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시대 성종(9대 임금)초기 서기 1470년 께다.
충청도 청풍 고을에서 괴나리 봇짐을 지고 허술한 차림으로 서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선비.
나이는 30이 넘었을까. 얼굴에는 핏기가 없이 궁한 티가 흐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안 되면 할 수 없지. 더 어째 보는 수도 없고…….)
비장한 각오를 하는 그는 사정이 딱했다. 이름은 김 위. 가난한 선비로 과거를 보려고 공부도 했고, 과거가 있을 때마다 서울을 오르내리기 벌써 다섯 번째. 요즘 말로는 이력이 난 재수생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서 노자마저 여의하지 않다.
노정의 반쯤은 무전 여행(그 시대에는 과객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으례 점심을 굶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말도 탈 형편이 못되어 다리는 아프고, 곁친 낙방에 용기도 없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이왕 떠난 길 주저 않을 수도 없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돌아볼 겨를도 없어 안성에 이르러서는 할 수 없이 과객질을 하게 되었다.
큰길 가까이에서는 되는 일이 야니고, 들어 앉은 마을이라야 하고, 그러고도 사람들을 재워 줄만큼은 살림이 넉넉한 짐을 골라야 한다.
마침, 노인 한 사람이 사랑 마루에 앉아서 담뱃대를 물고 멍하게 앉아 있는 집 하나를 발견했다.
김 위는 힘없이 대문 앞에 가서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쳤으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오너라'소리만 들리고 '이리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도 조용해서인지 집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아이가 나온 것이다.
"누구셔요?"
"나는 서울 가는 나그네다. 과거 보러 가는데, 노자가 떨어져서 하룻밤 묵고 갈까 해서 사정하러 왔으니, 들어가서 그리 여쭈어 보아라."
소년은 말없이 안으로 사라진다. 이윽고 그 아이가 나온다.
"들어오십시오."
김 위는 소년을 따라 들어가서 사랑마루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인사를 한다.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과거를 볼까 하고 서울 가는 길에 하룻밤 신세를 지러 왔읍니다."
"잘 오셨소. 누추하지마는 쉬어 가시오."
노인은 반기는 것 같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다.
"얘야, 저 선비님이 피로하실 테니 아래 사랑으로 가서 편히 쉬시도록 해라."
태도보다는 말은 의외로 친절하다. 김 위는 작은사랑으로 인도되었다.
웃옷을 벗고 앉아 있노라니, 저녁상이 나오는데 음식범절이 뼈대가 있는 집안 같이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잘 먹었다고 주인에게 인사하러 갔으나, 주인은 아무 말이 없이 여전히 멍한 태도다.
더 앉아있을 수도 없어, 물러 나와 작은 사랑에 오자마자 지친 몸을 누이니 단잠이 엄습한다.
얼마나 잤을까. 날은 어두운데 뒤가 마려워 일어나서 사랑 뒤꼇의 뒷간에 가서 앉아 있는데, 저편 안채 쪽에서 무엇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들려 온다.
무슨 소릴까? 그 소리가 또 들리는 것 같아 긴장이 되었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는다.
(이상도 하다. 무슨 소릴까. 돌맹이로 기왓장 같은 것을 두드리는 듯한데 뭘까)
시골 뒷간은 완전한 건물이 아니기에 허술하여 바람과 달빛이 마음대로 드나든다.
김 위는 동정을 살핀다. 그 때 안채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이십 세 전후의 젊은 계집이 자리옷 바람으로 흰 헝겊을 들고 나온다. 그는 상당한 미인이다. 담 밑에 와서 흰 헝겊을 담위 바깥쪽으로 내민다. 그 헝겊이 넘어가자 담 밖에서 웬 총각 여석이 담을 뛰어 넘어온다.
남녀는 와락 껴안고 안채로 들어간다. 총각은 한 다리를 저는 것 같았다. 들어간 뒤로는 조용해졌다.
김 위는 뒷간에 나와 처소로 간다.
(젊은 계집은 누구며 총각은 누굴까?
총각은 새 서방일께 문명한데 계집은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은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더러 물어볼 수도 없고, 언젠가 시간이 나면 그것을 밝혀 볼까 생각했다. 주인이 고맙게 대해 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활기가 없고 시름에 찬 기색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튼날 아침, 떠나면서 인사하는 자리에서
"잘 쉬고 잘 먹고 갑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읍니다. 그런데 노인장께서는 자제 분이 몇 분이나 되시는지요? 이처럼 댁 안이 조용하니 어디들 가셨는지. 무슨 일들을 하고 계신지요?" 하고 인사 겸 물었다.
노인은 여전히 수심에 잠긴 채
"변변한 대접을 못해서 미안합니다. 자식이라고 늦게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성혼까지는 했으나 복이 없어서 인지 요절을 했읍니다." 하고. 한숨을 쉰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
"자식이 죽으니 아내도 그만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아들 따라 가버렸읍니다. 박복한 나는 죽지도 못하고 희망 없는 날을 보내고 있소."하는데, 그의 말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꼭 얼빠진 사람 같다.
"양자를 들이자니. 흉가라고 소문이 나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복들도 달아나 버리고 어린애들과 늙은이뿐 젊은이들은 없소. 식구하고는 나와 홀로된 며느리 하나뿐이오."
노인의 말을 들으니 딱하기도 하다.
"참 가엾으십니다. 아니 들은 것만 못합니다."
"'팔자 소관이지요. 누구를 원망하겠읍니까?"
김 위는 작별을 하고 길을 떠났다.
마음 속에는 어젯밤 그 총각이 마음에 걸린다.
(필시 그 총각이 비밀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리라.)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 저런 생각하면서, 과천 남태령을 넘어 내려오는데, 저 편 숲 속에서 웬 초립동이 하나가 뛰어오더니, 반갑게 말을 건다.
"이제야 오십니까?"
"어? 누구이기에 나를……?"
"그보다도 과거 날이 지났는데……"
"뭐? 과거 날이 지났다고?"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요."
"무슨 소리, 아직 한 이레는 남았을 텐데."
"잘못 아셨네요."
"그럴 리가……."
그렇다면 나무아비타불이다. 과거 날이 지나다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과거를 보고 오는 길인데요. 그래도 못 믿으시겠소?"
초립동이는 거침없이 우긴다. 김 위는 어이가 없어
"그렇다면 과거의 글제가 뭡디까?"하고 재우쳐 묻는다.
"글제는 '락(떨어질락), 조(비칠조)이고, 장원은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만 김 위라는 사람에게 뺏겼소."
"뭐? 김 위"
"예, 김 위라는 사람의 글이 뛰어나더이다."
초립동이는 허리춤에서 종이 쪽지를 내 보이며.
"이거 보십시요. 잘 되었지요?" 한다. 김 위가 그 글을 보니 아닌게 아니라 훌륭한 글이었다. 그만하면 장원을 하고도 남음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글이 하도 좋아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참 잘 되었소. 이만하면 장원 감이오. 그런데, 그 김 위라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누구라…"하고 말하면서 초립동이 쪽으로 눈을 돌리니, 없다! 초립동이는 온데간데가 없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안 보인다. 꿈인가 생신가. 종이 쪽지를 쥔 손을 들어 보니 종이 쪽지도 없다.
도깨비에게 홀린 꼴이 된 김 위는 한편 놀라면서 한편 이상하여, 어쨌든 고갯길을 내려간다.
고개 아래 주막에 들러 주막 주인에게 과거 보러 선비들이 오늘도 올라가더냐고 물으니 까
"그럼은 입쇼, 지금도 묵는 선비들이 계십니다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이된 일인가. 초립동이는 귀신이었단 말인가. 하여간 어제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그도 그 주막에서 자고 다음날 서울에 당도했다. 과거 날은 지난 것이 아니었다.
과거 날이 와서 과장에 들어서니 팔도에서 올라온 선비들이 운집해 있는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그 날 내건 글제는 '낙조'다.
김 위는 서슴없이 초립동이가 보여준 글을 그대로 써 냇다. 결과는 김 위가 장원급제.
꿈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김 위는 벼슬을 살게 되고 내직으로 있다가 외직을 희망하여 안성 군수로 부임했다.
부임한지 며칠이 지나서 붓장수 행색을 하고, 서울 올라올 때 과객질했던 그 마을 서당을 찾았다.
서당에는 여러 아이들이 있는데 접장으로 있는 아이는 나이 들어 스무 살이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다리를 약간 저는 것이었다.
붓을 파는 체하면서 그 접장 아이에게도 말을 건다.
"붓 한 자루 사시오."
"붓은 사고 싶지만 집이 멀어서……"
"집이 멀다니 어딘데?"
"여주요."
여주라. 여주에서 어째서 예까지 공부하러 왔을까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나가고 없으므로 봇짐을 싸 가지고 나온다.
동구 밖 술집 앞에 왔을 때, 절름발이 아이와 술집 아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술집 아이가 절름발이의 흉내를 낸 것이다. 술집 주모가 대들어 아이들은 다 흩어져 버렸는데, 붓장수는
(잘 됐다.)고 생각하여 술집으로 들어간다.
"여보시오."
"예? 저 병신 아이가 우리 아이를 때리잖아요? 내가 뭐 잘못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술 좀 주시오."
"예, 참 나는 누구시라고. 우리 아이를 나무랐는가 하고……호호."
술상을 받고 나서 붓장수는 주모에게 묻는다.
"나는 아무 관계도 없소마는, 그 절름발이 아이가 괘씸하구만."
"예, 아주 못됐어요. 이 고장 아이도 아니어요, 아인지 어른인지 누가 아나요?"
"이 고장 아이가 아니라니? 그리고 아인지 어른인지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흥, 그 속내를 알면 기가 막히지요"
"속내를 알면 기가 막히다니? 속내 좀 들어봅시다. 우리야 떠돌아다니는 붓장수인데 무슨 상관 있나요?"
김 위는 능글능글 술 취한 체 떠돌이 붓장수 행세를 하면서 다가앉는다.
주모는 아차 싶었는지
"그렇지만 그 속을 누가 자세하게 아나요?"하고 시치미를 떼려고 한다.
"술주정뱅이라고 깔보는 거요? 혼자 술 마시면서 심심해서 한번 물어보는데 그럴 거야 없지 않소? 나야 이 자리를 떠나 버리면 내일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신세. 좋소 나 그냥 가겠소. 무시를 당하고 누가 술을 마신단 말이오. 서울이나 가서 붓장사가 잘 되면 누가 이런데 오기나 한답디까? 얼마요?"
일어서는 체하니, 주모는 깜짝 놀라
"어이구머니, 성미도 급하셔라, 앉으셔요. 천천히 잡숫고 가셔요."한다.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술을 마셔요? 친구나 찾아가야지."
순박한 주모는 제가 무슨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안절 부절 못한다.
"따라 놓은 술이나 마시고 갈까. 안마셔도 술값은 내야 할 것이니."하고, 술잔을 비우자 주모는 얼른 그 빈잔에 술을 따른다. 그제야 김 위는 누그러지는 체하며.
"저 절름발이는 여주서 온 아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소."하니, 주모는 도리어 안심이 되는지 맞바라보며 대꾸를 한다.
"아 글쎄 여주서 여기까지 서당 공부하러 온답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구려."
"그래요, 핑계지요."
"핑계?"
"예, 그 녀석이 그러다가는 다리만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큰 코 다칠거여요."
"큰 코 다치다니?"
"손님, 손님만 꼭 아시고 말하지 마셔요. 참 기가 막히답니다. 저쪽 기와집 있지요? 그 기와집 담을 넘다가 다리를 다쳐서 절름발이가 되었답니다. 그 집에 며느리가 있는데, 그 며느리가 시집올 때부터 그 총각이 이 동네에 나타나서, 부잣집 야들이 죽은 뒤에는 담을 뛰어넘어 며느리 방에 들락거린다나 봐요."
여기까지 들은 김 위는 대강 짐작을 했다. 그러고서는 태연한 체하면서
"에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구만. 하여간 잘 먹었소이다. 자 술값 받으시오."하며, 술값을 후히 주고 나왔다.
그날 저녁.
김 위는 그 기와집 둘레를 돌다가 밤이 깊어 총각이 흰 헝겊을 잡고 담을 뛰어 넘는 것을 확인하고 관가로 돌아갔다.
다음날 김 위 군수는 기와집 주인을 불러서 지내온 이야기를 하고, 신세진 일을 감사하고 나서
"노인장 아들이 요절을 했다 했는데, 그 때 이야기를 자세히 말해 보시오"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전전번 과거때 서울 가서 과거를 보고 오다가 낙방이 된 것을 비관하여 여주 강에서 빠져 죽었는데, 시체도 못 찾고 말았읍니다."
"확실히 물에 빠져 죽었읍니까?"
"예, 그랬다기에 그런줄 알고 있읍디다마는……."
"그랬다니 누가 그랬단 말입니까?"
"며늘 아이가……그래서 며늘아이가 불쌍해서 더 묻지도 못하고."
"영감님, 좀 안된 말입니다 마는 한집안만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잡아야하므로 그 사실을 밖혀 드리겠소. 여기 앉아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시오."
김 군수는 당장 절름발이 총각과 과부 며느리를 잡아 오라 호령을 한다.
총각을 형틀에 매어 놓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김 군수가 추상같이 힐문을 하니 총각은 아니라고 펄펄뛴다.
며느리 역시 생사람 잡는다고 야단이다.
김 군수는 사령에게 노인 집 며느리 방에 가서 흰 헝겊을 찾아오라고 명하여 그 헝겊이 나타났다.
김 군수는 다시 호령을 한다.
"내가 직접 너희의 수작을 봤느니라. 이 흰 헝겊을 보고도 아니라고 하느냐!"
그제서야 그들은 잠잠해진다. 며느리를 향하여
"이제는 더 숨기려 해도 소용이 없다. 어서 바른 대로 이실직고 하렷다."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며느리는 흐느끼는 소리로 아뢴다.
"저 총각은 어려서 한 동네에 자랐고 정마저 통하다가 내가 시집오게 되자 잊을 길이 없어 이 근방 누이 집으로 따라 왔사옵니다. 쇈네의 본부는 나이가 어려 사부님께서 나흘 만에 한번씩 닷새 만에 한번씩 쇈네의 방에 들여보내므로 저 총각과 자주 만났사옵니다. 한번은 본부가 과거 보러 가고 없는 사이에 역시 총각을 맞았는데, 낙방이 된 본부가 면목이 없었는지 밤에 아무도 몰래 돌아와 바로 쇈네 방으로 들어오는데, 그 때 방에 있던 저 총각과 샌네는 그만 제 정신을 잃고 본부의 목을 졸라 죽여버렸습니다. 그 시체는 후원에 있는 연못 속에 돌덩이를 매어던졌습니다"
김 군수는 총각더러 묻는다.
"지금 저 계집이 한 말이 사실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사실은 밝혀졌다. 후원 못에서 초립동이 시체도 나왔다.
"왜 하필 절름발이 총각과 정을 통했느냐?"
김 군수의 이 물음에 며느리는 숨길 것 없이 다 털어놓는다.
"본디부터 절름발이가 아니라, 담을 뛰어 넘다가 다친 것이 옵니다."
더 기다릴 것 없이 김 위 군수는 그 연놈을 처형하여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그 뒤 꿈에 초립동이가 나타나 김 군수에게 원수를 갚아주어 고맙다고 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립동이가 총각 손에 죽은 부자영감 아들의 혼백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