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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천하장사 (상)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나이 열두살 때 임진왜란을 만나 여섯살난 동생을 등에 업고 산중으로 피난하여 3년 동안이나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던 길천소년은 왜군이 물러가매 고향으로 돌아와 사촌형네 집에 몸을 의지하게 되었다.
남길천은 나이 스무살에 접어들자 기운이 장정 수십명을 능히 당할만 하고 또 몸이 날래어 주로 활과 철퇴를 가지고 산중으로 다니며 사냥을 하다가 짐승가죽을 팔아 그 돈으로 어린 동생을 서당에 보내는 한편 저녁으로는 열심히 병서를 익히고 낮이면 산으로 올라가 여러가지 무예를 연마했다.
스물네살이 되매 앉은자리에서 한말 술을 마시고 고기 열근을 먹으며 활을 쏘면 빚나가는 법이 없다.

어느해 초겨울, 길천은 곰의 가죽으로 만든 벙거지를 쓰고 50근 짜리 철퇴를 차고 활을 메고 철원 보가산으로 사냥을 떠나게 되었다.
보가산은 금강산의 지맥으로서 산세가 웅장하여 하늘을 찌를 듯한 태산 준령이 첩첩이 둘리어 있고 천여만여 한깊은 골짜기에는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다.
발등이 푹푹 묻히는 낙엽을 밟고 태고와 같이 고요한 원시림을 헤치며 골짜기로 내려가니 큰 곰 한마리가 개울에 들어서서 집채만한 바위를 앞발로 번쩍 쳐들고는 열심으로 가재며 고기새끼들을 잡아먹느라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길천은 아름드리 전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활에 살을 먹여 곰의 목을 겨냥하고 쏘았다. 물의의 습격을 받은 곰은 놀래어 소리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앞발로 화살을 뽑아 꺾어버리더니 큰 몸집을 뒤뚝거리고 아래편 관목림을 향하여 내빼는 것이었다.
이때 길천은 둘째번 화살을 쏘자 화살은 곰의 엉덩이를 정통으로 맞추었다. 급한 곳을 맞은 곰은 산곡이 뒤흔들리는 듯한 고함을 지르고는 앞발을 번쩍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두리번 거리다가 사람 냄새를 맡았던지 길천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오륙간통 거리까지 왔을 때다. 길천은 철퇴를 들고 날쌔게 달려들어 곰의 골통을 겨냥하고 후려갈겼다. 그러나 곰은 앞발을 들어 내려치는 철퇴를 맞받아 넘기는 동시에 길천에게 덮쳐 들었다. 사람과 곰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다급해진 그는 껑충 뛰어 옆으로 비키면서 두번째 철퇴로 갈기었다. 천하장사의 혼신의 힘을 모아서 후려치는 철퇴에 곰은 골통이 쪼개지며 끽 소리도 못지르고는 마치 큰 고목이 넘어 가듯 퉁 쓰러지고 말았다. 단매에 요절이 난 것이다.
길천은 허리에 찼던 단도로 곰의 배를 가르고는 쓸개를 꺼내 수건으로 싸서 배낭 속에 넣은 마음 예로부터 천하일미라고 일러오는 곰의 발바닥과 등심살을 베어내어 등걸불을 만들어 놓고 구어 먹으려 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별안간 건너편 산기슭으로부터 획하고 바람이 일더니 난데없는 모래와 조약돌이 날아왔다. 깜짝놀라 바라보니 어느틈에 왔는지 상당히 큰 표범 한마리가 이편을 노려 보며 앞발을 땅에 착 붙인 채 공격태세를 취하고있지 않은가! 필연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온 것이리라.
거리가 너무 가까와 활을 쏠수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쏠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길천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꽁무니에 찼던 철퇴를 빼어 들었다.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순간 표범은 훌쩍 몸을 날러 길천의 위로 뛰어넘어 갔다가 다시 뛰어 넘어 온다. 이런 경우에 보통사람이었다면 벌써 혼이 빠져 기절이라도 하였을 것이지만 그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범의 일거일동을 살피고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문득 표범은 주홍 같은 입을 벌이고 산악이 뒤흔들리는 듯한 어흥 소리를 지르면서 또한번 펄쩍 뛰었다. 그 찰나 길천은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며 철퇴로 범의 골통을 후려쳤다. 오십근짜리 철퇴를 정통으로 맞은 표범은 단번에 대가러가 으스러져서 대뇌가 삐죽이 나오는 중상을 입고 두어번 곤두박질을 하더니 네다리를 쭉 뻗고 늘어져 버렸다.

길천은 수건으로 땀을 씻고 나서 단도로 호피를 벗겨 배낭 속에 넣고는 만일을 염려하여 철퇴를 손에 든채 오솔길을 따라 산등성이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약 삼십여간통쯤 올라갔을 때였다. 별안간 뒤에 있는 머루덩쿨로부터 맹렬한 바람이 훡하고 일어나며 불의에 큰 짐승이 길천의 어깨위로 덮쳐왔다.
그러나 철저히 주의를 하면서 걸어가던 길천였는지라 바람이 일어난 찰나 육감적으로 등뒤의 위협을 느낀 순간 획소리가 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앞으로 한걸음 펄쩍뛰었던 까닭에 간신히 맹수의 이빨만은 면하였으나 그 대신 날카로운 발톱에 등허리를 찢기었다.
만일 길천이 두꺼운 가극등거리를 입지 않았더라면 상당한 중상을 받았을 것이다.
마음 순간 몸을 돌린 길천의 눈앞에는 영맹하게 생긴 한마리와 표범이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고 질풍같이 덤벼들었다. 필시 먼저 잡은 표범의 짝패가 복수를 하기 위한 습격이었으리라.
길천은 번개같이 몸을 솟구치며 철퇴를 높이 들어 공중으로 뛰어 오는 표범의 앞다리를 후려갈겼다. 앞다리가 몽땅부러진 표범은 어흥 소리를 지르며 땅 위에 쓰러졌고 뒤미쳐 떨어진 철퇴에 골통이 두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또 한마리의 표범을 잡았던 것이다.
길천은 이마에 방울방울 맺힌 땀을 수건으로 닦고 나서 배낭으로부터 금창약을 꺼내 등허리 상처에 바른 후 표범의 가죽을 벗겨서 배낭 속에 넣었다. 이번 사냥에 웅담과 두마리 표범가죽으로 상당한 수확을 얻은 셈이다.

저녁해가 산마루위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집을 향하게 된 그는 고개 밑에 도착하여 잠시 쉬게되었다. 그런데 얼마 있자니 늙수그레한 초부가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더니
『여보 젊은 양반! 이 고개를 넘어가면 무서운 땡초 소굴이 있소. 그 놈들은 먼저 사람을 죽여 놓고 나서 물건을 빼앗는 잔인한 놈들이니 정신 바짝 차리시오』하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군소리 같지만 이 땡초라는 것은 이조중엽에 양반과 관리들의 학정에 부대끼어 가산을 탕진한 자를 비롯해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이 산중에 모여 절을 점령하고는 중이 되어 낮이면 동냥을 다니고 밤이면 도적질을 하는 불한당의무리였다.
이 말을 들은 길천은 속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었으나 초부에게 고맙다는 치사를 한 후에 다시 베낭을 짊어지고 고개 아래 약 삼십여호 가량의 동네로 들어섰다.
이윽고 드물게 조촐한 기와집 문전에 다가선 그는 오십세 가량된 주인인 듯한 사람에게 하룻밤 드새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주인은 수심찬 얼굴로
『오늘밤에 우리 집에는 도둑떼들이 오게 되었소. 만일 낯설은 사람이 그놈들 눈에 띄었다가는 당장 참화를 당하게 될 것이니 아예 단념하고 다른 집으로 가보시오』
하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도둑떼가 온다구요? 그것 참 반가운 말씀입니다. 설마 그놈들이 몇백명 떼를 지어 온다 할지라도 내가 다 쫓아 드릴 것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저녁밥이나 두둑히 먹여 주십시요』
『허허! 그 양반 참! 이곳 물정을 모르는 모양이로구려 ! 땡초 두목 무달이라고 하면 관가의 포도군관들도 꽁무니를 빼고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오. 공연히 젊은 목숨이 귀신도 모르게 죽지 말고 일찌감치 피할도리나 생각하시오』

이 말을 듣고 난 길천은 배낭에서 표범가죽을 내보이고 그날 자기가 곰 한마리와 표범 두마리를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를 하였으나 주인은 종시 믿으려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화가 난 길천은 마당가에 서있는 반아름이나 되는 배나무를 두 손으로 거머쥐고 끙하고 용을 쓰자 배나무는 뿌리 채 뽑아졌고 옆에 있는 바위를 후려갈기니 배나무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은 비로소 천하장사라는 것을 인정하였던지 사랑으로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한편 술과 고기를 차려다가 간곡히 대접하고 자기집안 형편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원래 경기도 가평사람으로서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가 이내 눌러 살게 되었다는 것과 자기에게 생질녀가 있다고 했다.
서울재상가의 금지옥엽 같은 귀여운 딸로서 신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얼마전부터 자기 집에 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산골에서는 보기 드문 절색이라는 소문은 곧 산넘어에 있는 땡초 두목 무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달은 생질녀를 제 넷째 첩으로 달라며 여러차례 공갈협박을 하므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두메속이라 어쩔 수 없이 한달 전에 생질녀가 데리고온 열 다섯살난 몸종 미련이를 거짓 생질녀로 꾸며 무달에게 시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어떻게 알았던지 무달은 그 눈치를 채고 와선 오늘밤 해시까지 진짜 신부를 곱게 단장시켜서 신방을 차려놓고 기다리지 않으면 집안 식구를 모두 죽여서 분을 풀겠다고 욱박하므로 생질녀는 도적괴수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몇번이나 자결을 하려는 것을 죽더라도 신방에 들어가서도 적에게 얼굴이라도 보이고 죽어야 우리에게 책망이 돌아오지 않겠으니 제발 우리집 다섯 식구의 목숨을 살러 달라고 애걸복걸하여 간신히 신방으로 들여보내 놓고 지금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일장 실화를 듣고난 길천은 치밀어 오르는 의분을 감출길이 없어 자기가 대신 신부노릇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술을 반동이나 마시고 돼지다리 두개를 먹고 나서 신부 방에 들어가 웃통을 벗고 불을 끄고는 깔아 논 비단 금침 속에 누워있었다.
이윽고 대문 밖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아니하여 쿵하고 마루로 올라서는 소리와 덜컹하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어? 방안이 어째 이렇게 캄캄해 !첫날밤에는 의례히 신방에 불을 밝히는 법인데… 옳지 아마 색씨가 부끄러우니까 꺼버린게로군, 원! 장차 백년해로를 할 남편인데 부끄러울게 무어람!』
몸집이 깍지둥 같이 뚱뚱한 놈이 술 냄새를 왈칵 풍기며 아랫목으로 다가오더니 덮어놓고 누워있는 길천의 젓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구린내 나는 입으로 길천의 입술을 더듬는다.
길천은 참고 그자의 하는 꼴을 보고싶었으나 자꾸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킬 킬! 하고 웃어 버렸다.
『허! 이거 변괴로고! 왼 양반의 집색씨가 첫날밤에 웃다니… 그런데 젖통이 어째 이 지경이야? 살결은 왜 이렇게 껄껄하고? 아마 이번에도 또 깜찍한 주인놈에게 속히우나부다』
『음! 껄껄한 까닭을 가르쳐주랴 이치도곤을 맞을 색씨 도적놈아! 』 길천의 쇠뭉치 같은 손이 무달의 멱살을 잡으며 주먹으로 볼치를 한 대 후려갈겼다.
『어이쿠! 이년이 사람잡는다』
무달은 젖먹던 힘을 다하여 몸을 빼려 하였으나 어느 틈에 도적의 배를 타고 앉은 길천은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동네 북치듯 함부로 갈기고치니 놈은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이 소리를 들은 수십명의 땡초가 일시에 문을 차고 달려들었다.
길천은 몸을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이놈저놈을 치고 받으며 한참동안 날고 뛰니 마당에는 열댓 명이나 되는 땡초가 줄비하게 늘어져 버렸고 무달은 틈을 타서 슬그머니 도망해 버렸다.
이에 길천은 신방에 불을 켜 놓고 주인이 차려온 술과 고기를 양껏 먹은 후 보드라운 비만 금침속이 들어가 편안히 자고 이튿날 떠나려 한즉 주인이 펄펄뛰며 붙드는 것이었다.
『괴수 무달이는 도망하였고 십여명의 졸개가 혹은 죽고 반병신이 되었으나 그 놈들이 필연코 원수를 갚으러 올터인데 만일 임자가 떠난다면 우리집은 아주 쑥밭이 되고 말 것이 아니요.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우리집 다섯 식구를 살려 주고 떠나야 되겠소』하고 때를 쓰며 매달리는 것이다.
이러니 박절하게 잡아 땔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우선 주인을 안심시켜는 길천은 그날 밤으로 도적의 소굴인 화엄사를 들이쳐서 잡혀간 몸종도 찾아오고 또 그전의 본 주인이었던 여러 여승들도 구해주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날 밤 느직이 길천은 가죽벙거지를 쓰고 철퇴를 꽁무니에 차고 뒷산을 넘어 화엄사에 도착하니 때는 자정이 가까왔다.
정문이 잠겨 있었으므로 소리 없이 담을 넘어 제일 가깝게 있는 방 앞으로 가서 창구멍으로 방안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험상궂게 생긴 땡초 한 놈이 웃통을 활짝 벗고 시꺼먼 털이 엉성하게 난 가슴에 역시 웃통을 벗긴 이십세 가량의 젊은 여승을 끌어안고 앉아선 계집의 가슴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계집의 귀에 입을 대고 무어라고 속은 데니 계집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옥 같은 팔로 사나이의 검고 굵은 목을 얼싸안으니 사나이는 이내 계집을 끼고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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