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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인종과 내란(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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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무리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째, 이유가 '재앙을 피하고 복된 나라를 이룩하자'는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 재앙이 다른데도 아닌 서경에서 일어났으니 어찌 되겠는가, 벼락이 30여 군데나 떨어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괴변이다. 묘청 무리는 우그렁 바가지가 되어 애간장이 녹아나고 얼굴을 들지못할 지경이 되었다.
배알이 꾀어 역한 김 부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인종이 서경에서 돌아오자, 지체하지 않고 상소를 했다.
"간신 묘청 일당은 천인이 공노할 흉계를 꾸미고 있사옵니다. 상감께옵서는 더 이상 서경에 납시어서는 아니되온줄로 아뢰오."
인증도 그 말을 인정했다.
"경의 말이 옳도다. 다시는 서경 행차가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
이렇게 되니, 묘청 일당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잠자코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옵니다. 그때 만일 상감께서 서경 행차를 아니 하시고, 개경에 계셨더라면 헤아릴 수 없이 크나큰 화를 입으셨을 것이옵니다. 그 정도의 재앙으로 끝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인줄로 아뢰오."
하고 구차스러운 변명을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와 같이 인종도 묘청이나 백 수한 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묘청 일당은 별의별 꾀를 써서 더 없는 충정을 다하는 양 까불어 댔으나, 인종은 모조리 물리치고 한 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하릴없이 된 형세를 만회해 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써도 안 된다고 판단한 묘청 무리는 인제는 그 본성을 드러냈다.
1135년(인종 13년, 을묘년), 그러니까 서경의 변괴가 있은 다음해 정월에, 그때의 분사제도에 의하여 서경에 주둔하고 있는 시랑(지금의 차관) 조광을 손아귀에 넣은 다음, 서경에 와 있는 개경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가두고, 조광으로 하여금 반란군을 지휘하게 하여 개경파의 통로를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서는 공공연히 서경을 대위국이라하여 반란의 깃발을 쳐들었다.
묘청 무리의 반역이 드러나자, 인종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김 부식을 원수로 삼아 서경으로 보내서 묘청 무리를 치게 했다.
김 부식은 서경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번 반란에는 백 수한, 정 지상, 그리고 김 안이 동조하고 있다. 이놈들이 개격에 머물러 있는 한, 반역의 무리들을 뿌리뽑을 수가 없다."
고 하고서, 그 세 사람을 궁 밖으로 끌어내어 목을 베었다.
김 부식도 천하 문장가이지만, 정 지상도 고려 12인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당대의 시인이다. 그들에게는 그뒤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김 부식에게 즉음을 당한 정 지상은 죽어서도 원한이 풀리지 않아 그 원수를 갚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부식이 시를 지었는데 거기에
양류간록청
도화만점홍
(버들은 천 가지가 푸르고 도화는 만개가 붉다)
이라는 귀절이 있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 지상의 원혼이 김 부식에게 일침을 가했다.
"이 자식아, 그것도 시냐? 네놈이 언제 버들가지와 복숭아 꽃을 세어보았느냐? 버들가지가 천개인지 구백 구십 구개인지 어떻지 아니? 도화가 만 개인지 구천 구백 구개인지 세어 보았느냐? 이 멍텅구리야. 시는 그렇게 짓는 것이 아니다.
양류사사청
도화점점홍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도화는 점점이 붉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거다, 이 바보야."
정 지상의 귀신이 호령하는 바람에 꿈에서 깨어난 김 부식은 그만 무안하여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그것은 후일의 이야기이고, 정 지상등 세 사람을 죽인 김 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황해도 보산까지 갔다가 거기서는 길을 돌려 평주, 관산, 사암을 거쳐 지금의 성천에 까지 진군했다.
부하 장졸들은 불평을 했다.
"싸움은 신속이 첫째입니다. 이렇게 4,5배나 먼 길을 돌아가면, 마치 적에게 싸움 준비를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어찌하여 곧 바로 쳐들어가지 않습디까?"
김 부식은 고개를 가러 저으며,
"그렇지 않다. 싸움도 싸움 나름이다. 신속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적군은 벌써 오래전부터 충분히 싸움준비를 하고 있다. 곧 바로 쳐들어가면 도리어 함정에 빠질 염려가 있다. 그 보다는 멀리 돌아서 적의 배후를 찌르는 것이 훨씬 낫다."
고, 신중한 작전 계획을 알려 준다.
그 근방의 성주들을 규합하여 반란군 토벌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서경에 군사를 보내어 그곳 백성들을 선무하는 한편,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는 노광에게 더이상 길게 끌어서 큰 화를 입지 말고 항복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면서 김 부식은 성천에서 개천, 안주로 돌아 적군의 도망길을 차단하고 다시 서경에 군사를 보냈다.
조광은 형세부득이하여 반란군을 지휘하고는 있으나, 도저히 관군을 쳐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두 번째의 군사가 오자,
(더 이상 관군과 맞서 봤자 승산은 없다.)
고, 항복하고 싶은 생각이 동했다. 그러나, 항복을 하면 김 부식이 자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주저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조정에서 인종이 김 순부를 시켜 조서를 보냈다.
조광은 항복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반란의 당본인인 묘청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서, 서경 분사에 있는,
대부경 윤 첨
소 감 조 창언
대장군 곽 응소
낭 장 서 정
등에게 묘청의 머리를 들려 조정에 보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난적은 소신의 손으로 처형하였사오니, 잠시나마 조정에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는 한편, 조 광은 김 부식에게도 군사를 보내어,
"김 원수의 명을 좇아 묘청의 목을 베어 조정에 보내서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고 간절히 부탁했다.
김부식은 즉석에서 조정에 군사를 띄웠다.
"조광의 군사가 조정에 닿으면 관대하게 대하여 모처럼 항복한 마음을 달래어 다시 딴뜻을 품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 양쪽의 군사가 거의 같은 시각에 조정에 닿았다.
조정에서는 그 때 의론이 분분했다. 김 부식이 곧장 쳐들어가지 않고 빙빙 돌고만 있으면서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 않은 것에 불평을 품고 있는 신하들이 있었던 것이다.
"조 광이 항복한 것은 김 부식의 공로가 아니오, 조정에서 조서를 보냈기 때문에 항복한 것이오. 조정에서 조광의 군사를 어떻게 다루든 김 부식이 아랑곳할 것은 없소. 더구나 김 부식이 무엇이기에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이오?"
그리하여, 김 부식이 일부러 관대히 대해 주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이 보낸 윤 첨등 군사를 잡아들였다.
물론 난적 묘청의 머리는 높이 달아메어졌다.
조광은 항복하기로 결심하기는 했으나, 조정에서 윤첨 등을 놓아 주지 않고 가두는 것을 보고 변심했다.
(그렇다면 항복하나마나다. 어차피 반역의 죄로 죽을 바에야 최후까지 싸우다가 사내답게 죽는 수밖에 없다.)
한층 더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수비를 튼튼히 하며 본격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그 해 정월 27일이다.
조정에서는 당황했다. 다시 조서를 보냈다. 그러나 조 광은 조서를 받을 생각은 않고 군사를 단칼로 베어 버렸다. 김 부식도 군사를 보냈으나, 역시 그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
이 지경이 되고 보니, 김 부식도 더 회유할 생각을 버리고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했다.
거느리는 군졸을 중군, 좌군, 우군, 후군, 전군의 다섯 부대를 나누어 서 경성 주위를 쥐새끼 한마리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에워쌌다.
한편, 조정에서는 수군을 편성하여, 140척의 싸움배에 4,600명의 궁병을 태워, 바다에서 치도록 하고, 이녹천이라는 대장을 시켜 40척이 싸움배로 수군을 돕게 했다.
조광은 본래있던 성 밖에 강 연안에 1,700간 남짓한 성을 새로 쌓고 수륙 양면으로 수비를 튼튼히 했다.
이 녹천이 거느리는 싸움배가 강물이 빠지기 시작했음에도 아랑곳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경성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서경성에서는 10여 척의 작은 배에 장작과 기름을 실어 불을 붙여서 이 녹천의 싸움배 쪽으로 흘려 보내서, 그들이 싸움배에 옮아 붙어 싸움배는 큰 혼란에 빠졌다. 물이 빠진지라 큰 배는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적의 복병이 강기슭에서 일제히 활을 쏘아 대니 견디어 낼 재간이 없었다.
싸움배는 타고, 병졸은 불 피할라 학살 피할라 우왕좌왕하다가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시체가 강을 메우고 흐르는 피가 강을 덮었다.
이 녹천은 시체를 넘어 겨우 도망쳤으나, 적군은 첫 싸움을 통쾌하게 이겨 의기 충천했다. 관군을 깔보게 되고 그세력은 대단했다.
수군이 처참하게 패했는데, 김 부식은 육지에서 무척 애를 태우면서 지구전을 하고 있었다.
원래 서경은 지형이 험난한 곳이다. 게다가 적군의 세력이 사나와서 정면으로 공격해 봤자 서경성을 함락시킬수는 없다. 마음 턱 놓고 적의 세력이 약화하기를 기다리는 전법이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은 그것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마치 김 부식 원수가 무력해서 싸움을 질질 끌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김 부식을 소환하고 다른 대장을 보내야 한다."
고 떠들어 댔다. 시끄러워서 인종도 김 부식을 불러들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 부식은 충성을 기울여 싸움이 길어지는 이유를 설명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소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기필코 난적을 평정하겠나이다. "
그 결의가 굳은 것에 인종도 안심하고,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관군도 잘 싸웠으나 서경성의 적군도 선전했다. 조 광으로서는 어찌 하는 모리가 없는 일이었다. 싸우지 않는다고 살아 남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는가.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데 수만 관군이 1년 이상 걸렸다.
1136년 2월 19일, 드디어 서경성은 함락되었다. 최후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조광의 목을 치기는 하였으나 관군도 여간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김 부식은 더욱 군율을 엄하게하여 성 안의 백성들을 무마하고, 한 사람의 목숨도 함부로 다치지 않게 했다. 굶주린 자에게는 먹이를 주고, 앓는자 상한자는 치료해 주고, 뒤를 깨끗이 정리한 다음 백성들로 하여금 묘청 반란의 꿈에서 깨어 고려 조정에 의지하게 하여놓고, 그 해 4월에 개경으로 개선했다.
이리하여 인종 임금 때 두 번째의 큰 반란을 평정했으나, 조 광의 반란은 일단 항복한 것을 괜히 싸움을 크게 한것은 조정 신하들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항복을 받아 들이지 않은 잘못에서였다.
김 부식은 1142년까지 인종을 섬기고 1143년에는 삼국사기를 지었고, 고려 제18대 왕 의종 5년(1152년)에 7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청의 난은 서경에서 일어났으니까 세칭 서경의 난이라고 하지만, 이 반란은 일개 중에 의해서 일어난 음모에 지나지 않으니 고려라는 역사적 구분에서 보면 좀 다른 해석도 있다.
'고려'라는 나라 이름은 '고구려'를 이어 받았다는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영토가 광대하였다. 그 넓고 넓은 영토가 여진이나 거란 따위 북방 민족에 먹혀 버리고, 고려에 남은 것은 겨우 압록강 이남의 좁은 땅뿐이다.
그런데, 고려 제6대째 임금으로부터 제8대 임금에 이르는 동안, 거란은 그 좁은 고려 땅마저 자기 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수십번 대군을 몰고 쳐들어와 괴롭혔다.
한편으로 태조왕건이래 북방개척에 적쟎은 힘을 기울였으나, 북방계 무인들의 세력 다툼으로 흐지부지 되어 북방에서의 관심이 사라져, 뜻있는 신하들은 걱정들을 했다.
거기에 이 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타 버려서, 도읍을 북쪽 서경으로 옮겨 국력을 배양하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그 중심 인물로 나타난 것이 묘청으로서, 음양지리설을 내세운 것은 한낱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인종이 마음이 약하여 결단력이 없기 때문에 뜻한 바가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어, 왕실을 불신하고 대위국을 스스로 세워서 북방으로 세력을 펴 보려고 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기면 관군이요, 지면 역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흑시 묘청의 생각대로 도읍을 서경으로 옮겼더라면, 모를 일이기는 하지마는 고려는 더욱 더 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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