람은 몇 사람 안되고 백수한, 정지상 등 조정 신하들이 거의 묘청 일파에게 동조하고있으므로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하는 한 섣불리 손댈 수가 없다.
반대하는 측은 조용히 일의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고 있는 데에 반해, 찬성하는 측은 뒤질세라 앞다투어, 서경 천도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 상소문에는 '만일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금나라는 물론 인근 36개 나라가 고려에 신하의 예로써 대할 것'이라는 귀절이 실릴 정도였다.
인종도 많은 신하들이 성화같이 재촉하는 바람에 어찌할 수 없어
"그렇다면 좋은 대로하라." 고 허락하고 맡았다.
1128년 8월에 인종은 많은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두 번째로 서경, 행행하였다.
이리고, 묘청과 백수한 무리가 지정한 곳에 궁궐을 짓게 했다. 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백성을 동원하여 이듬해 1129년 2월에 낙성했다. 이 궁궐이 태화궁이다.
태화궁이 낙성하자, 인종은 그 궁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때만 해도 인종은 서경에 별궁을 지어 놓고, 때때로 한번씩 가 보리라는 가벼운 생각이었지, 별로 도읍을 옮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새 궁궐이 생기고 인제 됐다고 좋아하던 묘청 일파에게는 어이가 없었으나, 그런 대로 묘청, 백수한 무리의 말이라면 말을 사슴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고, 흰 것을 검다고 해도 그렇겠다고 할 정도이니, 어떠한 의견이나 거의 들어주었다.
그런지라, 묘청 일파는
"하루 속히 도읍을 옮겨서 재앙을 덮고 복이 깃들이게 하여 무궁 무한한 왕업의 터전을 닦으시도록……." 하고 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약한 인종은 선뜻 도읍을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눈치 챈 묘청 일파는 수법을 바꾸어 또 다시 주장했다.
"하다못해 어의라도 태화궁에 모시고 예를 다하는 것같이 하면, 잠시는 화를 막을 수 있으오리다."
말인즉 고마운 말이다. 충성스러운 태도에 감동도 할 지경이다. 옷 한 벌 보내는 것이 인색할 것도 없다.
인종은 옷 한 벌을 시신에게 들려 태화궁에 보내어 묘청 일파가 하자는 대로하게 했다.
그리고는, 인종은 심심하면 새 궁궐 태화궁으로 행행했다.
묘청 일파는 기회만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도읍을 속히 서경으로 옮기도록 꾀를 썼다.
어느 날, 인종이 서경에 행행해서 대동강에 배를 띄웠는데, 뱃전 언저리에 여러 가지 채색의 기름이 떠올랐다.
묘청 일파는
이거야말로 틀림없이 신룡이 토해 낸 오색의 구름이옵니다. 서경이 왕도로 될 길조이오니 주저하지 마시옵소서." 하고 아뢰었다.
일이 너무 공교로워 맹랑하다고 여긴 신하 하나가 남몰래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동강의 밑바닥에서 속을 드러내고 그 속에 기름을 넣은 떡이 여러 개 나왔다. 떡이 가라앉자 물고기들이 쪼아서 터져 기름이 떠오른 것이다. 물어 보나마나 묘청 일파가 잔꾀를 부린 것이다.
오색 기름의 정체가 탄로 났음에도 아랑곳없이 묘청 일파는 눈 팍 감고 한결같이 궁중에 드나들면서 시치미를 떼였다.
그렁저렁 대여섯 해가 지나도 천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동안, l132년 1월에 태화궁을 수리하고, 그해 8월에는 임원애 등이 묘청 일파를 죽어 없애야 한다고 상소한 일이 있으나, 워낙 묘청 일파가 조정에 가득 차 있으므로 흐지부지 되고, 1133년 2월에는 원자 철을 왕태자로 책봉하고, 그 해 11월에는 또 다시 문공유 등이 묘청을 멀리 하라고 상소했다.
문공유는 일찍이 이자겸 때문에 그의 형 문공차와 함께 쫓겨났다가 복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역시 문공유의 상소도 불발탄으로 끝나고, 1134년 2월에 인종은 또 서경에 행행했다.
그런데 왕가가 마천정에 이르렀을 때, 인종을 호위하던 친종군장 김용의 말이 느닷없이 거칠게 날 뛰어, 김용이 떨어져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대동강을 건너려 할 때 강의 중간에서 별안간 큰바람이 불어 인종이 탄 배가 엎어질 뻔하기도 했다. 겨우겨우 건너서 태화궁으로 가는 도중 회오리바람이 불어 모래먼지 때문에 사람도 말도 나아가지 못했고, 주먹 같은 돌멩이가 날아와 인종을 호위하던 군신이 고역을 치렀다.
바람이 그치자, 이번에는 벼락이 30여 군데에 밀어지는데 그 하나는 태화궁의 건룡전에 떨어졌다.
그밖에도 인종이 서경에 머무르는 동안, 별이 떨어지고 초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가지가지 재난이 잇달았다.
그러니 묘청 일파에 대한 인종의 신임에 금이 아니 갈 수 없었다.
인종이나 묘청 일파의 앞날에 검은 구름이 덮이는 것 같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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