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외아들로 자라면서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홍 판서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이경조는 경기도 광주에서 과거가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나라에서는 알성과를 보이게 되었다. 알성과라는 것은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년)부터 시행돼 온 과거제도인데, 임금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에서 보이던 것이다. 경조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과거에 응했고, 결과는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금은 경조의 재주가 매우 뛰어난 것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삼남 암행어사를 명했다.
경조는 여느 어사들과 마찬가지로 찌그러진 갓에 헤어진 옷을 입고 마패를 감추어 거지 행세로 길을 떠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돌며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게 되었다.
날씨는 더워 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어느 날, 경상도 합천 땅에 이르러 하도 더워서 어떤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 느티나무 아래에는 농군들이 누워서 잠들기도 하고. 고누도 두고, 장기도 두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때 그 앞을 어떤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고 있다.
“저 처녀 좀 봐.”
지나가는 처녀를 뚫어져라 하고 쳐다보며 넋을 잃고 있는 사람은 장기를 두고 있던 떠꺼머리 총각이다.
“장기는 안 두고, 뭘 그래.”
함께 장기를 두던 젊은이도 눈길을 장기판에서 총각의 눈길을 따라 처녀 쪽으로 돌린다.
“최 서방네 딸 아닌가, 왜 탐이 나나?”
“탐스러운데……”
장기 같은 것은 잊어버렸다는 듯이 총각은 처녀가 안보일 때까지 바라본다.
“이 자식아 장기나 두어 그 처녀가 네놈에게 어울리기나 하나? 못 오를 나무 쳐다보지도 마.”
젊은이가 재우치는 바람에 총각은 제정신이 돌아오는지,
“응? 그래…….”
하며, 우물우물 장기 말을 집는다.
이 광경을 무심히 보고 있던 어사(경조)는 그럭저럭 날이 저물어 마을로 들어가 어떤 집에 들어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이 최씨라 한다.
(최씨라? 혹시 낮에 느티나무 아래에서 들은 처녀의 집일까?)
속으로 잠깐 그렇게 생각했고,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주인 최 서방은 서울에서 왔다는 거지꼴의 손님이 초라하기는 하나, 그래도 내 집에 온 손님이라 융숭하게 대접했다. 없이 사는 터라 충분하지는 못하나 돈을 꾸어다가 고기도 사 오고, 쌀도 꾸어다가 흰밥도 지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주인과 마주앉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주인이
“심심하실테니 약주라도 한잔 드셔야겠군.”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일어난다. 어사는 괜찮다고 말렸지만, 경상도 고집인지 부득부득 최 서방이 안으로 들어간다.
맘은 상당히 깊어 있었다.
최 서방이 직접 술을 받으러 나가는 모양이다. 최 서방이 나간 지 얼마 안되어 안에서 심상하지 않은 사람소리가 난다. 고요한 밤에 조용하던 안채에서 사람 소리가 나므로 자연히 신경이 날카로와 진다.
(무슨 소릴까?)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깁을 찢는 듯하다고들 비유하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더니, 묵직한 발짝 소리가 쿵쿵 울리고 그 된소리가 사라지자 집안이 다시 조용해진다.
(무슨 일일까?)
무료한 판이라, 어사는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안방의 문이 열린 채 처녀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광경이 눈에 띤다.
“저런!”
어사는 얼른 안방으로 달려들어가 처녀의 목에서 칼을 뺐다. 그러나 처녀는 이미 숨진 뒤다. 피가 방안에 흥건히 괴어 있다.
이 어사는 칼을 빼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
그 때, 주인 최 서방이 돌아왔다.
“아가, 술상 좀 보아라.”
하며, 술병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술병을 동댕이친 최 서방은 처녀를 안아 일으키려 했으나 이미 차디찬 시체다.
“어이구, 내 딸, 이 피, 내 딸이 죽다니…….”
고개를 돌린 최 서방은 서울서 온 거지 꼴 손님을 쳐다보더니, 그의 손에 칼이 들린 것을 보고 그만 눈이 뒤집혔다.
“이놈! 네가 내 딸을 죽여? 이놈, 짐승 같은 놈. 내 딸을 죽이다니…….”
분을 참지 못한 최 서방은 거지꼴인 손님에게 달려들어 치고 받고 야단친다
이 어사는 어이가 없었다. 할 말이 없다.
“여보시오, 주인. 진정하시고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최 서방은 거지 손님의 말이 들릴 리가 없다.
“이놈아! 뭣이 어째? 이놈아, 어이구, 내 딸을 죽여? 이 때려죽일 놈아. 서울서 왔다고 없는 돈에 고기반찬 해 주고 술까지 받아 주려고 했는데, 내 딸을 죽여? 전생에 뭐 원수를 졌기에 내 딸을 죽였단 말이냐. 이놈, 옳지 겁탈하려다가 말을 안 들으니까 죽였구나. 개돼지만도 못한 인두겁을 쓴 놈아, 이놈아.”
악을 쓰며 함부로 쥐어박는다.
“조금만 참고 내 말 좀 들으시오.”
이 어사는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최 서방은 기회를 안 주고 서울서 온 거지 손님을 반죽음을 만든다.
이 어사는 더는 말도 못하고 매만 맞는 채 내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최 서방이 기가 차고 원통하여 더욱 사나워지며 소리지르는 바람에 이웃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거지꼴 손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맞고만 있고, 최 서방은 소리소리 지르며 몸부림을 치니, 마을 사람들이 영락없이 거지꼴 서울손님이 최 서방 딸을 죽인 줄로만 알고, 모두 달려들어 인절미를 빚으려는지 반죽을 만든다.
그들도 지쳤는지 결박을 짓고, 그 중 나이든 한 사람이
“이 놈을 더 이상 때리면 죽게 될 것이니, 그리되면 우리도 살인죄를 짓게 되니까 이대로 살려 두었다가 내일 아침 일찍 관가로 넘겨 원수를 갚도록 합시다.”
한다.
“그리 합시다.”
모두들 찬성한다.
이 어사는 다음날 일찍 꽁꽁 묶인 채 관가에 넘겨졌다.
원님은 형구를 차리고
“이놈, 네 죄를 이실직고하렷다.”
하고 호령이 추상같다.
이 어사는 가만히 생각한다.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구나. 그러나, 이 이상 더 매를 맞으면 참말로 죽고 말 것이니, 그러면 끝장이 아닌가. 우선 살아 놓고 보자.)
“잠깐, 내 몸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중대한 물건이 있으니, 맨 것은 풀어주시오.”
하며, 엄숙한 표정을 짓는다.
원님도 그 위엄에 눌리며, ‘함부로 할 수 없는 중대한 물건’이 궁금하기도 하여 사령에게 죄인의 맨 것을 풀어 주게 하였다.
이 어사는 너무 두들겨 맞아서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놀려 마패를 꺼내 놓는다.
그것을 본 원님은 깜짝 놀라,
“아니, 그건 마패가 아니오?”
하며, 뛰어 내려온다. 이 어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봉명 어사란 말이오? 몰라보고 ms 죄를 지었소이다. 어서 오르십시오.”
대청으로 올라가라는 원님에게 이 어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니오, 내가 비록 봉명 어사이기는 하나 지금은 살인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이오. 나를 치최할 수 없을 터이니, 이 마패를 봉해서 조정에 바치고 나도 압송하시오.”
하니. 원님도 도리가 없었다. 암행 어사를 치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놓아 줄 수도 없다. 그래서 그 말대로 했다.
어사 이경조가 압송되어 오고, 합천군수의 상주 문이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임금도 그 사유를 듣고
“재주가 아까워서 특명을 내렸거늘,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면서 이경조를 형조에 내려 심문하게 했다.
그 때의 형조 판서는 한때 이경조가 공부하기 위하여 기숙했던 관계로 잘 아는 홍 판서다. 이경조를 넘겨받은 홍 영의 형조 판서는 인성의 헤아릴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양가집 처녀를 겁탈하려다가 말을 안 듣는다고 칼로 찔러 죽이다니……. 그럴 수가 있나. 믿을 수 없는 일이로다. 왕명이니 기피 할 수도 없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저러나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 이경조를 불러 들여 심문할 수밖에 없다.
이경조는 그 사건의 전후 사실을 아는 대로 직고했으나 진범이 누군지 모르는지라 혐의는 풀리지 않는다.
홍 판서는 사정은 사정이고 국법은 엄한지라 이경조를 하옥시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럴 사람이 아니지마는 그럼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꼼짝없이 이경조가 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살인자는 사’라 이경조를 죽여야 한다.
홍 판서는 입맛이 없다. 어떻게 그 착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이 딱한 아버지의 얼굴을 아까부터 바라보고 있던 외딸 영란이 눈치를 챘다. 아버지가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다.
“아버님, 무슨 근심거리가 있으신 지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때, 참 네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만 너무 엄청난 일이라, 미처 말은 못했다. 너도 아는 경조라는 사람이 살인을 했구나.”
영란도 눈이 동그래진다.
“장원 급제하고 암행 어사로 나간 사람이 살인을 해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태도다.
“그렇다. 어사로 다니다가 처녀를 죽였단다.”
홍 판서는 딸에게 그 사실을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럴리가……. 본인이 죽였다고 자백했어요?”
“안 죽였다고 하지마는. 죽였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럴리가 없다니……, 네가 무엇을 안다고…….”
“아버님, 제 종아리를 보십시오.”
영란은 일어서서 종아리를 걷어올린다.
“얘야, 종아리가 왜 그러느냐?”
딸의 종아리에 길쭉길쭉한 멍이 나있다. 회초리 자국이다.
“아버님, 이것이 그럴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뭐? 그것이 증거라?”
“예, 아버님.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란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가을.
홍 판서 집 아랫 사랑에서는 경조의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밤은 깊었는데 달은 밝고 영란 소저는 잠이 안 와, 창문을 열고 달을 바라보다가 그만 달에 끌려 밖으로 나왔다. 집안식구들은 다 잠이 들었는데, 오직 경조와 정란만은 잠기 안 든 것이다.
영란은 뜰을 거닐다가 아랫사랑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그는 경조가 혼자 글을 읽고 있는 방문 앞에 서서 한참 망설이다가 문고리를 잡고 또 한참 있다가 드디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글을 읽고 있던 경조는 아무 소리 없이 쑥 들어온 아리다운 소저를 보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축귀문을 왼다. 귀신을 쫓는 글이다.
“귀신이 아니올시다.”
“귀신이 아니라니. 이 밤중에 귀신이 아니고서는…….”
“저는 이 집 딸이올시다.”
“이 댁 소저가 웬일이 십니까?”
영란은 고개를 숙이고, 경조는 당황해 한다. 영란은 아무 말이 없다. 항설에 처녀의 침묵은 복종이고 부인의 침묵은 불복이라고 한다. 알만한 일이다.
“소저는 재상 가의 귀하신 몸. 이 몸은 시골 서생. 될 일이 아니오이다.”
집념에 사로잡힌 아녀자는 생각 밖의 힘을 가진다.
“도리는 아닌 줄 아오나, 사모하옵는 마음 간절하와 저도 모르게 이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허물은 다 있는 법.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사오니 회개하시기를…….”
그러나, 영란 소저는 돌아갈 기색이 없다.
“남의 눈에 띄면 신상에 해로우니 돌아가 주십시오.”
경조의 말은 엄숙하다.
“………”
그래도 영란은 요지부동이다.
“소저께서는 옛 성현의 글을 읽으셨을 줄 압니다. 실행을 했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리다.”
경조는 말하고 나서 회초리를 꺼낸다. 영란은 도리가 없다. 종아리를 걷어올린다. 경조는 그 하얀 종아리에 매질을 했다. 백옥 같은 종아리에서 피가 흐른다. 경조가 회초리를 방바닥에 놓자 아픔을 참고 견디던 영란은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밤새도록 울었다.
영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아버님, 이런 사람이 어찌 겁탈하려할 것이며, 살인을 하겠습니까?”
“네 말 대로다. 그는 강직한 재사다. 나도 그래서 선뜻 벌을 주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이 아니냐.”
“아버님,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요? 상감께 아뢰어 그로 하여금 어사 직무를 수행하게 하여 그 범인을 잡아오도록…….”
“묘한 생각이다. 네 말대로 하리라.”
홍 판서의 진언을 옳게 여긴 임금이 경조를 다시 어사로 임명하여 진범을 잡아오도록 했다.
어사 경조는 다시 합천으로 내려가, 역졸들을 풀어 그 마을에서 살다가 떠난 사람이나 다니러간 사람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게 했다.
염탐 갔던 역졸 하나가 그 마을에서 머슴 살다가 떠난 총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 왔다.
“그놈이다.”
총각이라는 말에 저번에 올 때 느티나무 아래서 쉬면서 본 장기 두던 떠꺼머리 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역졸들을 모아 놓고 그 총각의 생김새를 알려 주고 찾아내게 한바, 며칠 안 가서 그 총각은 붙들려 왔다.
어사 이경조는 합천 원에게 그 총각의 처형을 명하고 상경하여 임금께 고하고 홍 판서를 찾아가 재생의 은혜를 감사했다.
“모든 것이 대감의 산해 같은 은덕이올시다.”
“감사할 곳은 따로 있으니. 내가 아니네.”
“예? 무슨 말씀이신지……. ”
홍 판서는 그 내력을 죽 이야기하고 나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맘을 덧붙인다.
“미거 하네마는 자네만 괜찮다면 내 딸의 소원을 풀어 줄까 하네.”
다 아는 이야기다. 청혼을 하는 것이다.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경조와 영란은 이제는 거리낌없는 처지다.
다음해 화창한 봄날을 가리어 그들의 혼인 예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