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은 당상에 높이 앉아 굽어보았다. 당하에는 당당한 문무백관이 이마를 조아리고 무열왕의 하교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왕은 수염을 한 손으로 쓸었다. 그 모양은 매우 침통함을 나타낸 것이다.
"흐음……"
숨을 들이 쉰 뒤에 입을 열었다.
"경들은 이 난국을 어찌하면 트고 나갈 수 있겠나 말 좀 해보오!"
"……"
물 뿌린 듯 조용했다.
왕은 입을 다물고 잠간 쉬었다 다시 말했다.
"백제는 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멸하려고 하고 있소. 항상 면종 배반하는 백제 그 백제가 대군을 몰아 신라의 변방을 지분덕거리더니, 올 가을에는 소천성을 침공하고 우리 성주의 목을 베어 장대에 효수하고, 우리 군사 수천명을 사살하였소. 지금 조천성은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으며, 다시 서라벌을 노리고 양산 길로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이를 어찌하며 또 누가 막겠소? 이 무도한 적국을 쳐부실 장수는 그 누구요?"
만조 백관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천성 싸움에서 수천 군사를 희생시킨 쓰라린 경험, 그 보다도 날쌘 장수를 세명이나 잃고 말았다.
무열왕은 또 다시 말했다.
"조천성을 찾이한 백제군은 인근 마을에서 양곡과 가축을 강탈하고 무고한 양민을 살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그런 금수보다 못한 적군을 응징하지 못한다면 신라의 위신이 당에 멀어지고 또한 짐은 선대왕의 영전에 보일 낮이 없소. 그래 이런 무지막한 백제군을 도벌할 충용장군은 없겠소?"
이때 한복판에 조아리고 있던 신하가 머리를 들었다.
아손 벼슬에 있는 김대량이다.
김대량은 무릎걸음으로 당하까지 나아갔다.
"대왕―."
하고 그는 이마를 조아렸다.
"우리 신라를 엿보고 허를 찔려 조천성을 탈취한 백제군은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나릴 것입니다. 포악무도한 적을 징계할 장수가 없음이 아니옵고, 있으나 등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장수만 쏜다면 능히 응징하고도 국위를 선양될 것입니다."
무열왕은 당상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물었다.
"그 장수는 과연 누구요."
"황공하오나 대왕의 부마 되시는 흠운장군이오."
"흠운?"
"김흠운은 지략이 출중하옵고, 무예에 능하오며 그의 창을 따를 장수가 없다 하옵니다. 김흠운을 낭망감으로 기용하십시요."
"흠운을……"
"백제 장수의 목을 배고 빼앗긴 조천성을 회복할 것입니다."
김흠운은 무열왕의 둘째딸 백영공주의 남편이다. 왕은 심히 괴로웠다. 백영공주와의 가례를 올린 것은 수삭 밖에 못된다.
한참 달콤한 정이 솟아 날 결혼 초기에 사위를 보내다니…… 심히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사위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나아가야 한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살려야 한다.
무열왕은 결단을 내렸다.
"흠운을 쓰겠소. 아손, 흠운에게 낭당감의 벼슬을 주고 군사 삼천명을 따르게 하오."
김흠운은 아손 김대량의 천거로 백제군과 싸우는 총지휘 낭당대감이 되었고 무열왕은 이를 승낙하였다.
싸움터로 떠나는 날이다. 흠운장군은 아버지 달복과 아내 백영공주와 작별의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님, 소자는 늙으신 아버님을 모시지 못하옵고 왕명을 받들어 출전하게 되어 심히 괴롭읍니다."
"나가야지, 나가라. 흠운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라. 대왕께 충성하고 도탄에 빠진 겨레를 건지는 것이 우리 신라의 정신이니라. 나는 노물이 되어 쓸모가 없는 인생이 되었지만 너는 젊은 혈기로 나를 대신하여 충성을 다해라. 백제군을 물리치고 조천성을 도루 찾아 백성들이 안정하도록 하여라."
아버지 달복은 아들 흠운의 출전을 격려하고 목숨을 바치고 조천성을 탈환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진정 장군의 아버지다운 태도였다.
흠운장군은 그러한 아버지가 우러러 보였다.
"소자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으나 만약 죽게 되면 소자의 아내가 아버님을 모실 것이오니 낙심치 마시옵고 몸을 보조하사 장수하옵소서."
흠운은 아버지께 작별을 고한 뒤에 후원에 나아가 선조의 사당에 절을 하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허리에는 칼을 차고 손에는 장창을 들었다.
이때 백영공주가 땅에 엎드리고
"서방님……"
하고 남편 흠운을 불렀다. 흠운장군은 백영공주를 굽어보며
"공주, 나라의 부름을 받고 떠나야하니 슬퍼 말고 가사를 잘 보고 늙은 아버지를 공경하오."
"장군……이번 나가오면 다시 살아선 뵈옵지 못할 것 같아 눈물이 나와요. 백제군은 많고 또 사나와서 나가는 장수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그런 무서운 사지에서 어찌 살아오기를 바라겠어요. 소첩은 눈앞이 캄캄하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요. 서방님……싸움에 임함은 장수의 도리이겠지만 죽으러 나가야 한다는 뜻을 소첩은 알지 못하겠어요. 더구나 우리가 석달전에 맺어진 인연이고 보매, 단백일을 채우지 못한 채 소첩은 과부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게 되지 않겠어요? 서방님 소첩의 앞날을 생각하신다면 이번 싸움만은 나가지 말고 다른 장수이게 맡기고 그만두셔요."
"무슨 소리, 내가 나가지 않는데 또 누구에게 맡긴단 말이요. 상감께서 내리신 엄지를 신하로서 어찌 거역하며 상감께서 신임하고 내리신 소임을 어찌 사양하리오. 나는 큰 일을 위해 작은 일을 버리겠고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쳐 신라무장의 본분을 지킬 각오요. 또 이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소."
백영공주는 갑옷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서방님……소첩이 부왕께 아뢰어 다른 장수를 쓰도록 하겠아옵니다. 서방님을 잃는다면 하늘이 무너지는듯 인생이 막막하여 어찌 살겠어요? 서방님 소첩의 불운을 깊이 통찰하시고 이 갑옷을 벗으소서."
공주는 울면서 호소하였다. 그러나 흠운은 성난 목소리로
"공주! 공주는 무열왕의 마님이고 이 신라장군의 아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오. 신라인의 고상한 지조를 잊어서는 안되오. 더구나 공주는 화랑인 나의 아내가 아니오.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 정신, 충의를 위해 살신하는 정신은 신라인의 자랑이요. 공주, 이 길을 막지 말고 웃으면서 보내주오."
그러나 공주는 듣지 않고
"나가시려거든 먼저 소첩을 베고 나가세요."
호소하였다. 흠운장군은 한발작 뒤로 물러서면서 긴칼을 빼어들었다.
"에잇!"
소리를 지르며 칼을 내리쳤다. 공주는 눈을 감았다. 죽이라고 목을 늘이었다. 흠운장군이 내리친 칼은 사당 앞에선 큰 나무를 찍었던 것이다.
이때 대문 밖에서 함성과 군고소리가 들렸다. 삼천명의 군사가 흠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공주 잘 있소."
한마디 남기고 뛰어나간 흠운장군은 백마에 뛰어 올라 탔다.
"가자! 양산으로 가자!"
가을 햇살은 따가왔다. 양산길 좌우에는 오곡이 싯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신라 군사들은 먼지를 휘날리면서 격전지를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다.
백마에 높이 앉은 흠운장군의 투구와 갑옷은 햇살을 받아 번쩍번쩍 빛이 났다. 흠운은 뒤따라가는 전지부장을 돌아보며
"을천성은 저 산 넘어에 있는데 여기는 왜 사람이 없을까 농군들은 어디로 갔을까?"
"백제군에 쫓겨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답니다. 그래서 초가집마다 비어 있음지요."
"이제 가을도 한창이니 겨울이 오기 전에 적군을 몰아내야지. 곡식은 새들이 쪼아먹고 사람은 산 속에서 굶고있으니 빨리 탈환해야지."
전지는 그렇다고 수긍하며 앞을 가리켰다. 한때의 군사들이 먼지를 날리며 오고 있었다.
"백제군사들이 이리로 달려오고 있소. 구름때 같이."
"흠……이제야 나타났군, 저 놈들을 도륙하고 조천성을 탈환해야지."
흠운은 이렇게 말하고 군사들에게
"자 싸움은 다가왔다. 제장 제졸은 겁먹지 말고 내 뒤를 따르라."
수천군사는 호응했다.
그리고 질풍 같이 달리는 장군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저쪽 편에서도 고함을 지르면서 백제군이 쏟아져 온다. 백제군사는 육천. 신라군은 삼천이다. 양군은 양산길에서 마주쳤다. 육박전이다.
"와아, 와아……"
함성을 질렀다. 마상에서 거꾸러지는 군사, 창과 창이 부딪친다. 칼과 칼이 부딪친다. 사생을 결하는 판국에서 군사들의 눈동자는 피로 물들었다.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달 없는 어둠 속에서 귀곡성이 울려퍼졌다.
아침이 되었다. 신라군은 더 나가지 못하고 백제군에게 포위되었다. 죽은 군사들의 시체와 피로 논밭을 시뻘겋게 물들었다.
불리하다고 생가한 흠운장군은 혈도를 열고 군사들을 철수시켰다.
"장군, 숫적으로 당하지 못하겠소, 더 싸우지 말고 서라벌로 돌아갑시다."
전지의 말이다.
"저놈들은 원기 왕성하고 우리는 사기를 잃고 있어! 신라군은 겁이 많고 목숨을 아끼고 있는게 험이요. 백제군을 무서워하고 있단 말야."
"백제군은 강하고 우리군사는 약하여 퇴각한 겁니다. 장군! 다시 싸워도 승산이 없으니 돌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슨 소리! 나는 서라벌을 떠날 적에 맹세했소. 살아서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그런데 이런 꼴로 비실비실 돌아가 상감과 부모처자를 어찌대하겠소 전지! 낙담을 말아요. 한가지 좋은 계교가 있으니 전지만은 나를 따르오."
"물론 소장은 장군과 함께 죽고 살 것입니다. 그 계교란 무엇입니까?"
"나아가 백제군을 치는 거야."
"군사들이 따르지 않읍니다. 백제군이라면 겁을 먹고 싸우지를 못합니다. 우리 군사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읍니다."
"떨어진 사기를 올려야지, 그래서 우리 둘만이 나아가 싸우자는 거요. 알겠소?"
전지는 흠운의 심중을 헤아렸다.
"장군 같이 죽사오리다!"
"아니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거지, 우리는 적 대장의 머리를 따가지고 돌아오는거요."
말을 마친 흠운장군은 긴 창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내달았다. 이를 본 전지도 긴칼을 뽑아들고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날 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신라군 진에서는 장을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후에 백마와 황색말이 돌아왔다.
백마의 꼬리에는 흠운이 달렸고 황색말 꼬리에는 전지의 머리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피투성이의 수급!
군사들은 베어진 머리 두개를 놓고 울었다.
"장군, 장군, 눈을 감으시요. 장군, 부릅뜬 눈! 노하셨읍니까. 군사들이 겁을 먹고 싸우지 않는다고 노하셨읍니까."
그러나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군사들은 떨쳐 일어섰다. 백제놈을 다 잡아야 한다고 맹세했다.
사기를 회복한 신라군은 양산길에서 적을 무찌르고 쫓아서 기어코 조천성을 탈환하였다.
싸움이 지나가자 백성들은 고향을 찾아 돌아왔다. 농군들은 논밭에서 추수를 했다. 그 사람들은 흠운과 전지 두 장군의 장렬한 전사를 명심하는 뜻으로 비를 세워 무공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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