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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산돼지의 인연

by 양화산장 2018. 7. 6.

고구려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후 우씨는 음란한 생활을 계속하며 시동생인 산상왕을 사랑하여 왕으로 하여금 다시 왕후를 맞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일시 국내가 소란하여 한나라 요동태수의 군사력을 빌려다가 국내에서 남은 형제간에 싸우는 등 추태를 부리었다.
산상왕은 왕후 우씨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사실상 정치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였다.
형수를 데리고 사는 몽고풍속이 어느 틈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산상왕으로서는 항상 사랑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뿐아니라 왕은 왕비 우씨 이외에 다른 여성을 상대하지 못하게끔 되었다. 그런중 왕후 우씨의 몸에서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없어 산천에 기도들이게 되었다. 그럴수록 왕비 우씨는 이미 나이 많아 아들을 낳을 가망도 없어졌다.

어느날 왕은 사냥하러 교외로 나갔다 마침 그 앞으로 산돼지가 뛰어가는 것을 보자 왕과 시종들은 일시에 뛰어갔다. 고구려의 준마를 타고 쫓아가는 만큼 웬만한 산짐승은 넉넉히 쫓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산돼지는 빨라 능히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래도 고구려 무사들은 죽을 기운을 내가면서 따라갔다.
이럭저럭 십리길이나 뛰어갔을 때 어느듯 개금촌이라는 촌으로 들어갔다. 산돼지가 촌으로 뛰어가므로 사람들은 모두 쫓아가며
『달아나는 산돼지를 잡아라』
하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감히 그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조그마한 촌집에서 여자 한사람이 뛰어나오며 소리질렀다.
『무엇을 그러는거요?』
『저기 뛰어 가는 산돼지를 생으로 잡아야 한다.』
『그까짓 것을 무얼그래요』
하며 여자는 팔뚝을 걷고 힘있게 좇아갔다. 이 여자야말로 시골서 자라난만큼 남자보다 잘 뛰었다.
뛰어가 앞을 딱 막고 두팔을 벌리었다. 뛰어온 산돼지는 기진맥진하였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것을 본 일행은 모두 환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여자는
『수십명의 무사들이 이러한 짐승 한마리 잡느라고 뛰어다니오』
하고 야유하듯 생긋 웃었다. 모두 그 여자를 쳐다보니 비록 시골 사는 촌색씨지만 나이는 20여세쯤 보이며 얼굴은 희고 명랑해 보였다.
『미안하오, 촌색씨 아니었더라면 못잡을 뻔하였소』
대답할 때 그 여자는 조그마한 자기집으로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산돼지를 둘러메고 임금 있는 곳으로 왔다. 국상 고우루가 어전에서 산돼지 잡은 이야기를 상주하며 개금촌의 여자아이가 앞질러 잡아주었다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이상스러운 듯이 생각하며 어딘지 모르게 미지의 촌녀를 보고 싶어하였다.

그날밤 왕은 개금촌녀를 찾기 위하여 밤에 몰래 미행하였다. 오늘 낮에 그 집을 잘 보고 온 어가를 모시고 다니는 부장을 앞세우고 바로 그 집으로 찾아갔다. 집은 촌집으로 안방과 건너방이 있을 뿐이다. 부장이 밖에서
『어가의 행차시요』
하고 가만히 주인을 불렀다. 문이 열리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낮에 산돼지를 좇아 잡아준 여자이다. 부장이 가만히 임금에게 일러바치었다. 왕은 달빛 어린 곳에 여자를 보니 지금까지 궁중에서 보던 궁녀보다 월등하게 잘생기었다. 알지못할 사이에 군침이 넘어갔다. 부장은 다시
『어가요』
하자 여자는 조금도 수줍어하지 않고 앞에서 읍하고
『황공하오, 누추한 집에 찾아오시니 무슨 잘못이라도 있아온지』
하며 안으로 안내하였다. 목소리 더욱 고와 왕의 마음은 우선 흡족하였다.
그 방으로 들어서 살펴보니 비록 촌가라 하지만 깨끗하게 치워놓아 청결하게 보이었다. 소녀는 즉시 일어나 왕 앞에 날아갈듯이 절하였다.
『오! 네가 오늘 산돼지를 잡아주었다 하니 감사하다. 치하하러 왔다.』
왕의 말은 들은 촌녀는 공손히 꿇어앉아
『황은이 망극할 뿐이요. 모두 폐하의 선정의 덕택인줄 아옵니다』
고운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는 더욱 명랑하게 들렸다. 부장은 밖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을 뿐 들어오지 못하였다.

밤이 이슥해진 후 왕은 다시 촌녀가 기거한다는 침실로 안내되었다. 이 방은 처음에 들어온 안방보다 더 작으나 청결한 점은 더 났다. 한 구석에 놓인 등잔불은 고요히 비추어줄 뿐이었다. 왕은 모든 체면을 잊은 듯이 촌녀를 자기 앞으로 바싹 내리끌었다. 수줍은 듯한 촌녀는 고개를 숙인채 끌려내왔다.
『어서 금침을 펴도록 하라.』
점잖은 말을 하였으나 촌녀는
『안되오. 아무리 왕명이라 하지만 후일을 기약치 않으시면 이행키 어렵습니다』
하고 슬그머니 거절하였다.
『네말이 더욱 아름답구나.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느냐.』
『고구려에는 남자들만이 씩씩한 것이 아니오라 여자들도 씩씩하오이다.』
『응 그렇다. 뒷기약이 무엇이냐.』왕의 물음에 대하여 촌녀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다시 수그렸다. 곱게 빗은 머리는 옻칠한 듯이 검으며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성숙한 여성에게서 나오는 체향은 더욱 왕의 마음을 뇌살할 지경이었다.
『상감, 만일 소신이 다행히 아이를 가지게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그것이 뒷날의 기약이로소이다.』
『허 네말이 맞는다. 근처도 가기전에 아이를 낳을줄 아느냐.』
촌녀의 두 볼에는 무안해서인지 붉으레하여 연분홍 도화색이 돌고 있다.
『대왕이시여, 소녀의 몸에서 왕자를 낳으시면 소녀를 잊지마시요.』
『그래라.』
왕의 한마디 말이 중요한지 그때야 금침을 펴놓았다. 왕은 스스로 옷을 벗고 멸등한 후 나의를 걷우었다.

오랜 환락의 시간이 흘러갔다. 밖에서 부장이 환궁할 것을 재촉하였다.
『차비하여라.』
한마디하고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촌녀는 부끄러운 듯이 먼저 일어나 등잔불에 부시를 대어 겨우 켰다. 방이 환하자 왕의 눈앞에는 촌녀의 백옥같은 흰살이 풍염하게 보이었다. 더 한번 어루만져 주고 싶었으나 무서운 왕후 생각이 나서 그대로 나왔다. 촌녀는 다만 말없이 왕의 행차를 배웅할 뿐이었다.
벌써 밖은 새벽이 거의 되었는지 북두칠성이 서쪽으로 기울고 먼 곳에서 닭우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말 위에 앉은 왕의 머릿속에는 조금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늙은 우씨왕후의 몸에서 경험치 못한 비밀의 도원경을 헤맬때 생생한 인어는 활발하게 꼬리를 치며 손아귀로 들어오는 듯 남남한 촌녀의 이야기소리는 몽환경을 더듬듯, 모든 것이 화려한 춘몽같았다.
다음날부터 왕은 새로운 정신이 드는듯, 음식까지 입맛에 붙는 듯 하였다. 그후도 다시 개금촌으로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왕후의 감시가 심하여 감히 생각조차 못하였다. 그래도 때때로 그리워지는 심정은 금할 수 없었다.

다음해 봄 삼월이 되자 벌써 그동안 넉달이 지났다. 이때야 왕후의 귀에 왕이 개금촌으로 사냥갔다가 촌녀의 방에서 쉬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순간 왕후의 몸에서는 불길 같은 질투의 마음이 용솟음쳤다.
『그런 년은 즉시 죽여 없애야 한다』
한 후 왕후의 심복 장수와 병사 몇 명을 그 촌으로 내보내 죽이라고 하였다. 촌녀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남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자객은 촌녀의 뒤에서
『어명을 받아라』
하는 소리를 크게 질렀다. 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하였다. 전부터 산이나 평지를 잘 뛰어다니는 만큼 웬만한 남자는 따라오지 못하였다. 그럴수록 군사들의 수는 더욱 많이 따라왔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잡히게 되자 그녀는 뒤로 돌아서며
『지금 너희들이 나를 죽일려고 좇아오는 듯 하다마는 대체 누구의 명령이냐 그것이나 알고 죽자』
하고 딱 버티었다.
『왕후의 명령으로 죽이러 왔소』
하고 어느덧 머리를 수그렸다.
『안될말이다. 왕후의 명령은 받지 못하겠다. 상감의 어명이면 죽여라.』
또 한번 팔을 들고 섰다.
『상감의 명령이오』
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냐. 그러면 나를 죽여라. 어명은 삼가 복종하겠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몸에는 대왕의 분신이 들어있다. 나의 생명은 관계없지만 너희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왕자까지 죽이러 드느냐.』
이 말에는 모두 어리둥절하여 여자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병사를 인솔한 장군은 그대로 돌아갔다. 즉시 왕에게 사유를 상주하였다.
한편 왕은 지난 겨울 일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라왔다. 단 하루밤의 일로 넉넉히 왕자가 나오다니 희귀한 일이다. 혹시 행실이 그른 여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이나 왕후의 승인을 받은 후 그날밤으로 개금촌녀의 집으로 나갔다.
촌녀는 두번다시 왕을 만나게 되니 반가움이 앞서 문밖으로 뛰어나오며 상감의 손을 마주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전날 그녀가 쓰던 방이다. 방의 구조는 전과 다름이 없으나 모든 것을 두번 대하게 되니 어딘지 모르게 기뻤다.
촌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왕은 덥썩 그녀를 안아 자기 앞에 놓았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왕의 물음이다.
『소녀의 이름은 후녀라 하오』
『후녀, 후녀라니 무슨 뜻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첩의 어미 소녀를 회임할 때 무당의 말이 이번에 딸을 낳으면 왕후를 낳을 징조라 하였다 하오. 그래 소녀를 낳자 이름을 후녀라 지었나이다.』
『오 그러냐. 그럴듯한 말이다. 들으니 홀몸이 아니라고 하는데 정말이냐 어디좀 만져보자.』
그래도 후녀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왕은 한번 후녀의 마음을 시험코자『지금 네가 회임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다』
할 때 후녀는 정색하고 나서 씩씩한 태도로 엄숙하게 대답하였다.
『신첩은 평생에 형제간에도 동석하는 일이 없었소. 하물며 다른 남성을 가까이 할 수가 있겠소. 이 속에 있는 아이는 대왕의 아이요.』
그녀의 태도에 왕은 다시 후녀가 사랑스럽게 보여 다시 금침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해 9월에 후녀의 몸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교외에 나가 산돼지를 잡다가 얻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교체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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