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찌는 삼복 더워도 한풀 꺾인 듯 싶은 9월의 일이다.
"생선사려 생선이요."
초라한 무명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목이 휘어질 정도의 생선 괴짝을 인 복스럽게 생긴 처녀의 외치는 소리다.
"에구 저 불쌍한 것"
우물에서 빨래를 하는 동네 아낙네가 중얼거리다가 일어섰다.
"이봐 처녀 생선 한 마리만 줘."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처녀의 이름은 길순이라고 했다. 늙은 부모와 어린 동생 네 식구만의 생활이지만 그럭저럭 오손도손 살아 온 길순네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중병으로 누워 버리면서 우리 동네 부자 집에 가서 양곡을 꾸어다 먹게 되었던 것이다.
몃 마지기 남의 논을 부쳐먹고 살아오던 길순네 집은 아버지가 덜컥하니 누워버리자 농사를 때마춰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자 논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 논을 몰리고 말았다.
병자의 약값은 고사하고 먹고 살 길이 막혀 버리니 양곡을 안 꾸워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아무리 약을 써도 아버지의 병환은 영 차도가 없었다.
그럭저럭 4-5년간 양곡을 꾸워다 먹은게 이천량으로 불어나 있었다. 길순이 이젠 한창 처녀인 열일곱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남에게 꾸워다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한 길순이는 생선장수행상을 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선장수를 한다해서 그 많은 빚을 갚을 길이 터인 것은 아니다.
이런 내막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길순이의 처지를 동정하여 생선을 한 두마리씩 사 주기는 했지만 파는 길순이나 사 주는 사람쪽이나 답답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가엾어라 늙은 아버지 병구환 하느라고 이천량 빚을 지고 저러구 살다니 쯧쯧."
이렇게들 가엾어하고 동정했다.
이럴지음 길순네 고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젊은이가 한 사람 있었다. 이 젊은이는 세상이 다 아는 부랑자였다. 집시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사시사철 떠돌이 신세로 사는 방랑하는 사나이였다.
아무 곳이나 들어 누우면 자기 집 안방이고 아무 주막에나 유하고, 걸핏하면 주막집 안주인을 겁탈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얼굴 하나는 미끈하고 허우대가 훤칠한데가 기운이 장사라 아무나 함부로 매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쨌깼든 이 부랑자는 그렇게 살면서 오늘은 발걸음을 길순네 동네로 옮기고 있었다.
한참을 오던 그자는 주막이 있는 거리에 당도하자 갑작이 시장기를 느꼈던지 부시럭거리면서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엽전 열 잎이 잡혔다. 그게 총재산인 모양이다.
"젠장 열잎 밖에 없구만."
중얼거리면서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막걸리 오푼어치를 시켜 놓고 보니 더이상 시켜 먹었다간 나중에 고생께나 하게 되었던 모양인지
"에라 오푼은 쓰지 말고 아껴 두어야겠다. 정 시장하면 주모에게 적당히 둘러쳐서 오푼어치 외상을 더 먹어야지."
하고 꿍꿍이를 해보기까지 하는 그자였다.
그런데 이때 풍신좋은 백발 노인이 주막 안으로 들어서며
"어어 시장하다."
하면서 두리번거리머 주막 안을 훑어보는 듯 하더니 부랑자가 앉아 있는 옆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부랑자에게 거침없이 말을 건낸다.
"여보게 젊은이 나 술 한잔 사 주구려! 뱃속에 든 것이 없고 가진 돈도 없구먼! "
"허허 노인장께서 어찌 그리 농담을 잘 하셔! 마침 나도 가진 게 없으니 안되었읍니다."
부랑자는 기막힌 사람 다 보겠마는 듯이 그렇게 말 한즉
"아니 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자네 방금 오푼어치 술을 사 먹고 주머니 안에 아직도 오푼이 남아 있을텐테 너무 이 늙은이 괄세마오."
하며 어서 술을 사내라는 것이다. 야라 이 영감텡이 봐라 부랑자는 속이 뜨끔하였다.
"'예 사실 그 오푼은 이따가 저녁 사먹으려고 남겨 둔 겁니다."
"나중 7일은 나중 일이고 어서 술이나 사 주구려 ! 젊은이가 보기 보담 인색하구먼!"
영감이 넉살좋게 이렇게 말하니 부랑자는 기가 막혔지만 대접을 안 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오푼어치 술을 빼앗아 멱은 노인은 한참을 신나게 마시더니 어지간이 기별이 왔는지
"어 이제 그만하면 살겠다오"
하더니 "젊은이는 어디까지 가는고 남쪽으로 가는 길이면 같이 가세" 하며 일어서서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가는지라 이 부랑자도 마침 그 방향으로 가는터이라. 말없이 노인 뒤를 따라 갔다.
"젊은이의 저녁 값으로 내가 7을 얻어 먹었으니 저녁은 내가 삼세."
늙은이는 얼마쯤 걷다가 이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든 시키는 대로만 하오"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소릴했다.
어느 마을로 들어섰을 때였다. 저녁을 짓는 연기가 이집 저집에서 뭉게뭉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늙은이는 느닷없이 그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같은 큰 대문집 앞에 다가서면서
"이리 오너라" 대문을 향해 두어번 소릴 치자 대문이 열리면서 하인인 듯 한 자가 고개를 내민다.
"지나가던 과객인데 하루 밤 유하고자 하니 안에 가서 여쭈어 주오." 하인은 난처한 듯
"글쎄 평상시는 되겠지만 오늘은 좀 곤란합니다. 어떻든 기다려 보십시요."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얼마 있다가 주인인 듯 풍체 좋은 오십객이 나타났다.
"모처럼 오신 손님에게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읍니다. 별안간 집안에서 우환이 생기는 바람이 부득이 손님을 모실 수 없게 되었아오니 양해해 주십시요."
하면서 주인은 엽전 한냥을 내 놓으며 다른데 가보라고 했다.
노인은 주인이 주는 돈을 받아 부랑자에게 넌즈시 주면서 주인을 향해 그거 안되었읍니다.
"내가 약간 맥을 짚을 줄 아는데 한번 봐 드리면 어떨까요"
하고 말하니 주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글쎄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죽은 사람의 맥을 짚어 무엇 하겠읍니까" 하는 것이다.
"아니 죽다니 그럼 초상이 났단 말이요."
"그렇게 되었읍니다. 잘 놀던 아이가 별안간 들어 오더니 의원을 부를 겨를도 없이 숨이 넘어 갔읍니다."
"원 그럴수가…그럼 죽은 지가 얼마나 되었소."
"'반시간도 채 못 됩니다."
"어디 내가 한번 봅시다. 반 시간이라면 살릴 수가 있을지 모르겠으니···"
이 말에 주인은 새삼 노인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들어오라고 했다.
병풍이 둘러 처진 방안에 열살 미만의 예쁘장한 사내아이가 그린 듯이 이불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다. 노인은 맥을 짚고 눈을 까보고 하더니 부랑자에게
"여보게 자네 마당에 나가서 장닭 한 마리 잡아오게나 이 아이는 살릴 수 있네"
하고 말하자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이내 커다란 장닭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왔다. 노인은 부랑자에게 닭의 목을 베라고 하면서 어린이의 입을 벌렸다. 이윽고 닭의 생피가 어린애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한숨 돌리자 어린애는 몸을 비틀면서 "캑!"하고 죽은 피덩이를 뱉어 내더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 닭을 삶아서 미음 죽을 끓여 먹인 다음 생밤즙을 내 먹이고 한숨 푹 쉬게 하면 아무 일없이 잘 될거요."
노인이 말하자 온 집안이 떠들석했다.
"노인장 고맙습니다. 우리 집안에 대를 이을 자식을 살러 주셨으니 이 은혜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랑자와 함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얼마 후 그 사내애가 들어 와 노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노인은
"니가 아까 피리를 불었지?"
소년이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 노인은
그랬을 것이라면서 그 피리를 갖어 오도록했다. 그리고는 소년의 일거일동을 보기나 한듯이 풀이했다.
"원래 이 피리는 오래 쓰지 않고 아무 곳에나 팽겨쳐 놓았던 것인데 자연히 습기가 차서 지네란 놈이 피리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요. 그것을 이 애가 모르고 입에 대고는 분다고 숨을 내뱉지는 않고 들이마신 까닭이 지네가 입안으로 들어가 목구멍 천장이 달라붙었기 때문에 기절했던 것인데 지네는 닭하고는 상극인 까닭에 그 피를 넣었던 것이 까만 피를 쏟은 것은 지네가 닭 피에 녹에서 나온 때문이요."
이 말에 주인은 물론 부랑자까지 어안이 벙벙토록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노인이 떠나려 하자 주인은 막무가내로 노인을 며칠 쉬고 가께 하려고 했지만 노인이 구지 가러들자 주인은 재산문서 한 다발을 꺼내오며
"우리 집안에 멸문지학를 모면토록 하여 주셨으니 재산을 반분하여 고마움에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선뜻 문서를 내놓았다. 노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주인은할 수 없다는 듯 돈 천냥의 어음을 내놓으면서 받기를 원하자
"꼭 그렇다면 엽전 천냥만 주시오."
이렇게 받은 천냥을 부랑자에게 맡기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니 부랑자는 공연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오푼어치 술받아 준 일밖에 없는데 푼돈을 아끼고 또 귀신이 곡할 재주도 보았으니…
보아하니 젊은이는 갈 곳이 별로 없는 것 같읍니다 하고 어디 좀 들렸다가도록 하세."
길을 걷다가 남의 속을 드려다 보듯 말하니 꼼짝없이
"예 뭐 그리 급하지는 않읍니다."
이렇게 걷기를 한낮쯤해서 밥을 파는 주막 앞에 당도하게 되었다. 허자 노인은
"자네 술 한사발 마실 생각 없나." 마침 목도 말라오던 참이라 그렇다고 답하고 주막에 들어섰다. 마침 주막에는 아무도 없고 주모만이 술을 거르고 있었다. 주모는 어지간이 미인이다. 노인은 대뜸
"술 두사발만 내시요."
하고는 주모를 빤히 들여다보며
"술장사 십년이 돈푼이나 모았소구려."
"영감님이 뭘 좀 아시는 모양이네요"
"아무렴 내가 좀 알긴 알지 주인댁이 올해 서른다섯이겠다"
"아이 잘못 보셨어요. 갖 서른이에요"
"허어 거짓말 ! 남은 속여도 난 못속여 남들에겐 서른이라지만 사실은 서른다섯이요. 생일은 정월초엿새 난시간은 술시 어때 그래도 아니라고 우길텐가."
그러자 주모는 깜짝 놀라
"아니 어떻게 그리 잘 알아 맞추셔요"
"뭐 그것만 아는 줄 아나? 어떻든 주인댁이 당해야 할 오늘밤 큰 일도 알지."
그러나 큰일이라는 말에 더욱 놀라면서 교태를 지으면서 가르쳐 줄 것을 독촉한다.
"주인댁은 남편 몰래 부엌 바닥에다 항아리를 묻고 돈을 감춰 둔게 있지?"
"네?"
주모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편조차 몰래 숨겨 둔 돈을 알아내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치고요 또요" 하고 얼버무리자
"그래도 솔직하지를 못하군! 그럼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겠는가 아마 주인댁도 나만큼은 모를 꺼야."
"글쎄 저도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노인은
"그렇게 나와야지 오눌 아침에 갖다 넣은 열두냥 까지 합치면 삼천오백 닷냥이지."
"네?"
목소리조차 높아진 주모는 불이나게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부랑자는 노인의 행동에 한마디 끼여들지 못하고 입만 막 벌리고 있는데 노인이
"처서 술이나 마시게''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주모가 탄복한 듯 나오면서
"어쩌면 귀신같이 맞추세요? 한푼도 틀림없어"
"그럴테지 그럼 이제부터 내 말을 믿겠지 ?"
"예 여부가 있읍니까 말씀만 하세요"
"주인댁이 오늘 밤 죽을 운이요."
"네?"
주모만 놀란게 아니고 부랑자마저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무엇이던지 척척 알아 맞추는 노인의 말이니 틀림없는 얘기인 것이다.
"영감님 살려 주십시요. 제가 땅속에 묻어 둔 것도 다 잘 살아 보겠다고 한 일인데 재미있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영감님 땅속에 돈을 다 드릴테니 목숨만 살려주십시요"
노인을 붙잡고 애원하는 것이다.
"땅 속에 돈을 다 나에게 준다면 주인댁이 너무 억울하지 않소? 그러니 내가 그 비방을 가르쳐 주고 주인댁이 살아나면 엽전 천냥을 주시요."
노인은 비방을 아르켜 주었다.
주모는 노인의 말을 듣자 일찍암치 문을 내 걸고는 장사를 걷어치우고 노인과 부랑자를 안방과는 동떨어진 구석방에 유하도록 하였다. 저녁을 일찍 치우고 대문과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재운 후 노인의 말대로 주모는 액땜을 하고 있는 판인데 밤이 이슥하자 누가 대문을 덜컹 덜컹 흔들어대며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아니 오늘은 벌써 대문을 걸었네 문 좀 열어 줘! 나요!"
"내가 누구란 말이야 아닌 밤중에 어떤 놈이 남의 집 대문을 흔드는 거야?"
"어서 썩 꺼지지 못해."
주모는 안방에 앉아 소리만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그 사내는 혼자 중얼거리다 가 버린다. 그리고 한시간쯤 지나서다. 별안간 안방 문밖이 어떤 사내 그림자가 비치더니 안방 문을 힘차게 밀어 부치고 장승같은 사내가 시퍼런 칼을 꼰아들고 불쑥 방안에 들어섰다. 주모는「어이쿠 이젠 죽었구나」 싶어
"에이구머니나" 하고 방 한쪽 구석으로 도망을 갔다. 이때
"이년 불을 켜라! 어째 네 혼자냐"
하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러 왔다.
틀림없이 시골이 간다던 남편의 목소리였다.
"아니 여보 당신이 웬일이요?"
주모는 무서움이 가셨는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는 노인의 말이 귀신같이 맞는 것을 새삼느꼈다.
먼젓번에 대문을 혼든 사내의 음성은 남편 몰래 만나는 샛서방의 목소리고 그는 남편이 오늘 시골 다니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왔던 것이며. 이런 기미를 알고 그전부터 꼬트리를 잡으려고 벼르고 있던 남편은 일부러 시골간다고 하고는 밤중에 급습을 한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목숨을 건지게 된 주모는 다음 날 천냥을 노인이게 주면서 수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리하여 이천냥을 벌은 노인은 전부 부랑자에게 맡기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노인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산 속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천하없는 밤중일지라도 겁먹을 부랑자는 아니었지만 노인의 신비한 힘에 압도당한 끝이라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는듯 하면서 소름이 오싹 끼쳤다. 혹시 저놈에 영감이 귀신이나 여우가 둔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영감님 어째 길을 놔두고 이렇게 산 속으로 만 가십니까?"
"왜 겁이 나나"
"내가 왜 겁쟁이 입니까? 저야 아무렇지 않습니다만 영감님이 산 속으로 들어가시니 다치실까 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산을 두서너개나 넘고 산 중턱에 왔을 때 노인은 갑짜기 부랑자를 돌아보며
"잠시 여기 좀 있게나 요뒤에 가서 소변을 좀 보고 올테니." 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노인은 돌아오질 않는다.
"이놈의 영감이 어쩌자고 여태 않을까?"
생각만 같아서는 훗딱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많은 돈을 맡아 가지고 있는 몸이라 그럴수도 없어 마침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노인이 살아진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러 왔다. 캄캄한 밤중에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여자의 중얼거리는 음성을 들으니 부랑자는 전신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원래가 호탕한 부랑자는 은근히 호기심이 나 그쪽으로 고개를 길게 뽑고 넘겨다 보았다.
그랬더니 어떤 처녀가 돌 제단에다 밥 한그릇과 산나물을 올려 넣고 무엇인가 열심히 빌고 있지 않는가-. 순간 부랑자는 흠찔했다. 혹시 여우가 아닐까 그런데 듣자니 빛 이천냥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가 자기가 갖은 금액과 같은 것이다.
부랑자는 촛불을 켜 놓고 빌고 있는 처녀의 옆얼굴을 보고 어쩌면 저리도 예쁠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제단 맞은 편을 본 부랑자는 별안간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석상인데 그 얼굴이 많이 본 얼굴이다.
넋을 잃은 듯 석상을 바라보고 있던 부랑자는 처녀가 다시 이천냥 빚 운운하자 그제서야 무릎을 탁 쳤다.
그 얼굴은 두말한 것 없는 그 노인의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노인은 석상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처녀가 매일 찾아와서 이천냥의 빚 때문에 밤을 새워가며 비는 것을 보자 그 효성에 감동되어 손수 돈을 마련해다. 부랑자로 하여금 전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놀라는 처녀를 달래 가지고는 자초지종의 얘기를 서로 나누었다.
"하늘이 도두 그대를 빛나게 하였고 필시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 돈을 다 드릴테니 빨리 내려가 부모님을 만나러 갑시다."
다음 날 빚을 갚은 것은 물론 산신의 중매로 부랑자는 그 예쁜 처녀와 혼인까지 해서 아들 딸 낳고 오손도손 오래오래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