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지네의 앙갚음

반응형

잠에서 깨어난 부인 유씨는 옆에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보다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나으리 얼굴에 박힌 그 붉은 점이 없어요」
「무엇이라고?」
남편인 김생은 소스라치듯 벌떡 일어나자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괴이하게도 양미간에 있던 붉은 점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지 두달 후
「여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부인이 부끄러운 듯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요」
「밥맛이 없고 하는 것을 보니 잉태한 것 같아요」

과연 열 달이 되자 옥동자를 분만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부인이 아들을 낳자
김생의 표정은 오히려 아내와는 정반대로 우울한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아내의 몸 풀은 날짜가 교묘하게도 자기 얼굴에 박혔던 붉은 점이 사라져 없어진 바로 그 날짜로부터 꼭 열 달만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붉은 점이 자취를 감춘 그날 밤에 잉태한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붉은 점과 어린아이와는 필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리라. 그 붉은 점의 후신, 그리고 다시 더 나아가서는 혹시 그 지네의 후신이 아닐까?>
김생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김생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진정 그 아이가 지네의 후신이라면 아이와 자기와는 필연 원수의 사이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꺼림직 했다. 그렇다고 차마 그 아이, 곧 자기 아들을 처치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일년전의 일이었다.
「아-니, 이번에 도입하신 사또께서도 돌아가셨다지?」
「벌써 몇 사람째야! 그때, 요번에도 죽은 원인을 모른다던가?」
서울과 멀리 떨어진 펑안도 의주 고을에서는 또 이같은 괴상한 소문이 삽시간에 한입 두 입 건너서 온 고을이 퍼졌다. 그리고는 다시 이웃 고을까지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 소문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짐이 듣건대, 근래 평안도 의주 고을에는 무슨 변고가 일어나는지 도입하는 사람마다 그 즉시로 까닭 모르게 생명을 잃는다 하니 실지로 그렇다면 언제까지 이대로 수수방관만 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인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어느 날 선조 대왕께서는 저으기 용안에 수색을 띄우며 조신들을 항해 이렇게 하문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은 원체 의주 고을의 변고라는 것이 기괴한지라 거기에 대한비책이 좀체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아 선뜻 무어라 주달치를 못하고 오직 묵묵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신하들과 혹 무슨 묘책이 있는 대답이라도 있을까하고 기다리는 상감과의 사이에는 다만 무거운 침묵만이 흐를 뿐, 그야말로 거북스럽기 비할 때 없는 장면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이제는 정말 그 누가 아무렇게 라도 상문이나 열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조신들 각자 머리 속에는 꽉 차게끔 되었다.
그래도 여간해서는 입을 열 사람이 없을 듯 여전히 잠잠하기만 하다.
그러자 이때였다. 천만 뜻밖에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신이 가서 그 변고를 물리칠까 하오」
하는 무게 있는 음성이 맨 끝 저쪽으로부터 은은하게 들려왔다.
모두가 곤경에 빠졌던 터이라 귀가 번쩍했다.
그같은 시원스런 상주에 몹시도 반가웠고, 한편으로는 그 음성이 의외에도 끄트머리 말석에서 일어났고 보니 자못 놀랍기도 하여, 조신들의 시선은 일제히 말석 쪽으로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본 즉 그리 눈에 익지 않은 한낱 미관 말직에 불과한, 더구나 유약한 문관 벼슬 아치였다.
일동의 얼굴에는 기대와 달리 일시에 의아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저런 위인이 과연 그같은 기괴한 변고를 물리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이렇듯 그 중대한 일을 도맡겠다고 결연히 자원해 나선 그의 성명은 김생이라 했다.
그는 대대로 양반인 안동 김씨 문중의 한 사람으로서, 사람됨이 매우 총명하고도 지감이 있는 인물이며 극히 담력이 차고 침착한 인재였다.
그렇건만 그의 혼재가 널리 뚜렷하게 알려지지 못한 터이고 보매 조정에서는 그토록 위험한 곳에 김생을 보내야 옳으냐 어쩌냐 하고 의논들이 분분하다가 필경은 달리 자청해 나서는 사람도 없어 급기야 그를 보내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중책을 맡게된 김생은 즉시 임지인 평안도 의주 고을로 떠났다.
이윽고 목적지인 의주에 이르렀다. 이때 고을 백성들은 서울서 명관이 대려 온다는 소문에 새 사또를 맞으러 모두들 거리로 내달았다.
「이번에 새로 부임하시는 사또께서는 명관이시다지?」
「그렇다나 보네! 하여튼 오늘밤 지내보면 알겠지 죽지 않고 살기만 하면야……」
막장 여기까지 와서 백성들의 이같이 떠도는 것을 듣고 보니 사또는 갑자기 마음이 산란해지며 새삼 두 어깨가 무거워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 기왕지사 자원해서 나선 몸이니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여겼다.
사또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비장한 결의로 동헌으로 들어섰다.
신관사또는 우선 동헌에 좌정하고 육방 관속들의 하례를 받았다.
그리고 난 후 곧 이방에게 당부했다.
「내 긴히 쓸 일이 있어 그러니 오늘 저녁 안으로 담배 몇 묶음하고 그리고 명주실을 좀 구해다 주도록 하여라」
이방이라는 자는 신관사또의 이같은 말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아마 사또가 담배를 몹시 즐기시는 모양이지? 허나 갑작스레 명주실은 갖다가 무엇을 하려나?)싶었다. 어떻든 윗사람의 분부이고 그보다 지금까지의 예로 보아 오늘 밤 죽을 것이 틀림 없는 사람이고 보니 이방은 마지막 청을 들어 줄 겸하여 선뜻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깎듯이 대답을 하고 나서 동헌으로부터 물러 나오자 즉시 사람을 시켜 담배 몇 묶음과 명주실 몇 타래를 구해다 사또에게 바쳤다.
이날 밤 사또는 홀로 상방에 들어 앉은 채 주섬주섬 명주실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문 저문 할 것 없이 문턱마다 얼기설기 걸쳐놓았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동안 하던 사또는 다시 문들을 닫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 대가 타버리자, 다시 한대에 불을 당기었다.

이렇듯 수 없이 거듭하는 동안에 시각은 흘러서 어느덧 삼경이 지나고 말았다. 밤이 이슥해 졌는지라 천지는 고요해지고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금시 귀신이나 도깨비라도 나을 것만 같다.
이때였다. 돌연 밖으로부터 어렴풋이 무슨 소리인 듯한 것이 들려왔다.
퍼뜩, 정신이 난 사또는 긴장된 눈초리로 소리나는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차츰 차츰 크게 들려오는 품이 확실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다. 자세히 들어보니 여느 걸음걸이가 아니고 살금살금 기어오는 듯 한 소리 같았다.
물론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아니며 그렇다고 짐승의 기척도 아닌 듯 했다.
이윽고 그 이상한 소리는 문 가까이 까지 이르렀다. 그러더니 홀연 딱 그쳐 버린다. 바짝 문턱에 다가온 모양이다.
다음 순간 문이 방긋 열리는 듯했다.
사또는 불현듯 그쪽을 쏘아보았다. 자욱한 담배 연기로 잘 보이지 않았다.
허지만 희미하게나마 눈에 비친 것은 괴물인 것이 분명했다.
문을 연 괴물은 방안을 향해 문턱 너머로 쑥 머리를 디밀었다.
그러더니 얼른 도로 밖으로 머리를 당겨 움츠려 버리더니 이번엔 방안을 살피듯 머리를 좌우로 휘둘러보기도 한다.
이렇게 하기를 몇 차례 되풀이 하다가 그 괴물은 뜻대로 안 되겠음인지 슬며시 되돌아서더니 오던 길로 다시 가는 것이었다.
필연 담배 냄새가 몹시 싫었던 모양이다.

날이 새어 이른 아침이 되었다.
이번 신관 사또도 죽었으려니 하고 관속들은 시체를 넣을 관을 마련하여 동헌에 당도한 이들은 어쩐지 서로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섰었다.
그러자 이때
「에헴!」
하고 헛기침 소리가 안으로부터 뚜렷이 들러왔다. 관속들은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동시에 일제히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이여?」
「글쎄! 정말 사람의 기척인가?」
「귀신의 소린가?」
그러자 안으로부터 다시
「거, 밖에 누가 있기에 떠들썩하냐?」
하고 분명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어제 잠깐 들었으나 틀림없는 사또의 음성이었다.
하도 뜻밖의 일이라 관속들은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주저 했다.
그러자 한 관속이 용기를 내어 대답하였다.
「네-이, 소인들이올시다」
「음, 그러냐! 그러면 이리로 들어들 오너라!」
하고 손수 문을 열어 주면 사또는 밖에 놓인 관이 눈에 띄자
「웬 관이냐?」
하고 관속들을 향해 물어 보았다.
「………」
그러나 그들은 냉큼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면서 동료들의 눈치만 살피지 않는가!
사또는 빙긋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들의 저의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허긴 그렇겠느니라!」
사또는 그들의 심정을 알겠다고 했다
「참, 너희들한데 부탁이 한 가지 있는데……」
사또에게 꾸지람이나 듣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떨고만 섰던 관속들은, 뜻밖에도 부드러운 태도에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네-이, 어떤 분부이신지……」
「부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 길로 즉시 나서서 가장 날쌔고 힘센 장정들 약 십여명하고 그리고 큰 가마솥 한 개와 기름을 좀 넉넉히 구해다 놓았으면 한다」
얼마 후, 과연 보기에도 날쌔고 힘차게 생긴 젊은 장정들이 인솔되어 왔다. 또 큰 가마솥과 얼마만큼의 기름도 갖다 놓았다.
「그러면 우선 그 가마솥에다 기름을 반쯤 부어 펄펄 끓여라」
사또의 명령이 내리자 삽시간에 시뻘겋게 타오르는 장작불길에 기름은 솥 안에서 용솟음치며 끓기 시작했다.
「자, 이번에는 너희들 장정 중에서 약 반수는 땅파는 연장들을 구해 가지고 나를 따라 오고 그 나머지는 창칼들을 갖추고 마당에서 지키고 있거라!」
하자 장정의 반수는 곧 마당에 남아창칼을 번쩍이며 잔뜩 움켜쥐고 대기하기로 하고 다른 장정들은 괭이며 땅 파는 연장들을 멘 채 사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헌데 사또는 웬 늘어진 명주실만 따라간다.
지난밤 그 괴물이 사또의 방문턱까지 왔다 돌아가는 바람에 문턱에 걸쳐놓았던 명주실이 그 괴물의 발에 감기어서 이 모양으로 끌려온 것을 딴 사람들이야 알리 없다.

이렇듯 명주실만 쫓아가던 사또는 급기야 지붕 위에 까지 오르더니 마침내 용마루 위에 당도하게 되었다. 사또는 유심히 발끝 쪽을 내려다보았다. 실 끝은 용마루 속, 웬 큼지막한 구멍으로 깊숙이 끌러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일제히 이곳을 파헤쳐라!」
사또의 지시에 장정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기왓장을 뜯어낸 다음, 이어서 구멍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얼마쯤을 파헤치던 장정들은 별안간 에쿠! 하고 소리치며 소스라쳐 몸을 뒤로 움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느닷없이 그 두껍고도 단단한 용마루 흙이 들먹들먹 하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장정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들먹거리는 흙덩이를 얼른 잡아 제쳤다. 그랬더니,
보기에도 끔찍스런 어마어마하게 큰 한 마리의 지네가 마치 바다 물결치듯 온 몸뚱이를 이리지리 비비틀며 크게 꿈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놈을 속히 마당으로 내리 팽개쳐라!」
또 사또의 말이 떨어졌다. 무서워하던 장정들이 연장을 휘두르며 날쌔게 지네를 마당을 향해 들어 내던졌다.
「털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육중한 지네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그놈을 빨리 다섯 토막을 내라」
하고 급히 아래를 향해 외쳤다. 워낙 큰, 그리고 독한 동물인지라 만약에 두 토막으로만 냈다가는 까닥하면 대가리는 대가리대로 꼬리는 꼬리대로 도망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또의 명령이 떨어지자 창칼을 들고 마당에 대기하고 있던 장정들은 일시에 지네에게로 달려들었다. 발을 옮겨 달아나려던 지네는 잽싸게 휘두르는 창칼에 다섯 토막이 나 버렸다. 이러고 난 후, 사또는 다시 동헌 마루에 앉아서 분부를 내렸다.
「그 토막 낸 지네를 한 토막 한 도막씩 가마솥에 처넣어라!」
장정들은 아직도 제각기 꿈틀거리고있는 그 다섯 토막 난 지네 중에서 우선 꼬리 토막을 연장으로 집어다가 펄펄 용솟음 치며 끓고 있는 기름 가마솥에 넣어 보았다.
이렇게 고리토막서부터 한 토막씩 갖다가 집어넣기를 무려 네 토막까지 하고 나니 이게 마지막으로 대가리 차례가 되었다. 헌데 대가리를 지닌 토막이라 그런지 장정들은 다소 섬직한 기분이 들어 저으기 긴장된 태도로 조심조심 그 토막을 들었다. 그리고는 막 솥에다 넣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돌연 지네아가리에서 저쪽 맛은 편 동헌 마루에 앉아 있는 사또를 향해 무엇인지 마치 푸른빛 나는 안개 같고 연기 같은 것을 힘차게 내 뿜는 것이 아닌가!
강정들은 깜짝 놀랬다.
「앗! 사또님!」
하고 마침 방에서 사또를 바라보던 이방이 부르짖었다.
얼결에 사또는 이방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냐!」
「사또님의 안면에 웬 붉은 점이…」
「무엇?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고?」
사또는 즉시 품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쳐 보았다. 보니 아닌게 아니라 흡사 콩알만한 게 붉은 점 한 개가 눈썹양미간 한복판에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지네의 피였다. 사또는 곧 손수건으로 닦아 보았다. 허나 어쩐 일인지 영 지워지지 않았다.
「허허! 거, 이상한 노릇이로군!」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사또의 안색은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서리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듯 지네를 퇴치함으로써 전임 사또들이 번번이 죽음을 당하던 기괴한 변고의 근원을 없애버린 사또는 얼마 안 있어 위로부터 부름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 내직에 들어앉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간 끊어졌던 부인 유씨와의 부부간의 정을 다시 풀게 되었고 필경은 아들까지 낳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아들의 백일이 닥쳐 왔다.
그런데 여태껏 아들의 이름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녕 그 아이가 그 붉은 점의 후신임에 틀림없다면 붉은 점 그대로 붉을 자자와 점점 자로 이름을 짓는 것이 가장 적합할 듯했다.
그래서 자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이름을 지어 놓고 얼마동안을 불러 본즉, 가뜩이나 그 붉은 점이 꺼림칙하고 불안한데 거기에다 이름조차 자점 즉 붉은 점의 그 명칭 그대로이고 보니 더욱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필경 스스로 자짜로 고쳤다. 김자점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 덧 나이 여섯 살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것이 벌써부터 어찌도 총명하고 영리한지 여느 아이들과는 딴판이다. 자고로 사람됨이 너무 지나칠수록 큰 일을 저지르기가 십중팔구인 것. 그 큰일이라는 것이 혹 올바른 것이라면 모르되 만일에 그릇된 짓이라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그런데다가 자기 아들 자점은 자기 때문에 죽은 그 지네의 후신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필시 자기와는 원수의 사이가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 아닌가!
<저놈이 필연코 역적의 패를 차고 나설 놈이지……>
이러한 예감으로 불안해하던 김생은 종국에는 <그렇다면 더욱이나 저놈에게 글 같은 것을 가르쳐서는 결코 안될 일이니라!> 하고 자기 아들을 아주 판 무식꾼으로 만들어 놓으려 했다. 그래야만 큰 인물이 되기 어렵고, 큰 일을 할 위험성이 적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점은 어느 사이에 은근히 글방을 찾아다니며 어깨 너머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어깨너머 글에 불과하지만 귀신 곡하러만치 떳떳이들 배우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그의 뒤꿈치도 못 따라 갈 형편이었다.

이렇듯 일부러 공부를 시켜주지 않는 아버지 몰래 글방을 찾아다니던 김자점은 이제, 나이 스물이 가까워져서 제법 장성했다. 헌데 하루는 자기 아버지에게 과거를 보러 가겠다는 것이다.
김생은 깜짝 놀랐다.
「네가 어떻게 과거를 보니?」
「아버지, 아무 걱정 마세요」
자점은 이렇듯 선뜻 대꾸를 할 뿐 아니라, 자랑삼아 즉석에서 사서삼경을 구절구절 줄줄 내려 외우는데, 김생은 다시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 과거는 봐서 무엇하니 그만둬라! 이 아비도 벼슬살이가 지긋 지긋해서 이젠 내놓으련다」
물론 꾸미는 말로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만약 자기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를 하게 된다면 그 세력으로 반드시 무슨 짓이건 빚어 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자점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면 온 집안 아니 온 거리가 다 떠들썩하게 잔치를 베풀고들 하는데 그래 나으리께서는 왜 그러구만 계세요?」
하고 못 마땅해 하는 부인 유씨의 말에도, 김생은 여전히 수심에만 잠겨 있을 뿐, 드러누운 채 꼼짝도 안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는
「소신의 자식 자점은 본시 그 천성이 경망하와 나라에서 쓰실 인물이 못되오니 등용을 삼가하시옵소서」
하는 상소를 위에다 올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상감께서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런 특출한 인재를 그대로 썩힌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아예 겸사의 말은 말아라」
하는 한마디 말씀으로 김생의 상소를 일축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생은 다시
「그러하옵시면 후일 만약에 소신의 아들이 죄를 범하옵더라도 당자 한 사람에게만 벌을 주시옵고 비록 그 가족이라 하올지라도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시옵기 바라옵니다」
하고 다짐을 두다시피 했다. 흔히 역적에 대한 형벌은 당자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삼족까지 당하는 것이니 혹시나 자기 아들이 역적으로 몰리게 될까봐, 미리 그 멸문지화를 방지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일 영의정에까지 오른 김자점은 임금 효종대왕을 몰아내려는 역적 모의를 하다가 참형을 당했으나 그 벌이 당자에게서 그쳤다 한다.

 


  옛 이야기(고전) - 새옹지마

  옛 이야기(고전) - 천하일색

  옛 이야기(고전) - 원효대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