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 주무셔요? 좀 일어나 보셔요"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우는 아내는 만명 부인이다.
만명 부인의 아버지는 24대 진흥왕의 동생 흘종이다.
할아버지는 23대 법흥왕의 동생이요, 할머니는 법흥왕의 딸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숙질간이었다.
"응, 왜 그러오?"
놀라 잠에서 깬 남편은 김 서현이다.
김 수로왕이 세운 가락의 10대(마지막) 구형왕이 재위 42년만인 서기 562년 9월에 신라에 항복하여 그 아들 무력은 신라의 장군이 되었는데, 서현은 이 무력의 아들이다.
"참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영감도 들어 보셔요."
때는 신라 26대 진명왕 16년(서기594년) 3월 경진날이다.
만명 부인이 남편 김 서현 장군의 얼굴을 쳐다 본다.
"이상한 꿈이라니 실은 나도 기막힌 꿈을 꾸는데 부인이 흔들어서 깼소."
김 서현도 꿈을 꾼 모양이다. 김 서현은 신라 명장으로 그 때 진천목으로 있었다.
"영감도 꿈을 꾸셨어요?"
"응, 어디 부인 꿈 이야기를 해 보구려."
만명 부인은 웃음기를 띤다.
"제가 저녁을 먹고 뜰에서 하늘을 쳐다보는데 별안간 하늘에서 별 두 개가 떨어져요. 그래서 그 별 둘을 치마로 싸서 방으로 들어오다가 어찌나 무거운지 그만 잠을 깼어요. 무슨 꿈일까요?"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하는 꿈 이야기를 듣고 난 남편은
"참 좋은 꿈이요. 내 꿈도 그에 못지 않은 꿈이요. 내가 사랑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더니, 별안간 문 밖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나며, 하늘에서 달덩어리 같은 옥동자가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손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청룡검을 들고 구름을 타고 내려와 방으로 들어오더니 내품에 안기지를 않겠소. 그래서 그 동자를 안고 좋아하는 중인데 깨었소.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자식이 없어서 하늘이 자식을 점지해 주시는 태몽인가 보오."한다.
부부는 가슴을 설레며 좋아한다.
아닌게 아니라 만명 부인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만명부인은 뱃속의 아이가 잘자라기를 빌면서 태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태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태기가 있은지 10달이 지나고 15달이 지나도 배는 부른 채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 만명부인과 김서현장군은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혹시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태아에게 무슨 고장이 난 것이 아닌가,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데, 자그마치 20달이나 되었다.
그러니 진평왕 17년(서기 595년)도 다 저물어 간다. 한달만 지나면 아이밴 지 3년 만에 낳게 된다는 말을 듣게 되는 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색채운이 이 집 지붕을 둘러싸고 맡기 좋은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차, 상서로운 기운이 도는 가운데 만명 부인은 옥동자를 분만했다.
그 아이는 용모가 성특하고 등에 칠성 무늬가 박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 김 서현은 싱글벙글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사흘이 지났다.
"부인, 이 아이를 경진날에 좋은 꿈을 꾸고 얻었으니, 이름을 '경진'이라 했으면 좋겠는데 간지로는 이름 짓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그리 할 수는 없고, 경자와 모양이 비슷한 유지와, 신(신...날신·별진)과 음이 같은 신자로 이름을 지어 유신이라고 했으면 좋겠소."
"제가 무엇을 압니까. 좋겠어요. '유신'이라고 부르지요."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짓기로 합의를 보았다.
김 유신! 독자들도 다아는 이름이다. 그렇다, 이 아이가 바로 자라서 삼국을 통일한 김 유신 장군인 것이다.
김 유신 장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잘 아는 바이니 새삼스럽게 여기 소개할 것이 없으나 그가 태어나는 데에 기막힌 사연이 있다고 전한다.
그것을 알아 보기 위하여 김 유신의 소년 시절을 약간 더듬어 보자.
진평왕 23년(서기 601년) 김유신이 7살 되던 해 4월 어느 날, 김 유신은 날마다 해 온 것처럼 그날에도 오륙백 명 아이들을 데리고 계림앞 들에서 고구려 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왕과 왕비를 잡아다가 참살하는 무시무시한 싸움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계림 우거진 그늘밑에 나이 30쯤 되어 보이는 젊은 중이 서서 김유신 소년의 동향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과연 영특하다. 저 아이가 추남의 후신이 아닐까?)
추남은 고구려의 복술가의 이름이다. 김 유신을 그의 후신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을 보면 아마 추남이 죽은 모양이다. 그것은 어인 영문일까.
그건 어쨌든, 길고 긴 4월의 해도 어느덧 산으로 기울고, 싸움 놀이 하던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젊은 중은 어느 객점에서 밤을 세우고 다음날 또 계림앞 들에 가 보니 어제보다도 더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노루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 오다가 아이들에 놀라 계림속으로 달아났다.
김 유신 소년은 그것을 보고 무어라고 호령을 한다.
칠팔백 명이나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산중으로 들어가서 자각 막대기와 칡덩굴을 뜯어 가지고 온다.
그 막대기로 허수아비를 만들고는 아이들의 저고리를 벗겨서 입혀, 칡덩굴로 허수아비들의 허리를 묶여 이어서 계림을 둘러싸게 한다.
한 쪽은 터 놨는네, 거기에 20명 가량의 아이를 엎드려 있게 하고 다른 아이를 100명 가량으로 계림 속에 들어가 노루를 몰아내게 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허수아비 사이사이에서 칡덩굴을 흔들며 함성을 지르게 한다.
그러자, 노루가 계림 속에서 쫓겨, 한 쪽 터진데로 나오니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달려들어 붙잡고 말았다.
김 유신은 아이들에게
"이 노루를 구워서 나누어 먹어라."
고 그 자리에서 영을 내린다.
"마침 어제 우리가 고구려를 치는데 성공하였으니, 그 공으로 한턱 먹는 것이다. "
이러한 광경을 젊은 중이 지켜 보았다.
(저 아이는 틀림없이 추남의 후신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장난을 할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저아이가 밤에는 집에 가고, 낮에는 수백 명의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함부로 할 수 없고 꾀로서 없애야겠다.)
고 다짐 한다.
그 다음부터 날마다 아이들의 뒤를 따라 다니며, 아이들의 시중을 들고 친해지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객점에서 찹쌀을 물에 담가 삭여서 말려 가지고 가루를 만들어 술을 치고 끓는 물에 반죽하여 얄팍하게 한 다음 손가락 한 마디씩만 하게 썰어서 더운 방바닥에 익힌 뒤에 곯는 기름에 튀겨 과자를 만들었다.
객점 주인이
"뭐 하시는 거요? 스님은 별것을 다하시는구료. "
하면 어쩐 일인지 당황한 태도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아이들이 하도 재미있게 놀고 있으니 부처님의 자비로 과자나 먹일까 하고......"
"거들어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하게 해 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과자를 한짐 만들었는데 그중 서너개는 다른 것들보다 컸다.
하루는 그 과자를 아이들이 노는 데로 지고 가서 나누어 주었다.
"얘들아! 과자 먹어라. 너희가 하도 잘 놀기에 우리 절에서 선물하는 거다. 그리고 대장 아이는 이 큰 것을 먹어라. "
젊은 중은 김 유신이게 큰 것을 주고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김 유신은 낯선 중이 날다다 자기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웃음을 뿌리고, 게다가 과자까지 만들어서 나눠 주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얘들아 ! 이 중을 묶어라."
아이들이 우우 달려들어 젊은 중을 결박지었다.
김유신은 젊은 중을 꿇어 앉힌 다음
"너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동정을 살피고 있으니 이상하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중으로서 밥을 빌어먹는 주제에 과자를 만들어서 선심을 쓰니 그 또한 괴이한 일이다. 또, 과자를 똑같이 만들지않고 나한네는 크게 만들어 주었으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말해보라."
하고 아이답지 않게 호령을 한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젊은 중은 대항도 못하고 천연스럽게 말한다.
"대장 앞에 어찌 거짓을 말하겠는가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중이니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이 기특해서 따라 다녔고, 시주받은 쌀로 과자를 만들었으며 대장 아이와 보통 아이와 똑같이 대접하기가 무엇해서 다르게 만든것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 말을 들은 김 유신은 더욱 노기를 띤다.
"네놈의 말이 간사하다."
하고서, 부하아이에게 개 한 마리를 불러 오게 하여 자기에게 준 과자를 던져 주었다.
그 개는 과자를 먹더니 피를 토하며 빙글빙글 돌다가 픽 쓰러진다. 과자속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젊은 중은 새파랗게 질렸다. 지체없이 젊은 중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 중은 누구일까?
그는 고구려 사람으로서, 고구려의 26대 영양왕의 비밀 지령을 받아 가지고 신라에 들어와 삼년 동안 모진 고생을 해가며 돌아다니다가 계림에서 김 유신 소년을 만나 자기의 사명을 이루어 보려고 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잡혀 죽은 자객이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자기를 해치려 하는 것은 알았으나, 그 중이 고구려의 자객인 줄은 몰랐고, 또 어떠한 일로 그렇게 자기를 독살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김 유신은 아무 일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세상은 어지러워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싸워서 편할 날이 없었다.
김 유신이 나이 들면서 세상을 한 번 평정해 볼 큰뜻을 품고, 토함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한 이렛동안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하루는 하얀 노인이 나타나 책 한 권과 갑옷 한 벌과 칼 한 자루를 주면서
"이 책은 병술이 씌어 있는 희귀한 병서고, 이 갑옷은 학살이나 창으로 뚫을 수 없는 백화갑이며,이 칼은 한 번 들어 적을 가리키기만해도 꼼짝 못하는 신통명을 가진 청룡검이니, 잘 배워서 의로운 일에 쓸 것이요. 추호라도 못된 일에 쓰지 말라."
하고서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세 가지 보배를 얻은 김 유신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리고, 석굴에 머무르면서 병서를 공부하고 칼 쓰는 재주를 익혀 15살 되던 해에 화랑이 되었다.
그무렵, 김유신의 친구 하나가 자기 집에 문객으로 와 있는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소개하고 날마다 함께 만나 사귀게 되었다.
그 이상한 사람은 이름을 백석이라 했다. 나이는 30살 가량 되는데, 힘깨나 쓰게 보이는 장정이었다.
백석은 김 유신과 다른 화랑들과도 사귀면서 시사와 병론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김 유신은 마음 속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쳐서 나라를 편안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 일로 골몰하게 되었다.
김 유신의 속셈을 알아차린 백석은 그렇찮아도 기회만 오기를 벼르고 있는터라, 하루는
"국선 서방님, 서방님이 계획하시는 그 큰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만 하고 계시면 일이 됩니까? 저에게 한 꾀가 있으니 물어 보시렵니까 ? "
했다. 국선은 화랑의 별칭이다.
"그거 좋은 말씀 입니다. 노형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꾀를 들어봅시다."
김 유신이 백석의 징체를 몰라 의심은 하면서도 그의 계책을 들어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서방님의 은혜를 입은 몸이라,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하는 중, 요즈음 서방님의 근심을 이루어 어찌 태연히 있겠습니까, 미련한 생각이지만 가만히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한 말씀 드립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실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도 목숨을 걸고 서방님의 뒤를 따를 것이니 걱정을 살피시도록 하십시오"
"은혜는 무슨 은혜요. 나에게 끝까지 지도 편달을 베풀어 주신다니 고마을 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은터이니 우리가 힘을 합하여 그렇게 해 봅시다."
김 유신은 지기나 얻은드시 기뻐하면서 그 날 밤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백석은 고맙게 여기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해 가며 경주서 약20리 가량 걸어 나왔을 때다. 뒤에서 웬 아가씨들 둘이 쫓아오고 있다. 김 유신은 나이도 나이이지마는 마침 적적하기도 하여 자연히 관심이 쏠렸다.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말을 건네고 어울리게 되었다.
어두운 밤길인데도 네 사람은 어두운것 조차 잊고 명랑한 기분으로 길을 걸었다.
이상도 하다. 두 아가씨는 수줍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하는 기색이 없이 오래된 사이나 되는 드시 친숙하게 굴어 언뜻 보면 마치 두 쌍의 부부가 어울리는 것 같기까지 하다.
그러고 가는데, 한참 가다가 또 한 아가씨가 나타난다. 새로 나타난 아가씨와 먼저 온 두 아가씨와는 아는 사이인 것 같다.
김 유신은
(이상한 일이다. 이 밤중에 먼저 나타난 여자는 누구이며, 겁도 없이 또 나타난 한 여자는 누구일까. 서로 아는 사이 같으니 미리부터 우리를 만나려고 짜 놓은 계획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자가 밤나들이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남자들과 어울리다니 괴이하다. 게다가 언제 봤다고 저리도 친절히 거리낌이 없을까. 이상한 일이다.)
하고 의아하여 마지 않는다.
그런데 이아가씨들이 다 잘생겼고 특히 나중에 나타난 아가씨는 기막힌 미인이다. 마침 완삿내(완사천)를 건너게 되었는데, 먼저 나타난 두 아가씨는 백석이 부축하여 건너고, 나중에 나타난 한 아가씨는 김 유신이 부축하게 되었다.
내를 건너서 길을 가다가 나중에 나타난 아가씨가 들고 가던 보따리에서 복숭아를 꺼내 일행에게 나누어 준다.
복숭아를 먹은 김 유신은 묘한 기분이었다. 어디가 간지러운 것 같고 눈앞이 어지러운 것 같고 속이 답답한 것 같고 그보다도 아가씨들이 그리운 것 같고 그 아가씨들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고, 그 중에서도 나중에 나타난 한 아가씨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