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돌아왔습니다"
"오냐, 글 잘 배웠느냐?"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는다. 아들이 어린것도 아닌데, 손까지 잡는 것은 아들의 몸이 약해서다.
아들의 나이는 열 대여섯 살로 보인다. 나중에 관서를 지낸 이식의 소년시절이다.
어머니 홍씨 앞에 꿇어앉은 식은 그날 배운 글을 내리왼다. 글을 외는데도 힘이 드는지 피곤한 기색이다. 어머니 홍씨는 안타깝다.
(저렇게 총명하고 단정한 아이가 어깨서 저토록 약할꼬.)
집안이 좋은데다 가산도 넉넉하여 부러울 것이 없건마는 늦게 얻은 외아들이 몸이 약해서 걱정이다.
부모도 걱정이지만 아들인 식이도 마음이 면하지 않다. 이제는 나이도 들어 제 앞길을 제가 알아서 처리할 계제가 된다. 그러는 어느 날.
"어머니"
"왜 그러느냐?"
"어머니께서 항상 저를 걱정하시는 것이 뵙게되에 송구스럽기도 하고. 용문사에서 글을 매우면서 생각한 것인데 여러 중들이 하는 일들이 보기 좋아요. 그래서…"
잠깐 말을 끊는다.
"아니, 네가 중이 되겠단 말이냐?"
어머니의 안색이 변한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용문사같이 경치가 좋은 절에서 고승들을 모시고 있으면 공부모 잘 되고, 몸도 건강해질 것같이 생각이 들어서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어머니 홍씨는 아들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외아들을 떠나 보내기가 그렇고, 약질이라 특별히 돌보아 주어야 하므로 언뜻 대답을 못 한다"
"오냐, 아버님께서 오시면 의논해 보다"
아들이 물러간 뒤, 어머니는 그러한 처지를 한탄한다.
식의 고조부는 행이라고 한다. 1478년(성종 9년)에 사간(사간원의 종3품 벼슬) 선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95년에 18살로 급제하여 1515년(중종10년)에는 대사간(사간원의 으뜸 벼슬. 정3품. 임금이 정치를 잘못 하면 간하는 일을 맡음)이 되었다가 1517년에 대사헌(사현부의 으뜸 벼슬, 종2품, 문백관의 기강을 바로잡고, 임금의 잘못을 간하고, 풍속을 바로잡음. 지금의 감사원장 비슷한 것)으로 있으면서 무고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변천에 숨어살다가 1519년 기묘사화 이후에 공조 참판, 대제학을 거쳐 1527년에 우의정, 1530년에 좌의정까지 올라갔는데, 1531년에 김 안로를 공격하다가 이듬해 함종으로 귀양가서 풀리지않고 병사했다.
그뒤로 4대째 벼슬을 안하고 지내온다. 식의 고조부 행이 당파 싸움에 말려들어 끝이 안 좋아서 벼슬을 피해 온 것이다. 거의 70년 동안이나 벼슬을 안했지만 고조부가 좌의정까지 지낸 집안이다.
인제는 더 머뭇거릴 것 없이 식이 과거를 봐서 벼슬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몸이 약하니 큰 걱정이다.
저녁에 식이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영감, 식이가 용문사에를 가겠다잖아요."
하고 그 일부러 말을 꺼낸다.
"용문사에 가겠다니?"
아버지도 놀란다.
"몸이 약하니까 조섭도 할 겸 고승들을 모시고 공부도 하겠다고요."
"....."
아버지도 긴장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 된다고 말려 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기야 하겠지만. 차마‥"
어머니가 미리 내키지 않는다는 내색을 한다.
"애를 보내는 것은 부인이나 나나 유쾌한 일은 아니오마는, 식이가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일 데니까, 그 애 뜻대로 합시다. 용문사에는 고승도 있는터이니 학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오."
어머니는 섭섭하나 할수 없는 일이다.
"참. 하느님도 야속해다. 몸도 약한 것을 떠나 보내다니. 우리는 어찌 이다지도 복이 없을까."
"너무 상심마오.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몸 조섭하고 공부하러 간다는데…"
그러는 아버지의 눈도 역시 붉어져 있다.
이리하여, 식은 용문사에 가 있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용문산 숲 속을 거닐다가 숙소에 들어 글을 읽다가 하는 생활을 보냈다.
중들이 글을 읽는 진지한 태도며, 규칙적인 생활이며, 맑은 공기며 모두 식의 마음에 든다.
더우기 스승되는 유념이라는 대사는 학식이 깊고 덕이 높아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런 생활은 10년 가까이 하고 나니, 몸도 건강해졌으며, 학문도 깊어갔다. 주역을 배우게 되었을 때 스승 유념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독서하는 식에게 유념이 너무 피로할 터이니 쉬라고 하면
"아니올시다. 근 10년을 대사께 배우고도 아직 의심나는 점이 많사온데, 대사께서 와병하시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더욱 열을 내어 한 자라도 더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하며, 어떤 때에는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세상 만물이 모두 스승이니라. 내가 가고 없더라도 낙심말고 모든 것에서 배우고 깨달음을 얻으라."
"스승님의 가르치심을 잃치 않겠나이다."
"거듭 부탁하는 것은, 모두 스승으로 알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유념 대사는 왕생극락하고 말았다. 뿐아니라, 모든 중들이 비통해했으나 하는 수 없는 일, 좋은 땅을 골라 성대하게 장례를 지냈다.
그리운 스승과 이별하고 나니, 회자경리라는 불가의 말이 떠오른다.
학문은 깊다. 아무리 연구하여도 끝이 없다. 밤은 깊은 줄도 모르고 학문 닦기에 골몰하는 일이 예사다.
어느 날, 밤이 깊어 중들이 모두 잠든 때, 식은 벽에 기대앉아 명상에 잠겨있는데, 방 가운데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까지 별로 볼 수 없었던 늙은 중하나가 자기의 남루한 옷을 깁고 있다. 누더기 옷으로 보아 산을 오르내리며 땔나무를 해 나르는 부목승인 것 같다.
잠깐 눈에 거스른다. 부목승인 주제에 조심하지 않고 남의 명상에 훼방을 놓다니,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식은 문득
(아마, 제 신세 타령은 하겠지. 신세타령도 할 만하지. 저 나이에 종일 나무를 해 나르고도 또 밤중이 누더기까지 기워야 하니 짜증이 안 날라고, 가엾은 신세.)
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 부목승은 제 신세 타령을 하는 젓이 아니다. 이번에는 혀를 차는 것이 아니다, 식을 힐끗 쳐다보며, 식이 잡든 걸로 여기는지 혼자소리로 중얼거린다.
"젊은 서생이 연구는 하는 모양인데, 깨닫는 바가 적은 것 같구나. 젊은경력을 허비하는 것이 딱하지만, 바로 일러 주지 못하니 가엾은 일이다"
도리어 이쪽을 동경하는 것이 아닌가 식은 무심결에 화가 났으나, 그 순간
"남을 업신여기지 마라."
하던 유념 대사의 유언이 생각난다. 식은 꾹 참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다.
부목승은 또 중얼거린다.
"성력이 저러하니 좋은 스승만 만났더라면 더욱 진취할 것을‥쯧쯧."
식은 여전히 모른 체하고 맡았다. 다음날, 식은 새벽 일찍 일어나 숲 속을 거닐었다.
그 때, 늙은 중 하나가 나무를 한 짐지고 비탈길을 내려간다. 늙은 몸에 무거운 나뭇짐을 컸기에 몹시 헐떡거리는 것 같다.
가엾은 생각이 들어서 얼른 달려내려가 짐을 뒤에서 받쳐 주었다.
"누구신지 모르나 고맙소이다."
그 말소리가 어디서 들은 일이 있는 것 같다. 식은 그 중이 밤중에 자기를 동정하던 부목승인 것을 깨말았다. 나뭇짐을 번쩍 들어 길 위에 내려놓고, 그 중의 손목을 잡는다.
"대사, 어젯밤에 대사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소이다. 유념 대사가 가신 후에 소승을 구하는 중입니다. 대사께서 역리를 아시는 분이 분명합니다. 스승이 되어 주시기 바라옵니다."
노승은 허허 웃으며 이식을 쳐다본다.
"별말씀을 다 하오. 나같은 어리석은 중이 무엇을 알겠소. 짐을 도로 지워주오. 갈 길이 바븐 몸이오."
비록 늙고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서는 여느 사람과 다른 품위가 엿보인다.
"저의 청을 저 버러지 말아 주십시오. 학문에 주린 몸이니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식은 간청한다. 손목을 붙잡힌 채 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는 문자라고는 모르는 부목승이오. 역리를 얼마니 당치않은 말아요"
손을 뿌리치며 나뭇짐을 지러 한다. 그러나, 식은 매달린다.
"대사는 거절 마시고, 이 몸을 바로 인도하여 주시오."
늙은 누더기 중은 할 수 없는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구려. 천한 노승을 업신여기지 않고 간청하시는 데에 탄복할 따름이오. 그렇게 하시오.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낱낱이 적어 두었다가 조용한 때에 의논해 주오."
하고 승낙한다. 식은 기뻤다.
"감사합니마. 대사, 그리하겠습니다."
식은 나뭇짐을 져다 주었다. 식은 공부하면서 의심나는 점을 적어서 부목승을 찾아다니며 숲 속이나 개울가에서 질문하고 그의 설명을 들었다. 노승은 참으로 오묘한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있어 식에게 크게 참고가 되었다.
노승과 식은 날로 가까와지고 정이든 사이에 식의 학문이 놀라울만큼 깊어갔다.
그런지 어언 한 해 가까이 되어, 두사람은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잔디밭에 앉아 한가하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누더기 도승이 이런 말을 한다.
"그대의 학문이 그만큼 깊은 경지에 도달했으니, 상경하여 과거를 봄이 어떠할꼬"
식은 그점에 대해서 의논해 보고 싶던차다. 그러나,
"아직 미미한 정도로 어찌 감당할 수 있사오리까."
하고 사양한다.
"그렇지도 않아. 귀향해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소원을 성취함이 옳을 것이다."
식은 기다리는 바다. 부모님을 뵈면 이만큼 자랐고 몸도 건강하고 학문도 어느만큼 닦았으니 기뻐하시리라 실은 마음이 급했다.
행장을 차려 오랫동안 같이 지낸 용문사 중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도승에게 나아가
"그동안 돌봐 주신 은혜를 잊을 길 없나이다."
하니, 도승이 식의 손목을 잡으며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몸조심하라."
한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도승이 따라오며 귀에 대고 나지한 소리로 말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아마 그대에게 일러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
식은 무슨 일일까 하고 돌아서며 묻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일러 주십시오."
"아니, 아직 잘 몰라. 내년 정월에는 그대를 찾아갈테니 그리 알고 있게나."
그대로 둘이는 헤어졌다.
때는 1610년(광해군 2년), 경술년.
식은 고향에 가서 부모를 뵙고 상경하여 과장에 들어섰다. 경향 각지에서 젊은 선비들이 모였다. 이식의 나이. 스물여섯.
식은 문과에 응하여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러하여 사골 부모를 서울로 모신다. 명문 거족과 통혼을 한다. 벼슬을 한다하여 기쁜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용문사의 부목승이 생각난다. 그 도승이 어찌 되었을까.
용문사는 그리 먼 곳이 아니다. 몇 번 찾아가 봤으나 없었고, 사람을 보내어 수소문하여도 알 수가 없다.
"그 누더기 노승은 지난봄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는 한결같은 소식이다. 다음해 정월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과연 도승은 약속한 데로 왔다. 그러나 온 지 사흘만에 떠난다고 한다. 물론 식은 정성을 다하여 융숭히 대접했으나 섭섭함을 금할 길 없다.
"이 몸이 오늘날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대사의 은공이오. 어디 가신다 마시고 평생을 같이 지냅시다."
"부족없는 생활보다는 떠돌이 나그네가 더 편하오."
하는 수 없는지라, 식은
"작년 봄이 일러야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일러 주십시오."
하고 궁금하던 것을 묻는다.
"불원간 조정에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니 고향이 가서 쉬시다가 나라의 부름이 있을 때 오시도록 하십시오"
도승은 떠났다.
아직도 그 지긋지긋한 당파 싸움이 계속되는 중이라, 벼슬아치들이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때다. 식은 아닌게 아니라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폐모론이 일어났다.
식은 1617년에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가서 엎디어 있었다.
1623년에 인조 반정이 있었고, 식은 부름을 받아 이조 좌랑(이조에 딸린 정5품 벼슬)이 되었다.
벼슬이 올라 대사간이 되었을 때, 또 도승이 찾아왔다.
"병자년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일가를 이끌고 영춘 땅으로 피하여 있으면 무사할 것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쫓겨가 큰 곤욕을 치루고 되놈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이식이 벼슬을 버리고 영춘에 가서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모시고 따라가 함께 고생하고, 1642년 12월에는 청나라에 붙잡혀 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 판서를 지내고 1647년(인조 25년)에 세상을 떠났다.
도승은 이식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묘향사에 교군꾼이 되어 만났다고도 하는데, 하여간 기이한 인물이었던가 보다.
옛 이야기(고전) - 장사못의 유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