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4) 썸네일형 리스트형 옛 이야기(고전) - 인종과 내란(마지막) 묘청의 무리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이유가 '재앙을 피하고 복된 나라를 이룩하자'는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 재앙이 다른데도 아닌 서경에서 일어났으니 어찌 되겠는가, 벼락이 30여 군데나 떨어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괴변이다. 묘청 무리는 우그렁 바가지가 되어 애간장이 녹아나고 얼굴을 들지못할 지경이 되었다. 배알이 꾀어 역한 김 부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인종이 서경에서 돌아오자, 지체하지 않고 상소를 했다. "간신 묘청 일당은 천인이 공노할 흉계를 꾸미고 있사옵니다. 상감께옵서는 더 이상 서경에 납시어서는 아니되온줄로 아뢰오." 인증도 그 말을 인정했다. "경의 말이 옳도다. 다시는 서경 행차가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 이렇게 되니, 묘청 일당은 크게 당.. 옛 이야기(고전) - 인종과 내란(하) 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은 그 공로로 위사공신이란 칭호를 받고, 문하시중(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던 대신으로 정일품)이라는 최고 벼슬에 올랐다. 척준경은 본시 가난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고 무뢰배와 어울러 지내다가 계림공(고려 15대 숙종 임금의 왕자시절)의 종자가 되어 계림공 댁에 드나들었다. 1104년(숙종 9년)에 평장사 임간을 따라 동여진 정벌이 공을 세웠고, 1107민(예종 2년)에는 윤관 장군을 따라. 또 동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서 상서공부의 원외랑(정육품 벼슬)이 되었다가, 인종 초에 이자겸에게 붙어 이부상서(정삼품으로 지급의 내무장관)가 되고, 이어서 중서문하성(서무를 총할하고 간쟁을 맡은 관청)의 참지정사(종이품 벼슬)를 거쳐, 문하사랑 평장사(문하시낭 평장사=정이품 벼슬)로 승진한 무.. 옛 이야기(고전) - 인종과 내란(중) 양위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이수의 말을 듣자. 이 자겸은 억지 춘향으로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상감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신하인 내가 어찌 그런 무엄한 일을 생각인들 할 수 있겠소,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소이다."하고서, 임금 앞에 나아가 "폐하, 당치도 않으신 분부를 거두어 주시고, 정사에 힘쓰시기 바랍니다."고 아뢰었다. 인종이 이 자겸의 집에서 연희궁으로 옮겨진 뒤에도 주위에는 이 자겸의 무리들이 득실거려 자유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배가 맞아서 한패가 되어 임금에게 맞섰던 척 준경과 이 자겸 사이가 조그만 일로 벌어지게 되었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더니 그 짝이었다. 하인들이 싸운 것이다. 어느 날 척 준경의 하인과 이 자겸의 하인이 길에서 만났다. "뻔뻔한 낮을 하고 있.. 옛 이야기(고전) - 인종과 내란(상) 고려 17대 임금 인종때에 큰 내란이 두 번 있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다. 이자겸은 1108년에 고러 16대 예종(인종의 아버지)에게 둘째 딸을 시집 보내어 급사중(문하성 정4품 벼슬)이던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무를 총할하고 간쟁을 맡은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로 뛰어오르고, 익성공신, 동덕추성 좌리공신 소성국개국백에 책봉되었다. 예종 17년(서기 1122년) 3월께부터, 임금은 앓기 시작하여 소생의 가망이 없었다. 예종 비 순덕왕후(이자겸의 둘째딸. 예종이 죽은 뒤 문경 태후)가 낳은 맏아들 해는 14살인데 예종10년에 왕태자로 책립되었으므로 응당 예종의 뒤를 잇게 된다. 이자겸의 기쁨은 예종의 병환과 정비례하여 커갔다. 그해 4월에 임금의 병은 위중하여, 마침내 45세로 승하했다...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