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것이 수목이고 이미 1억여년 전부터 이어 살고 있으면서 지질 기후 등 입지조건이 선천적으로 불량하여 사막과 같이 황폐된 곳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산림은 인간의 손으로 파괴되고 있다.
산림의 수난과정은 나라와 지방에 따라 다르고 또한 사회발전과정에 따라 다르나 우리나라에서는 먼 고대에 산림이 사람에게는 물질적 생존기반은 되었으나 많은 원시림이 맹수의 서식처가 되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농목의 방해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교통에 장해를 주는 등 인간생활에 지장물이 되었으므로 무용지물로써 마구 벌목하거나 불을 질러 산림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구가 차차 늘어남에 따라 산림이 수렵장으로 이용되고 수실의 채취원과 월동연료의 공급원으로 인간의 의식주와 관련이 깊어지면서 생활필수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그래서 산림은 일부 특수개인에게 독점될 수 없었고 인류 전체의 공용의 대상물이 되어 사람들은 어떤 산림이라도 들어가 산물을 채취하는 무주공산의 관습이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되고 장구한 시일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유권에 구애없이 자유로이 입산하여 산물을 채취할 수 있고 그 채취행위가 당연한 행위로 여기는 관념이 온 사람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내려오고 있다.
중세기 봉건시대에는 산림이 농토와 더불어 통치권자들의 영토 탈취의 대상이 되었고 그 때부터 통치자가 산림에 대하여 관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신라시대에 벌기를 정하고 위반자를 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때에 와서는 임산연료의 자유채취로 부락 부근에 산림황폐를 초래하여 제8대왕 현종께서 산림간벌을 제한한 바 있어 소극적이나마 비로소 산림을 제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중세기 말기에는 도자기, 요업, 제염, 야금, 난방용 등 많은 임산연료가 소요되어 인가 부근의 야산 산림은 급속히 파괴되고 연료생산지가 수렵지와 같이 마침내 보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산림의 소유관념도 이 때부터 움트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에 국법으로 제지되고 있던 산림사점 금지제도는 이조에 들어와 국가의 필요에 따라 명산, 봉산, 금산 등을 지정하여 일반 국민은 이 산림에 들어가 연료채취나 작벌을 못하게 되고 왕이 왕자나 왕녀에게 시장(柴場)을 사급(賜給)하게 되자 나중에는 일부 세도가도 시장을 사점(私占)하기에 이르렀다. 숭조효성(崇祖孝誠) 사상과 풍수설에 따라 선영의 명당묘지는 자기영달과 번영뿐만 아니라 후손의 길흉화복에까지 직결되는 것으로 믿고 도성 능원묘지가 왕실에 의하여 규제 점유되니 고관 양반계급은 왕실의 예에 따르고 서민들은 고관 양반에 뒤이어 조상의 명당묘지 확보에 극성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권세가는 권세가대로 서민층은 서민층대로 분묘지를 설정하여 그 부근 산림까지 이에 예속시켜 묘지 점유가 점차 확대하여 감으로써 산림 소유가 표면화되었다. 이 때 소유형태는 자가의 규제나 묘지 등 연고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소유관념은 재산으로서 후손에게 상속은 되나 조상에게 헌납한 재산으로 여겼을 뿐 수실, 낙엽, 연료 등 임산물의 채취이용은 공산관습이 이어져 묘직을 중심으로 지원주민들이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이 때는 산림이 국민의 월동연료 해결뿐만 아니라 시목을 채취판매하여 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사업에까지 기여했으나 산림의 귀함을 느끼지 못했고 산림 황폐의 도는 날로 심해갔다.
산림보호는 이조 때에 와서 궁정, 도성 주변, 사산, 능원 또는 봉산, 금산에 한하여 보호에 대한 령이나 교지, 하명이 있어 그 산림 내의 벌목은 그 경중에 따라 태, 장, 도, 유, 사형에까지 금제조가 있어 엄히 다스려졌으나 기타 산림에 대하여는 무주공산으로 무한정 개방하여 남벌, 남채가 방치되었다.
산림해충의 주종인 송충은 고려 때에도 만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조에 와서도 만연되어, 궁정, 도성, 능원, 금산, 봉산 등 특수산림에 한하여 왕의 하명으로 관리나 호위군을 동원하여 포살토록 하였고 산화와 개간에 대해서는 금화령(禁火令)을 영포한 바 있으며 실화(失火)에 대해서도 곤장 또는 유배형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근세 산림의 수난은 왜란과 동학란 등 내외 전란으로 인한 피해도 있었지만 주로 연료 채취로 인한 피해로써 인가 부근이나 교통이 좋은 지역에 극심했고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산림수난도 점차 오지로 확대되어갔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인마(人馬)가 미치지 않은 심산 고산준령에는 처녀림, 원시림이 울창하였는가 하면, 인구가 조밀한 부락 부근에는 이때부터 독나지(禿裸地)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조 말엽에는 고산 오지 미림을 일부 극빈자와 파산자 그리고 정치적 은신자들이 입산하여 방화소각한 후 화전을 만듦으로써 임상을 파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국경지대 압록강변에는 한인과 만인의 벌채업자가 등장하여 압록강 하구에 시장권을 확보하고 큰 강 유역 원시림을 벌목하여 압록강 수로를 통하여 반출 매각하였다 한다.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산림은 하구 및 강 하류변이 일부 인위적 피해지로서 침활혼효림으로 정보당 축적이 l00여㎥나 되었다 하며 그 상류 오지의 침엽수 단순림 지역은 울창한 밀림으로 정보당 무려 200㎥ 정도의 축적을 보유하였다 하니 그때의 좋았던 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좋은 산림은 마침내 인근 열강들의 이권쟁탈의 대상이 되어 1896년 러시아가 압록강 두만강의 산림벌채권을 얻어 국경지대의 무진장인 산림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대산림화사를 설립하여 용암포를 강점하고 대규모의 제재공장을 설치하여 강변 미림을 무참히 벌출하였으며 일로전쟁이 끝나자 일본이 전리품으로 러시아의 바톤을 이어 받아 독점 수탈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일본은 l906년 압록강 두만강 연안 삼림경영이란 미명아래 강압으로 한국삼림협동약관을 체결하고 통감부 영림창과 서북영림창을 창설하여 본격적으로 양대강 유역 원시림을 수탈하였다.
1908년에는 한국정부 법률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삼림법이 송포되었으나 명목뿐이고 그 이면에는 일본의 한국삼림 수탈을 독점하기 위한 발판 역할을 하였다. 그때 삼림법의 대요는 국유림 처분 및 부분림제도와 보호 그리고 국, 사유 구분을 들 수 있다. 부분림계약의 대상은 주로 일본인으로 그 조림 실적은 미미했으며 보호는 일본인이 확보한 산림의 보호가 주목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 사유림 구분이라 하겠다. 당시 무주공산의 인습으로 거의 전체 산림이 공유의 성격으로 그 한계가 지극히 불분명한 때에 임적을 신고케 하여 기한 내에 신고가 없는 산은 모두 국유로 확정하여 임의대로 처분하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어지러웠고 산림에서 연료 채취를 자유로이 할 수 있었으므로 산림의 귀함을 망각하고 수탈에 무감각 상태였던 것이다. 1916년 국, 사유 구분조사와 임야정리조사에서 나타난 당시 임상을 보면 성림지 5,480천여헥타, 치수지 7,280천여헥타, 무입목지 3,1l0천헥타로써 성림지는 북부 국경지대를 위시한 고산 오지림이며 무입목지와 치수지는 전 산림면적의 3분지 2를 차지하며 주로 부락 부근 도로변 야산이었다. 이 숫자를 미루어보아 이조 때 일부 야지에서는 땔나무감이 부족하여 벼를 베어낸 밑그루를 뽑아 말려 이용하거나 쇠똥을 말려 이용한 적이 있었다는 일화가 있음은 그 때의 심각한 황폐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한일합병 후 곧 발발한 제l차 세계대전에 전쟁물자 판매를 위하여 최대의 산림수탈을 감행하였고 전후 급격히 증가한 목재수요에 크게 부응하여 부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구한국정부의 삼림법은 한국정부의 법령으로서 민정과 시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정 3년 만에 폐지하고 36년 간 우리나라 산림을 지배한 침략 제l호 법령인 삼림령을 1911년에 제정 발포하여 광복 후까지 적용하게 되었다. 동년 또한 칙령으로 국유삼림산물 특별처분령을 내려 거의 대부분의 임목을 수의계약으로, 주로 일본업자에게 처분하여 공공연하게 임목을 벌출하였고 그 당시 벌출된 임목의 양이 연간 평균 2,000천㎥에 달하였다 하니 그때의 임상 파괴상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벌채적지에 대한 조림 등 후속조치는 법령이나 임업지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벌출된 임목은 신의주나 인천 등지에 제재공장을 유치하여 반제품을 만들어 일본 본토에 수송함으로써 목재는 농산물인 벼와 광물과 더불어 식민지 원료 공급의 중요대상품목이 되었다.
당시 임정의 기간은 양대강 유역을 비롯한 오지 미림을 영림서에서 직영 벌출하는 수탈임업과 인가 부근의 황폐임야에 대한 산림복구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사회질서가 안정되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 5대 강국 대열에 끼이게 되니 우리나라를 대륙진출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산림의 무한정한 수탈을 수정하고 황폐지 복구 등 정책의 일부를 변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파괴산림에 대한 복구사업에 착수하게 되었고 묘포를 개설하여 소나무, 곰솔, 잎갈나무 및 아카시아 묘목을 생산하여 희망자에게 배부하는 등 조림을 권장하였다. 당시 수계를 중심으로 발생한 황폐산지는 무려 200천헥타에 달하여 당시 시국 응급시설사업, 궁민구제사업, 수해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사방사업을 실시하다가 1933년에는 사방사업령까지 발포하여 국가적 법적 지원을 개척하여 산림의 수탈정책에서 산림복구정책으로 전환하려고 하였으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성과는 그다지 거두지 못하였다.
지나사변은 지역적 충돌에서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어 장기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태평양전쟁까지 유발하여 군수공업 시설용재 등 전략물자의 수요증대는 마침내 전시국가동원법까지 제정하여 다시 과벌과 남벌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군수용재의 원활한 수급을 위하여 목재통제령을 내리고 신탄 배급통제규칙을 제정하여 신탄재에 이르기까지 생산출하를 통제하였으며 조선용재 등 수요량이 배당되면 승전없이는 국토도 산림도 없다는 구호아래 허가 따위는 아랑곳없이 배당수량을 생산 납품해야 했다. 국유림은 영림서에서 후속림은 도외시하고 책임량 완수를 위하여 약탈적 작벌을 감행하였고 사유림에서는 전력증강이란 미명아래 당국의 옹호를 받고있는 조선목재주식회사, 목재조합, 산림회와 벌채대행업자로 하여금 산주의 불평이나 항의는 아랑곳없이 남벌을 자행하였다. 우리 기록에 더욱 생생한 것은 전쟁삼대자원의 하나인 유류부족을 충족하기 위하여 송탄유 생산을 위한 고송지와 송근 채취를 들 수 있다.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는 등 최후 발악적으로 장려하였고 나중에는 할당량을 메우기 위하여 생송근까지 채취, 충당함으로써 우리 산에 그나마 남아있는 소나무 뿌리까지 모진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백두산 등 고산 미림으로부터 대소 강변 야산에 이르기까지 각종 용재, 목탄을 위시하여 송근, 유피용 탄닌원료인 떡갈나무 낙엽송 수피에 이르기까지 전쟁물자 공급을 위하여 만신창이가 된 채 전래미문의 수난을 겪고 1945년 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경
광복 이전 우리나라 산림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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