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천하장사 길천은 호랑이, 곰등을 사냥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날이 저물어 쉬어 갈 곳을 찾기 위해 외딴집에 다달으니 주인왈 오늘 저녁에 도둑이 와서 생질녀를 첩으로 빼앗아 가는 날이니 제발 구해 달라는 하소연인즉 길천이 생질녀로 변장하여 신방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도둑대장 무달이는 신부로 알고 길천이에게 덤벼든다. 길천은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무달이는 혼미백산 도망가 버린다. 또한 길천은 주인의 부탁을 받고 도둑놈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소굴로 잠입하여보니 각 방마다 여승과 더불어 음탕한 짓을 하고 있어 길천은 분을 참지 못한다.
길천은 못 볼것을 보았다는 듯이 침을 탁 뱉고 다시 맨 구석에 있는 가장 큼직한 방 앞으로 가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구멍을 가만히 뚫고 들여다보니 땡초 두목 무달은 지난밤에 얻어맞은 눈언저리와 목아지를 흰 헝겊으로 싸매고 몸을 벽에 기대앉아 열 댓살가량된 머리를 따아 늘인 소녀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무달의 억센 품에 안겨 있는 소녀는 마치 매에게 채인 참새인양 오금을 못펴고 그저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전신은 사시나무 떨듯 발발 떨며 꽃잎같이 볼그레한 두 뺨에는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무달은 소녀의 옷을 벗기고 덮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보고있던 길천은 그만 분기가 충천하여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꽁무니를 더듬어 철퇴를 잡어들고 문짝을 호되게 후려치니 벼락같은 소리가 나면서 와직끈하고 문짝이 부서졌다. 둘째번 철퇴는 놀래어 일어나는 무달의 골통을 내리쳤고 동시에 적괴 무달의 놀랜 혼은 이미 왕생지옥을 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20여세 된 놈이 40여세 된 개집을 끼고 노는 방으로 돌입하여 단매로 년놈을 한꺼번에 때려죽이고 나서
『이 천벌을 받을 년놈아! 소위 불제자라는 것들이 존엄한 절간에서 이런 황음무도한 짓을 하고도 살기를 바랄터이냐!』
호통소리가 떨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철퇴가 두어번 공중에서 춤을 추니 계집과 사나이의 골통은 납작한 섬산적이 되어버렸다.
이때에야 여러 방에 흩어져서 자던 약사오십명의 땡초놈들이 제각기 낫과 도끼와 창과 몽둥이를 들고 쫓아나와서 길천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그 중에도 기운 꼴이나 쓸 듯한 건장한 놈 너댓 놈은 대뜸 길천에게 육박해오며 서리같은 창날을 좌우와 앞뒤로부터 휘두르며 가슴을 겨냥대고 일시에 찔러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창끝에 가슴팍이 파산적처럼 꿰어졌을 것이었지만 상대방이 천하장사 길천인지라 펄쩍 뛰어 몸을 반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내려오면서 발길로 두 놈을 냅다 차니 쿵하고 마당 가운데 나가 떨어져서 그대로 뻗어 버린다. 또 동시에 네놈이 골통을 얻어 맞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여러 놈들은 그만 겁에 질리어 비슬비슬 내뺄 태세를 취하는 것이었으나 길천은 한치의 여유도 주지 않고 철퇴를 휘두르며 좌충우돌하여 쳐들어갔다. 순간 여기 저기서 아이쿠! 지이쿠! 소리가 연방 들리더니 어느듯 넓은 마당에는 3,40명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졌다. 그 바람에 나머지 열댓 놈은 제각기 쥐구멍을 찾아서 줄행랑을 해버렸다.
길천은 절에 불을 싸지르고는 땡초두목의 방으로 가서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린 소녀를 들쳐업고 마을로 내려와서 주인에게 사유를 이야기한 후 소녀를 맡기었다.
그 이튿날 일찌기 길천은 주인에게 하직을 고하니 주인은 길천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인도하여 아침밥을 대접하면서 비로소 자기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성은 한씨로 일찌기 과거를 하여 양주 군수를 지내었고 생질녀는 인목대비의 부친되는 연흥부원군 김제남대감의 귀여운 손녀로서 나라님이 광해주가 간신 이이첨, 정인홍들의 참소를 듣고 김부원군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후 다시 그 집안 남녀노소를 깡그리 잡아다 죽이기도 하고 혹은 관비로 만드는 바람에 겨우 몸을 피한 생질녀는 다만 몸종 하나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도망해오게 되었다는 것과 죄인의 몸이라 드러내 놓고 상당한 가문에 시집가기도 어려운 형편인데 마침 길천의 용맹을 보니 머지 않아 국가에 큰공을 세워 꽃다운 이름을 조야에 떨칠만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또 이번에 생질녀를 위경에서 구해 주었으니 이것도 역시 인연이라 할 수 있으니 아주 오늘로 작수성례를 한 후 고향으로 데리고 가 달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길천은 자기의 고단한 처지와 간구한 형편을 이야기하며 굳게 사양하였으나 주인은 중시 듣지 않고 그날로 비밀히 성례를 시킨 후 신방으로 몰아넣어 버렸다.
실내로 들어간 길천은 눈을 들어 단정히 앉은 신부를 살펴보았다. 비록 열여섯살이라고 하지만 의젓하고 단아하여 예법있는 양반의 집 규수가 분명할 뿐 아니라 호리호리한 몸맵시와 균형이 강한 갸름한 얼굴이며 백옥같은 살결과 호수처럼 맑고 고요한 눈동자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워서 도리어 꽃이 부끄러워하고 달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길천은 만심환희하여 신부의 분결같은 손을 덥썩 잡고 어린듯이 들여다보다가
『색시는 서울 재상가에서 자라난 금지옥엽 같이 귀한 몸이요, 나는 하향의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오늘날 이와 같이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는 것은 암만해도 분수에 맞지 않을 것 같소.』
하고 말을 붙이었다.
부끄러움에 취하여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있던 신부는 문득 옷깃을 여미며 낭낭한 음성으로
『만사가 다 하늘이 정하신 인연이라면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화난여생으로 도적에게 꼭 죽게 된 몸을 구해주신 은혜를 생각하오면 일생을 두고 건절을 받들지라도 다 갚지 못할가 하옵니다.』
말을 마치자 슬픈듯이 가늘게 한숨을 쉰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시름에 젖은 신부의 얼굴을 보니 마치 모진 풍파에 시달리는 한송이 해당화를 대하듯 끝없이 애처롭고 측은하고 귀여운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을 생각해주니 고맙기 그지없소. 그대신 만일 내가 출세를 하는 날에는 애매한 죄를 입은 김부원군댁의 신원을 위하여 견마의 힘을 다해볼 결심이오. 너무 상심치 말고 아무쪼록 꽃다운 몸을 스스로 아껴주시오.』
하고 신부의 보드러운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도화같은 뺨에 가만이 입술을 대어 보았다.
연한 꽃술과 아름다운 향기를 마음껏 탐하는 나비와도 같이 황홀한 삼매경에 잠긴채 꿈같은 사흘밤은 애달프게 흘러갔다.
나흘째 되는 날, 신부와 미련을 대리고 형네 집으로 돌아온 길천은 웅담과 호피를 판돈으로 따로 집과 세간을 장만하여 동생까지 네 식구가 한 집에 모여 단란한 신접살림을 시작하었다.
그로부터 약 반년의 세월이 흘러간 어느날, 길천에게는 한가지 중대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길천이 늘 짐승가죽을 갖다 파는 단골로 철원읍에서 피물상을 하는 박치달이라는 사람과의 일이었다. 50이 넘어 후처를 맞은 박치달의 아내 홍씨는 아직 스물셋 밖에 되지 않은 미인이었는데 늙고 병있는 남편에게 항상 성적으로 불만이 있었다.
그러던중 어느날 우연히 문틈으로 길천의 남아다운 준수한 풍채와 씩씩한 기상을 엿보게 되자 그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타오르는 욕망을 풀어볼 길이 없었으므로 날이 갈수록 혼자서 노심초사를 하던 끝에 마침내 방에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불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저녁때가 다되어 사냥해온 짐승가죽을 지고 치달네 집으로 찾아간 길천에게 계집애가 오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주인은 출타하셨지만 오래지않아 돌아오실 것이고요, 또 사랑방은 불을 때지 않았사오니 건너방으로 들어오셔서 기다려 보시지요.』
길천은 그 호의를 물리치기가 어려워 따뜻한 건너방으로 가있노라니까 계집애가 술상을 가지고 들어와 권하며 편지 한장을 놓고 나가는 것이었다.
편지를 읽어보니 뜻밖에 그것은 안주인의 편지로서 사연은 대개 아래와 같았다.
문틈으로 우연히 존안을 뵈옵고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병이 되어 죽게되었다는 것과 여자로서 부끄러움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편지를 올리게 된데 대하여 동정하여 달라는 것이며 주인은 이웃동네 초상집에 가서 오늘밤은 돌아오지 않게 되었으니 안심하시고 가련한 아녀자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 주시면 죽어도 눈을 참겠다는 가장 애절한 사연이었다.
편지를 보니 실로 난처하였다. 소원을 들어주자니 양심과 의리가 용서치 않고 들어주지 않자니 한 사람의 젊은 여자가 비명에 죽게될 형편이다. 대장부로 태어나 죽게 된 여자를 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라 생각하고 망설이던 차에 방문이 바시시 열리며 몸에 처네를 두른 어여뿐 여자가 들어오더니 염치 불구하고 길천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것이다.
어릴 때 늙고 병약한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 성적으로 쾌감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지내던 스물 세살의 무르익은 생리가 난생 처음으로 젊고 잘생긴 남자--그것도 오랫동안 안타깝게 그리워하면 천하창사의 억센 품안에 안기게 되니 그 황홀함이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저어…저를 어느 머언 곳으로 데리고 가 주셔요.』
남자의 품에 안긴채 그윽한 눈초리로 사나이를 쳐다보며 조르는 소리다.
『그것은 될 수 없는 말인데…나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고 또 당신도 어엿한 남편이 있는 처지가 아니오. 지금 우리가 이런 짓을 하는 것도 큰 죄를 짓는건데 더욱 그런 생각까지 한다는 것은 도의상으로 보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요.』
『그러시다면 저는…저는 고만 죽고 말터이야요.』
여자는 또다시 흑흑 느끼어 운다.
『아주머니 큰일 났어요. 주인아저씨가 돌아 오셨읍니다.』
계집애가 문을 두드리며 하는 말이다.
두 사람은 초풍을 하도록 놀래었다. 그러나 둘 다 발가벗고 있었으므로 급히 일어나 옷을 입는 동안 벌써 주인 박치달은 마루로 올라와선 안방문을 열어 보고 취해 혀가 잘 들지 않는 음성으로
『익! 이 사람이 어딜 갔어?』
하고 뇌까리다가 문턱에 털썩 쓰러지더니 얼마 아니하여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때서야 여자는 겨우 옷을 입고 쫓아 나가서 쓰러져 있는 남편을 안방으로 끌고 들어가 두루마기를 벗기고 자리에 누인 뒤 벗긴 두루마기를 들고 다시 건너방으로 건너왔다.
『아주 술에 곤죽이 되었어요.』
여자는 두루마기 고름에 매달린 날이 시퍼런 장도칼을 뽑아 길천에게 주면서 손짓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여 보인다. 필시 그 칼로 남편을 찔러 죽여 달라는 요청이었으리라.
칼을 받아든 길천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향락을 탐하여 은혜 받은 본 남편을 죽이려 하는 악독한 계집. 이 계집을 그냥 두었다가는 후일에 반드시 선량한 박치달이 해를 입게 될 것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길천의 타고난 의협심은 드디어 그 칼로 여자를 찔러 죽이게 되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 이튿날 인제 땅으로 사냥을 떠나 버리었고 종 계집애는 다음날 새벽에야 유혈이 낭자해서 쓰러져 있는 안주인의 시체를 발견하자 어린 소견에 겁이 나서 그 길로 보따리를 꾸려서는 30리나 되는 본집으로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그 후 20여일만에 사냥을 해가지고 돌아온 길천은 피물상 박치달이가 아내를 찔러 죽인 죄로 불원간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 관아로 들어가서 알아보니 평소부터 부부간 의가 좋지 못했던 데다가 시체에 꽂인 칼이 박치달의 것이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어서 꼼짝못하고 사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천성이 충직하고 의협심이 강한 길천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길로 군수에게 자수하여 계집을 죽인 사람은 자기라고 말하고 나서 다시 전후사정을 일일이 고백하였고 동시에 증인으로 박씨집 종계집애를 신청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님은 그 즉시로 군로 사령을 보내어 종계집을 붙들어다가 문초해본 결과 죽은 안주인이 늙은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길천을 유인했다는 것과 그날 술에 취한 주인을 안방으로 끌어다 눕히고 옷고름에 장도가 매달려 있는 두루마기를 건너방으로 들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듣게되었고 따라서 모든 죄는 죽은 계집 홍씨에게 있을 뿐이요 박 치달이는 애매하고 길천은 의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두 사람을 동시에 석방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