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보름날 밤이면 황룡사 오층탑을 돌면서 자기 소원 세 가지를 외우며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 그 해가 가기 전에 그의 소원은 고스라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명 처녀는,(이 나라를 흥하게 도와 주소서)
(우리집 부모 형제에게 많은 복을 주소서)
(그리고 이 몸에게, 좋은 낭군 한분을 점지해 주웁소서)
이렇게 세 가지 소원을 입속으로 외우면서 그 탑 둘레를 두 번 돌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서 세 번째 돌고 있는데 뜻밖에 반대쪽으로 돌아오던 웬 무사 한 분과 서로 마주치었다.
서로 주춤하는 동안에 두 남녀는 시선이 부디쳤다.
동시에 속으로
『어머나!』
소리를 치면서 쳐다보는 순간에 그만 만명 처녀의 정신이 깜박했다.
갑자기 오층탑 옆을 돌다가 우연하게도 만난 처녀와 무사.
그들은 서로 못볼 사람을 보았을 때처럼 얼른 고개를 수그리고 탑을 끼고 돌았다. 그런데 피차 모르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전에 서로 만나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일은 비록 없지만 바로 저 처녀가 누구며 저 분이 누구라는 것은 벌써 짐작하었다.
두사람은 그냥 말없이 헤어지고 말았지만 헤어진 뒤에 똑같이 두근거리는 가슴은 좀체 누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어찌 그 뿐이랴.
그 다음 다음날 밤-
만명은 아무도 오라는 이 없었지단 웬일인지 그리로 자꾸 가고만 싶은 충겨에 끌려 여전히 시녀 하나를 데리고 황룡사로 나갔다.
그리하여 또 오층탑을 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전날 그 자리에서 세번째 돌던 순간을 같이하여 서현공자 그이를 다시 만났다.
오며 가며 부딪친 두 사람의 눈길. 그것은 역시 기대할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미리 약속이나 하였던 것처럼.
반가운 생각같 아서는 당장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말없이 돌아서려 하는데 서현은,
『만명랑! 여기서 또 만났구려!』
이렇게 먼저 말을 건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어라 대답해야 좋으랴! 아무 잘못한 일도 없지만,
『서현 공자, 미안합니다』
이렇게 모기 소리처럼 대꾸를 했다. 이때 그는 또 한번 서슴치 않고
『만명! 내일저녁 여기서 또 만나주시렵니까?』
하고 대답하게 물었다.
그런데 만명도 그 보다 못지 않은 용기를 내어,
『그리 하오리다』
만명은 자신도 어디서 그렇게 대담한 대답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서현은 유유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내일 밤 이맘 때 나와 기다리지요』.
한 마디 순순한 대답을 남겨 놓고 돌아서 가는 그의 걸음소리는 뚜벅뚜벅 없이 섰는 만명의 귓전을 울리어 주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돌아온 만명은 밤이 깊도록 찬란한 공상으로 정신이 맑았다.
때문에 전전반측하면서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애써 잠을 들기 위하여 눈을 감아도 보았으나 만명의 가슴속에 짙은 그의 그림자는 얼른 가실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다음날 저녁…만명랑은 미리 약속한시간과 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서현공을 만났다.
『만명, 정말 오셨구려!』
『아이, 공자님도 오셨구만요』
서현은 서현대도 마음이 든든했지만 만명은 만명대로 십년지기의 젊은이를 만났을 때처럼 마음이 푹 놓였다.
임을 그리워 찾는 이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 대담한 힘을 불러 주는지 몰랐다.
옛날부터 성현들은 남녀 칠세에 부동석이라 했는데 하물며 신라 왕가의 진골집 처녀로서 이처럼 아닌 밤중에 남의 이목을 속여가며 사내를 만난다는 사실!
만명으로 말하면 적어도 신라 갈문왕가 선마로(입종)의 아드님 숙흘만로(화흘종)의 외딸로서 금이야 옥이야 귀엽게 자라난 처녀가 아닌가! 그러한 진골집 처녀를 이런데로 꼬여내어 사랑을 속삭인다는 잘못을 만일, 누가 안다면 당장에 벼락이 내릴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설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못 보고는 못 견딜 만명을 만나고야 만다는 서현의 가슴에는 아무도 끌 수 없는 불이 붙었다.
『만명』
『예』
『나는 얼마나 만명이 그리웠는지 모르오. 그렇지만 막상 이렇게 만나고 보니 아무 할 말이 없구려…』
하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저도 그렇사와요. 이렇게 저를 예까지 불러주시니 정말 고맙사와요』.
하고 똑똑한 답례를 드렸다.
『그런데 만명랑』
『예』
『이렇게 여기서 세번째나 만나지 되는 것도 우연한 일일까요?』
『마음에 켕겨 서로 나와 만난 일…그것이 우연이란 까닭이 있겠어요』
어느듯 잔디밭을 요 삼아서 옆에 앉은 만명의 말랑말랑한 손목을 잡아 당겨 만져도 만명은 아무 소리 없이 그의 오동통한 손길을 쥐인체로 맡겼다.
『그러다가 만일 이런 일이 발각되는 날, 우리 두사람은 어떻게 되지요?』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를 다시한번 건들여 보았을 때 만명은
『걱정할 것 없잖읍니까! 마음 있는 사람끼리 서로 만났다는 것쯤 이것이 죄라면 세상에 죄 안 짓고 살 사람이 없을 것 아냐요!』
하고 분명히 대답했다.
왕가의 귀여운 외딸로 태어난 만명은 벌써 열여덟살 한창 때의 쳐녀로 위치할 때까지 어느 누구의 구애도 압제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죠. 나는 나대로의 굳은 뜻이 있으니 장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의 정은 서로 변치 말도록 합시다』
하면서 속시원하게 오가는 정에 이 밤의 깊어가는 시간은 아쉽도록 흘렀다.
그 뒤에도 둘은 자주 만났다.
이제는 정말 둘은 일시를 떠나서는 못살 것만 같았다.
따라서 둘은 멀지 않은 장래에 천하없는 일이 있더라도 기어이 결혼해야 한다고 그의 깊은 가슴에 다짐을 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불타는 사랑을 그냥 될대로 잘 되라고 내버려 둘 까닭이 없다.
더구나 진골집 미녀로서 이름난 만명에게는 날마다 혼담을 갖고 드는 매파들의 출입에 문턱이 달았다.
무남독녀 외딸이니 알맞는 혼담을 맞기 위하여 온 정신을 팔았다.
그런데 하나 걸려 든 것이 바로 원덕 총각이었다.
원덕은 만명 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스무살인 미남으로서 역시 똑같은 진골집 귀공자가 분명했다
집안이 훌륭하고 또 부자인데다가 워낙 공부를 많이 하여 벌써 문명이 높은 총각이니 신랑감으로서는 다시 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먼저 만명을 보고 그런 말을 전했더니 만명은 들은 척도 없이 뾰족한 대답 끝에 짜증까지 내었다.
『어머니더러 누가 그런 걱정하래요?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으니 내버려두세요』
귀엽게 기른 딸인지라 어머니도 어렵잖게 여기는 만명은 대번 이렇게 일축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은 아버지 숙흘마로 까지가
『애 만명아, 너도 듣거라. 남문안 대가로 이름난 원덕 총각으로 말하면 그의 가문으로 보든지 세도로 보든지 또 신랑 본인의 인물로 따지더라도 하나 흠잡을 데가 없구나. 그래서 아버지는 그리로 혼처를 정하기로 했으니 너도 그리 알고 있거라』
하고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나 장본인인 만명은 거침없이,
『아버님, 소원입니다. 제 걱정일랑 아예 말아주시요…좀더 두고 봐야 되겠어요』
하고 듣기 좋게 거절했다.
『아니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어련히 사람을 잘 보았으리라구··걱정 말라니 뭘 말이냐……아무 소리말고 아버지 말만 들어라』
『안 되겠어요. 아버님이 제 소원을 정녕 안들어 주신다면 전 저대로 딴 생각이 있어요』
『딴 생각이라니? 너 그게 무슨 소리냐……응? 아니 아비가 가라면 가는 거지. 그거 누구한테 배운 버릇이냐 응…』
하고 화를 내며 야단이지만, 만명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화를 내셔도 할 수 없어요. 저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깐요』
하고 한술 더 뜨니 아버지는 설락 앉을락하면서 보다 더한 노염을 샀다.
그러나, 이미 날짜까지 정해버린 노릇을 이제 어떻게 물릴 수가 있으랴.
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 달 남짓하기 닥쳐오는 혼인 날자 때문으로 서두르는 잔치 준비에 딴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만명은 이 사실을 서현에게 전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달아나거나 죽거나 간에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고 굳은 결심까지 보였다.
이 말을 들은 서현이는
『만명, 나는 진골이 아니라 범골이어니 뼈다귀가 모자라는 것을 난들 어떻게 하오』
신라에서 지독스레 찾는 진골 범골의 양반제도에 난다긴다하는 서현이건만 거기에는 그만 그도 굴복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만명은 새파랗게 서릿발을 세우면서
『그까짓 진골이 무엇 말라빠진 거예요. 나는 당신을 죽을 때까지……아니 저승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해요……네』
하면서 서현의 앞 무릎에 머리를 틀어박고 흑흑 느껴 울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닥쳐오는 혼인날의 시간을 무슨 재주로 붙들어 매랴! 죽기만치나 싫은 원덕랑과의 결혼! 그 결혼을 여지없이 물리치기 위하여 최후로 한가지 결심을 했다.
(그래 도망을 가자!)
이렇게 한가지 마음으로 결단을 지으니 그 뒤에는 되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드디어 결혼 날은 다가왔다.
적어도 숙흘마로의 마님 잔치라 하여 신라 모두가 온통 뒤집히도록 법석을 했다.
그런데 이것을 어찌하나!
이 집에서 뜻밖에 일이 하나 툭 터지고 말았으니 이것은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날의 주인공인 만명의 그림자도 찾을 길이 없다는 게다.
이 보다 더 큰 청천에 벽력이 어디있으랴!
이때 신라 풍속에 신랑을 맞는 날은 신부는 자기 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모 고모 또는 언니같은 친척집에 일시 몸을 피하였다가 저녁이 되면 칠보단장 다 꾸미고 녹의 홍장으로 성장한 신부가 여러 하녀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신랑이 들어있는 신방으로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만명도 이날 고모님댁에 하루종일 머물러 있게끔 되었는데 그는 누구보다 명랑하게 말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 맞는 신랑을 기다리듯이 흡족한 기분으로 주위의 분위기를 어울려 주었다.
이것은 이날뿐이 아니라 혼인날이 가까워 오는 벌써 몇일전부터 취해오던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 다 안심한 그들은 이날 만명을 돌보는 경계심을 마음놓고 풀었다.
그 틈을 타서 만명은 살짝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신부 집안은 온통 난리가 났다. 동시에 산지 사방으로 날쌘 장정들을 줄을 달아 보냈다.
만명이 갈만한 곳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만명 처녀는 기어이 호랑이 같은 장정들의 손에 붙들려 집으로 돌아와 완고한 철창안에 감금되고 말았다.
한편 서현은 전 생명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을 오직 자기 처지 하나가 범골이기 때문에 필경은 이 꼴이 되는구나 생각이 나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라고 단념을 했다. 그러나 저러나 두고 두고 그저 분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그런데 또 갑자기 서현이가 일약 만로태수의 외직으로 제수되어 당장 도임 행차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서현은 백제와 고구려 접경을 지키는데 있어서 지금까지 세워진 공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렇기 땜에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후이 사서 만로태수로 제수하였던 바로 그는 혼연히 마차에 몸을 싣고 만로군 오늘의 충북 진천을 향하여 신나게 달리었다.
그래도 한 구석 아쉬운 것은,
(이런 때에 만명 처녀가 내 아내로서 내 옆에 타고 같이 가면 좀 좋으랴!)
꿈같은 생각으로 잠시 신나던 정신을 흐려도 보았다.
장대같은 빗발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금방 천지가 무너질 듯 천둥이 연발한다.
그 순간이었다 동쪽 하늘 중복관에서『꽈르릉! 지끈!』
하는 뇌성과 아울러서 벼락을 쳤다. 어마어마한 벼락 소리에 온통 천하가 뒤집힐 듯싶었다.
그러자 조금 있더니 차차 날이 밝으며 빗발을 거두기 시작했다.
말도 천천히 달리면서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제는 우뢰도 번개질도 그쳤다(참 이상한 일이로군‥‥.)
생각하면서 서현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짐 속에 술이 들었지?』
『예. 마련해 왔읍니다.』
『그러면 얼른 꺼내 놓아라. 한 잔 생각이 나는구나‥.』
그래서 곧장 짐짝을 풀어 술병과 술잔을 꺼내놓고 막 첫잔 술을 들려하는데 어디서 찢어지는 소리로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현 서방님…서현 서방님….』
귀가 번쩍 뜨이길래 그리로 멀리 돌리니 저쪽에서 말을 타고 질풍같이 달려오는 여인 한사람!
『영감··저기 보십시오. 바로 만명아씨가 오시나이다.』
『응? 만명이라니?』
가까이 오자 말에서 내린 만명은 서현 태수를 보기가 무섭게,
『서현 서방님!』
하고 그의 품안으로 덥썩 뛰어들며 우선 울음부터 앞세웠다.
자기가 여기까지 쫓아오게 된 것은 간단하면서도 거기에는 우리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지엄한 신비력이 깃들이고 있었음을 알았다.
아까 천둥이 울리고 뇌성벽력이 떨어질 때 바로 그의 벼락은 만명 처녀가 갇혀 있던 철 창문이었더라 한다.
『와지끈! 파르릉!』
하면서 떨어진 벼락은 만명이 갇히운 철창문을 여지없이 두들겨 부수어서 만 조각을 만들었다. 그러나 만명은 손틉끝 하나 다친데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를 지키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없었다.
기왕 하나님의 조화로 없어진 문! 이것도 천의(天意)이어니…… 생각한 만명은 이틈을 타 번개같이 뛰어나와 길가에 놀고 있는 말을 잡아타고 여기까지 단숨에 쫓아왔다는 이야기….
『서방님…이제 저는 말 다했어요』
『오-- 그렇던가요… 참 하나님은 고맙기도 하여이다.』
만로 원님으로 도임한 서현 태수는 전고에 없는 명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그 이름도 빛났다.
만로태수로 있을 때 또하나의 커다란 선물--. 그것은 김유신이가 태어난 고고의 소리였다.
후일의 삼국을 통일하는 데 이름을 날린 신라 명장 김유신은 그 아버지 서현공이 만로태수로 있을 때 만명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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