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만석은 젊어서 일찍 전라도 어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는 중에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디 곁에 모여 앉온 농부들이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듣게 되었다.
『여보게, 대관절 그 김진사란 사람이 어디서 온 사람인가?』
『글세 말여,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더군.』
『그 양반 따라 다니는 부사들도 얼만지 모를 정돌세.』
『아 돈도 무지무지 많은가 본데.』
『글세 그 돈이 웬건지 수상쩍기도 해.』
『매번 보면 어디로 몰려갔다가 한번씩 지나서 돌아 올 적에는 수백냥씩 싣고 오데.』
『그래서 모두 도깨비 같다는 둥, 무슨 도둑의 괴수라는 둥 하잖는가베.』
어사는 한쪽 구석에 누워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진사란 사람이 이상스런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 슬그머니 일어나 그 농부들을 보고 물었다.
『그 참 훌륭한 사람인가 보구려, 대관절 그 김진사의 집이 어디쯤 있소?』그 중에 한 늙은 농부가 김진사의 집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이튿날 아침 어사는 김진사의 집을 찾았다. 과연 그 집은 수십칸이 넘었고 마당도 수백평은 되었다. 그리고 또 수하도 여러 수십 명이고 거기다 드나드는 손님이 매일 수십명씩이나 되었다.
주인 김진사는 폐의파립으로 찾아간 어사를 홍연히 맞아 사랑방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숱상을 차려 대와서 융숭히 대접하면서 시속을 논하는 품이 과연 호걸이 있고 인물 풍채도 잘 생겨서 오히려 그의 생김생김에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전날 밖에 농부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마도 시골에 터잡아 백성들을 털어먹는 악한 일당이 아닌가 생각되어 그 놈을 잡아 혼줄을 내주려 했는데 막상 이 집에 찾아와 동정을 살펴보니 주인 김진사는 행동과 변론도 도적놈의 괴수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사는 아직도 그의 정체를 알길이 없어 공연히 이말저말 꺼내어 말도 받아보고 그러는 동안에 모든 동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날 밤이 지났다.
날이 밝으니 김진사는 어사를 보고,『대단히 미안하오만 나는 볼일이 있어 좀 나갔다 와야겠소. 사흘 뒷면 돌아올 것이니 손님께서는 조금도 염려마시고 여기서 푹 쉬시도록 하시오.』라는 것이었다.
『아니오 주인 없는 집에 어찌 손이 남아 있겠소. 더구나 나도 역시 볼일이 있어 떠나야겠소. 하룻저녁 폐를 끼친 것만도 대단히 감사하오.』어사는 오히려 김진사보다 한걸음 먼저 대문을 나섰다.
뒤이어 김진사도 수십명의 수하를 데리고 고개를 넘어갔다.
어사는 몰래 숨었다가 얼른 그들 뒤를 따랐다. 그날 밤 산 너머 주막에서 어사와 김진사는 만났다.
『인연이 있고 보니 자꾸만 만나지는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산둥 하나 넘어와도 객지는 객지요. 오늘 밤은 주인과 객이 같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나그네의 몸으로 서로 객회나 풀며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것도 좋지 않소?』
하는 김진사의 말에
『고마운 말이오. 오나가나 대접을 받기만 하고 가난한 과객이라 대접을 갚지 못하는게 적이 미안하오.』
하며 들어섰다.
두사람은 주막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
그날 아침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젊은 여인이 비를 촉촉히 맞으면서 무엇인지 무거운 보통이 하나를 머리에 이고 헐떡이며 오너니,
『검냇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하고 물으니 김진사는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당신도 누구에게 쫓기어 가는 모양인데 큰길을 따라 검냇골로 가다가는 잡혀서 죽을 것이요. 그러니 그길로 가지말고 저쪽 산길로 접어들어서 고개를 넘어 가야만 목숨을 전질 것이오.』하고 일러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혼잣말로『저 산고개를 넘으려면 이 무거운 것을 이고 갈 수야 있나.』
하고는 김진사에게
『고마워요. 내게 살길을 일러 주시니 이걸 드리고 갑니다.』
하며 보퉁이를 던져두고 김진사가 일러준 산길로 접어들어 바쁜 걸음으로 달아났다.
아니나다를까 조금 있자니까 수십명의 장정들이 모두 손에 장대 하나씩을 들고 헐떡이며 오더니,
『여보시오, 이제 방금 어떤 여인하나가 이리로 지나가지 않았소?』
하고 물었다. 김진사는 시침을 뚝 떼고는 큰길을 가리키며
『조금 전에 이 앞으로 지나갔소. 이리로 가면 만날 것이오.』
하며 틀리게 일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길로 몰려가버렸다』
김진사는 수하를 시켜 그 보퉁이를 끌러보게 하였다.
그 속에는 돈 백냥과 비단 두필이 들어 있었다.
어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여보시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같이 동행하는 것이 어떻소?』
김진사의 말에 기뻐 승락하고 같이 길을 떠났다.
산을 넘어가는 길에 이들은 장례행렬을 만났다. 아마 호사스런 사람의 장례인 것 같았다. 상주와 조객과 따라온 사람이 수백 명이 넘었다.
김진사는 상주를 찾아
『여보시오, 내가 알고서 차마 그냥 지날 수 없어 한 마디 일러두는 것이오. 지금 파 놓은 무덤은 함정이오. 이리와 보시오.』
하며 상주의 손을 끌고 관을 넣으려고 파놓은 구덩이 밑바닥을 막대기로 몇번 두들기니까 거기 조그마한 구멍이 뚫리고 다시 그 구멍을 몇번 후비니 커다란 함정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상주는 깜짝 놀라며,
『참으로 감사합니다. 과연 큰일 날뻔하었습니다, 누구시온지 저를 위해 좋은 자리를 하나주시고 가시면 그 은혜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하자 김진사는 웃으며,
『좋은 자리가 있지요. 내가 틀림없이 좋은 자리를 일러 줄 터이니 돈을 삼천냥만 내시오.』하였다.
상주는 첫말에 승락하고 하인을 시켜 삼천냥을 가져 다가 김진사에게 아낌없이 바치고 그 겔로 건너편 언덕 위로 올라가 좋은 자리를 잡아 장례를 마쳤다. 이것을 보고 돌아 선 김진사는,
『이제는 해도 저물고 했으니 산밑 주막으로 내려가서 쉬도록 하자. 자, 어서 같이 갑시다.』
어사에게도 이르고는 곧 산아래 주막으로 내려왔다.
저녁밥을 먹은 뒤 그럭저럭 밤이 깊었다. 모든 수하들은 다른 방에서 모두 잠들었고 한방에서 어사와 김진사만이 늦도록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인제 바로 말하리라. 공이 어사인 줄도 내가 알았고 또 공이 나를 무슨 도적의 괴수인 글 의심을 품고 내 행색을 수탐하는 줄도 잘 알고 있소.』하고 말을 꺼낸 김진사는 어사의 손을 정겹게 쥐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여인이 검냇골을 묻던 것은 자기 간부를 찾아가는 것이오그 것을 안 본부와 그의 일가들이 그 여인을 때려죽이려고 그 뒤를 따라 온 것이오. 그래서 내가 그 가엾은 생명을 건져주고 돈 백냥과 비단 두필을 벌었던 것이오. 그리고 또 아까 장례 지내던 일로 말하더라도 관을 넣으려고 구뎅이를 파는 것은 얕게 파니까 그 밑바닥이 어떤지를 대개가 모르고 있는 것이지만 산에는 본시 허궁창이 많아서 밖으로는 몰라도 관을 내려놓고 나면 오래 지나는 동안에 저절로 내려앉아서 몇십길씩이나 땅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것이오. 그래서 오늘 내가 그것을 일러주어서 남의 집 조상의 뼉다귀를 구해주었고 또 좋은 자리에 묻히도록 해 주었으니 부호의 돈 삼천냥을 받은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소?』
어사는 너무나 감탄하였다. 김진사의 행동이 너무도 이상하고 또 범인이 아니므로 다시금 옷깃을 가다듬고
『공과 같은 인품과 지혜로써 어찌 이렇게 허송세월 할 수가 있겠소, 내가 힘껏 천거할 터이니 국사에 참여하여 창생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함이 어떠하오?』
하며 벼슬길에 나서기를 권했다.
김진사는 태연한 몸가짐으로 어사를 위압하듯 바라보며
『사람은 각각 자기가 가는 길이 다른 것이오. 나는 본시 바람과 같은 사람이라 청산녹수 사이로 다니는 것이 내 천분인 것이오. 다만 공과같이 국사에 분주한 사람을 아낄 뿐이오.』 했다.
어사는 김진사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공의 말에 나는 감복할 따름이오. 나를 위해서 한 마디 좋은 지시를 해줄 말은 없소? 』
이에 김진사는,
『그렇게 하지요. 지금으로부터 이십년이 지난 뒤에 내가 공을 평안도에서 만날 일이 있을 것이오. 남은 이야기는 그때 하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 밖에서 새벽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김진사는 부하들을 깨워 일으켜 길을 떠나며 어사와 작별을 고했더니 어사는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왕에게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인 끝에 김진사를 물색하여 지금 어디 사는지를 알아 올리라고 전국에 전통을 놓았으나 아무도 그의 행색을 보고 해 오는 이는 없었다.
그로부터 어느 덧 이십년이 지났다.
평안도 지방에서 큰 혁명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는 조정이 지금껏 평안도 사람에게 차별 대우를 해오던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끝에 관리들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하고 또 흉년조차 들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기회 삼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정어사에게 평안도 난리를 막게 했으니 그때 그의 나이54세였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은 그 날랜 기세를 얼른 수습하기 어려웠다. 청천강 이북 여덟 고을을 순식간에 손아귀에 넣고 이듬해 정월에는 정주성에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서 관군과 홍경래군은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기 무려 넉달동안이었다.
바로 그 그음이었다.
어느날 밤에 경어사의 방문을 두들기며 들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과연 김진사 그 사람이었다.
두사람은 너무도 반가워 손을 잡고 어쩔줄을 몰랐다.
『공이 그때 이십년 뒤에 평안도에서 서로 만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나는 늘 명심하고 있었소. 그래서 내가 우연히 평안도로 특사가 되어 내려오게 되는 걸보고 아닌 게 아니라 은근히 기다리지 않은 것도 아니오.』
하며 어사는 김진사의 이십년전 예언이 들어맞은 것에 더욱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이번 여기서 일어난 난리로 말하면 모든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또 거기다가 흉년이 겹쳐서 들고일어난 것이오.』
김진사가 말을 꺼내자 어사는 깜짝 놀랐다.
『이 난리를 토평시키기 위해서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그리고 이 난리 끝이 어찌 되겠는지요.』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필경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오. 성상을 저버리고 일어나는 것은 필경 큰질서를 그릇치는 큰 악행이 되기 때문에 도로 망하는 법이오. 그리고 또 경래의 운명 그 자체가 경각간에 달린 것이라 큰 염려할 것은 없오.』다만 이에 전략을 바로 세워야 그를 물리치지 그렇지 못하면 토평도 역시 어려울 것이오. 이걸 막으려면 한가지 계교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기서 땅 밑으로 굴을 뚫어 성 밑에까지 가서 화약을 터쳐 성을 무너뜨리는 길 밖에 없소.』
이것이 김진사의 의견이었다.
어사는 김진사의 맡을 무조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관군은 그 계략대로 땅속으로 굴을 뚫어 성 밑에까지 들어가서 화약을 터뜨려 정주성을 함락시키고 홍경래도 거기서 전사하여 마침내 그 홍경래난은 평정되었던 것이다.
어사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고마워서 또 한번 그의 손을 붙들고,
『이 길로 나와 함께 서울 가서 국사에 나서 주기를 바라오.』
하며 간절히 청했으나 허사였다.
정어사는 그 뒤에 우의정을 지냈으나 평생에 잊지못할 김진사를 한번만 더 만나고 싶어서 심복부하를 풀어서 8도에 걸쳐 염탐토록 하였으나 허사였으며 운명 직전까지도 김진사를 경모하면서 눈을 감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