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은 신라 제19대 왕으로 즉위한지 이미 오랬으나 항상 마음이 불안한 것은 아우인 미사흔이 일본에 볼모(인질)로 가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눌지왕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보니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고 괴로운 일은 이렇게 외국에 볼모로 가있는 아우를 빨리 본국으로 데려다가 다같이 궐내에 모여 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왕은 군신회의를 열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빨리 성사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논의한바 있었다.
다만 백관들의 입에서는
『사신을 일본으로 보내서 인교의 의를 맺는 것이 좋을 줄로 아웁니다.』
하고 안을 내는가 하면
『공물이라도 바쳐서 일본의 기분을 먼저 사두었다가 다음 기회에 왕제님을 모셔오도록 하는 것이 상책인줄 아옵니다.』
등등의 소견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런 정도의 소견과 제안에 대하여서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하루속히 만리타국에 가서 외로이 지내고 있는 아우를 위하는 일념으로 왕은 눈시울까지 적시었다.
이러한 경황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신하들은 서로 밀고 서로 눈짓을 하면서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있을 뿐-
이런 때에 과연 내로다 하고 앞을 나서는 충신의 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많은 신하들의 태도만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는
『누구든지 한번 일본까지 다녀올 사람은 없는가?』
하고 하문하였다.
그런데 마침 좌중에는 왕이 기대한 충신 한 사람이 혜성같이 나타났다.
어전에 나와 부복하며,
『소인이 비록 지혜 없사오나 일본에 다녀올까 하옵니다.』
하고 아뢰는 장년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재상이었으니 그는 평시부터 지용을 겸비한 인물로서 항상 애국충성에 불타오르는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 이 재상이 과연 그렇게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나서 주려는가? 참으로 짐의 충신이로다.』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런 일은 하루를 지체할 수 없는 일이라 믿사옵기에 바로 내일이라도 시행할까 하옵니다.』
하고 이 재상은 서둘렀다.
『오-- 그러하오. 부디 몸조심해서 기어이 성공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겠소.』
왕은 그의 장도를 찬양하면서 이번 길에 큰 공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이 재상의 부인 김씨는 평시부터 장한 남편의 기개를 믿었거니와 이번 나라 위하여 누구보다도 앞장 나서는 그의 장거를 마음으로 축하하였다.
저녁상을 받은 이 재상은 항상 한결같이 지성으로 자기를 위해주는 부인이 고맙기만 했다.
그러나 한결같은 태도가 늘 고맙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매우 야속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 가까이 붙어 앉아서 아양이라도 부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내의 손목을 가만히 끌어다가 자기 무릎 위에 놓고 한참 만지작거리면서,
『여보.』
『예.』
『밥그릇을 똑같이 내 상위에 놓고 함께 먹어보면 어떻소.』
『그래두요!』
『그래두가 무어요. 그것도 처음 시집와서 시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말이지, 아니 나이가 40줄에 있는 사람이 그럴 거 없지 않소……』
아닌게 아니라 아내는 언제나 밥그릇을 방바닥에 놓고 김칫국을 마실지언정 결코 자기 밥그릇을 남편의 상위에 같이 놓고 맞상으로 먹어본 일이 없고 때로는 그것도 미안하다 하여 부엌으로 나가서 혼자 먹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아무리 저녁이 늦어도 먼저 저녁을 먹어본 일이 없으며 또 아무리 밤이 깊더라도 남편이 자기 전에는 먼저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 재상은,
『내가 안 돌아오더라도 먼저 저녁을 먹어요······ 당신이 나를 기다리다가 나 때문에 저녁을 굶어서야 되겠소……』
어린애 달래듯이 말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이 지나치게 사랑한다고 하여 예를 잃거나 남편을 공경하는 태도에 금이 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둘 사이의 금술은 한 쌍의 원앙새도 못 따를 만치 좋았다,
결혼한지 20여년 동안 신라 서라벌에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었다.
그러나 이 재상 내외는 그러한 행복의 가정에서만 종신할 수 있도록 그의 운명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은 일본에 인질로 가있는 미사흔을 데려오기 위한 일로 내일 아침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집에 두고 혼자서 일본가는 장도에 나서야만 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내에게는 대강 줄거리만 먼저 일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재상은 저녁상을 물린 다음,
『나 일본에 가게 됐오.』
『어마나! 당신이……』
『임금님을 위해서…… 사실 당신도 알다시피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래서 내가 하기로 결심했소.』
『허지만……』
왕제님을 모셔오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부인은 벌써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인은 남편의 팔 소매를 붙들고 엉엉 우는 추태는 안 부렸지만 그래도 속가슴은 쑤시듯이 아팠다.
말이 쉽지 일본만 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오리라는 것은 전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라 위해 간다는 남편을 무엇으로 막으며 막는다고 아니 갈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에 볼모로 간지 어느덧 30년!
그 동안 고국을 그리면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왕제님의 가련한 바를 생각한다면 부인 마음에도,
(그런 대의를 위한 일이라면 나더러 가라 해도 가야 한다.)
이러한 충의심이 금시 솟구치기도 했다.
그 다음날 일찌기 남편은 정말 일본을 향하여 먼길을 떠났다.
아무리 마음을 다부지게 먹은 부인이라도 역시 이별이란 슬프지 않은 법은 없었다.
더구나 다시 돌아와 주실지 말지 한 남편과의 이별에 어찌 눈물이 없으랴!
가슴은 터질 듯이 아프고 눈물은 쉴새없이 흐르건만 모처럼 나라 위하여 목숨걸고 떠나는 남편의 장도를 앞에 두고 나가서 전송을 할 때에도 남편 앞에 눈물을 아니 보여드렸다. 다만,
『부디 몸조심하시고 이번에 가시는 길 부디 성공하시옵기를 천지신명께 빌겠사와요.』
하면서 뱃머리에 선 남편을 보고 이렇게 격려하여 드렸다.
『오-- 부인…… 고맙소이다. 그러나 너무 걱정 마오.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으니 그렇게 사람이 죽기야 하겠소…… 기어이 성공하여 돌아올 테니 그 동안 아이들 데리고 부디 안녕히 계시오.』
하면서 떠나가는 쌍돛배는 이미 너울너울 춤추는 백구들의 날개 밑에서 차차 그 그림자가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떠난 배의 그림자가 아주 안 보일 때까지 부인은 멀리멀리 하늘 밑에 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이 재상은 일본 왕에게
『나는 신라의 역신으로 몰려 살수 없어서 이 나라로 망명왔사오니 부디 이 몸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고 거짓을 꾸며서 호소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 왕과 많은 신하들은 조금도 이 제의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여 주었다. 그만치 이 재상은 외교수완이 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일본에서는 이 재상을 여러 모로 다루어 보았으나 그의 뛰어난 인물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감히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
우신 말 잘하고 학문이 깊고 지혜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이 재상에게 물어보아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이래서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도 많았고 또 일본 조정에서는 조정대로 모든 예법을 이 재상한테서 배워 그것을 나라법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본의 귀한 집 자제들의 선생이 되고 궐내로 들어가면 또 일본 조정의 고문격으로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는 예쁜 여인을 주어 장가들라는 권유까지 받았다.
더구나 한번은 이 재상더러 아주 일본 조정의 신하로써 일본나라 정치를 위하여 헌신하여 달라는 청까지 받았다.
그러나 큰마음 먹고 일본간 이 제상에게 달리 무슨 소원이 있으랴.
단 한가지 소원만 이루어진다면 금시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고 결심한 그였다.
그러기 때문에 신라의 왕제 미사흔 한 분만을 고이 꾀어내어 신라 서울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하나만이 이 재상의 머리에 벤 소원이요 목적이기 때문에 일본의 미인과 벼슬 따위가 안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재상은 그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마음에 없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요령을 잃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신라 조국을 위한 한줌의 재는 될지언정 일본국의 신하가 될까보냐, 하면서 속으로 늘 콧방귀만 뀌면서 어느 한때의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하여서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밤낮으로 노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 어느듯 세월은 흘러 근 일년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다행하게도 좋은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 재상이 왕제 미사흔을 모시고 멀리 바다 가운데까지 나와 놀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만치 비상한 꾀를 써서 이루어진 하나의 공이 아닐 수 없다.
이 기회에 이 재상은 얼싸 좋을시고 미사흔만을 교묘하기 빼돌려서 신라로 돌려보내고 자기 혼자만은 하는 수 없이 그냥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노발대발하는 일본 왕은 용서 없이 신라 충신 이 재상을 외로운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필경에는 죽여버렸다.
이래서 이 재상은 미사흔을 신라로 살려 돌려보낸 뒤에 흔연이 대의에 죽었다.
일본 땅에서 한 방울의 이슬로 사라진 이 재상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인은 벌써 그전부터 날마다 수릿재로 올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느 날을 가리랴!
아무도 가라 오라 시키는 이 없지만 부인은 날마다 이렇게 수릿재로 올랐다.
그리하여 수릿재 위에 눌러앉은 큼직한 바윗돌 하나를 동무하여 우두커니 돌부처처럼 서 있었다.
그리하여 동해바다 위로 달려오는 색다른 배만 보이면 그 배 위에 자기 남편이 탔는가 하여 쫓아 내려가 보기도 하고 그 배가 여기 포구에 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리면 뒤에 그 배가 어디서 오는 배인가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매양 헛탕이었다.
한번 가신 남편을 전혀 그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수릿재로 오르는 일은 하루도 빠질 날이 없었다.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벌써 일년이 다 되었다.
아무리 눈보라치는 겨울에도 추운 줄 모르고 아무리 캄캄한 밤중 길을 걸어도 무서운 줄을 몰랐다.
아침에는 이슬 길을 밟으면서 수릿재로 오르고 저녁에는 달 그림자를 밟으면서 맥없이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결코 지치지 않았다. 누가 무어라든지 그는 마냥 수릿재로 오르는 일과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저 날마다 아침이면 햇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고 저녁이면 달님을 바라보면서 남편의 큰 공 이루기만을 지성으로 빌었다.
혹시 동해의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견디기 어려울 때면 용왕님께 두 손을 부비면서 기원을 올리었다.
(지아비가 나라 위해 몸을 바치셨다면 이 몸도 지아비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
다만 이 하나만이 김씨 부인의 뼈에 사무친 일편단심이었다.
그 뒤 김씨 부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전하여 왔다.
그것은 조정에서 보내온 사자를 통하여 지아비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왜놈들의 독수에 세상을 떠났다는 흉보였다.
김씨 부인은 잠시 이것이 거짓말만 같아서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 이제는 만사가 끝났구나.』
생각을 하며 쉴새없이 흐르는 피눈물로 옷깃을 적셨으나 다만 한가지 고마운 것은, 지아비의 힘으로 기어이 왕제님을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한 것이다.
일희일비의 착잡한 심경에 싸인 부인은 이제 와서 달리 아무 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취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되니 되려 마음이 편안했다. 조금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래서 부인은 이날저녁 따라 저녁밥도 잔뜩 먹고 딸 아기 삼 자매와 더불어 같이 웃기까지 하였다.
근 일년만이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어머니께서 전례 없이 왜 이러실까?)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별다른 개의도 없이 마음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 때에 부인은 가만히 집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전날처럼 수릿재로 발길을 달리었다.
이번에는 그전처럼 일본서 돌아와야 할 남편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본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지아비의 뒤를 따라 나도 가겠다는 최후의 비장한 결심이었다.
뿌유스름한 달 그림자를 밟으면서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올라가는 김씨 부인의 등골에서는 전에 없던 식은땀이 줄줄 젖어 흘렀다.
수릿재 위로 올라서서 땅이 껴져라하고 긴 한숨을 뿜으니 숲 속에 부엉새마저 그 뜻을 알아주는 듯.
『부헝……부헝.』하고 구슬픈 여운을 남기면서 울어주었다.
바닷가의 험한 바윗돌을 사정없이 들이치고는 튕겨나가는 해안의 물결소리도 소란하게 들려온다.
잠시 뒤를 돌아다보니 일년을 하루같이 자기 신변을 말없이 지켜주던 바윗돌 하나가 지금도 그 전날의 동무인양 묵직한 표정으로 부인을 지켜보는 듯했다.
(아-- 저 멀리 바다 끝은 일본이어니…… 일본서 돌아가신 우리 지아비는 그냥 맥없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견우성으로 화하여 구만리장천 높은 선세계에서 이날 밤 나를 굽어살펴 주시려니…… 그러면 나도 어서 이 몸을 죽여 직녀성이 되어 견우성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리다.)
이렇게 결심한 부인은 신발을 벗어 바윗돌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옷도 온통 벗어서 그 앞에 포개놓은 다음 그 위에 묵직한 돌 하나를 눌러놓았다.
그런데 동쪽을 보니 웬일인지 별 하나가 찍하고 소리를 치듯이 뒷꼬리를 날리며 주욱 선을 그으면서 번쩍이었다.
(아-- 저것이 유성이구나…… 저것은 유성이 아니라 님의 넋이려니…… 옳지 그렇다…… 그러면 나도 어서 님을 따라갈 길을 가자!)
순간에 바위 밑 낭떠러지 벼랑아래 바다물결을 한번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리하여 부인은 두 팔을 번쩍 들어 앞을 향하여 벌리면서 꽃잎처럼 가볍게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첨벙!』
하고 물거품소리와 아울러 김씨 부인의 몸을 단숨에 삼켜버린 바다물결만이 여전히 출렁거리며 물러나간다.
밤은 자정이 가까웠으리라. 최후 일순까지 말없이 지켜주던 바윗돌 하나!
이제는 동무 하나 김씨 부인마저 잃고 보니 그 바위에 만일 넋이 있다면 눈물 없이 이 한밤을 새이지 못했으리라.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재상에게 대아찬벼슬을 추증하였고 또 이 재상의 셋째 딸을 미사흔에게 시집보내어 그의 은혜를 보답하였다. 그리고 이 재상의 가정에는 후한 녹을 내리어 평생 편하게 살도록 돌보아 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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