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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산의 전설 - 진안 마이산 부부산(夫婦山)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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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아들 산 딸 산을 주렁주렁 낳고 금실 좋게 살아가는 어느 부부산이 있었다. 그들 부부 산은 이를테면 산신이었다.
한데 그들 부부산은 밤이면 밤마다 자꾸 얼만큼씩 자라면서 또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침 전라도 진안 고을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되었다. 그 산이 그들은 아무에게도 눈에 뜨인 적이 없었는데 만일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되면 그들의 화목하고 즐거운 일생은 끝장이 나고 만다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는 금실이 무척 좋았지만 그렇다고 말다툼 한번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편 산은 사람이 모두 잠이 든 사이에 빨리 커서 하루빨리 한양에 닿자고 하였다. 아내는 반대였다.
『여보. 그렇게 고집부리지 마세요. 빨리 움직이면 아이들이 피로할 테니까 한숨 푹 자고 새벽에 떠나 줘요.』
입으로는 그렇게 아이들을 내세웠지만 실상 아내 산의 속마음은 다른데 있었다. (보아하니 산수 좋고 인심 좋은 진안 고을인데 구름도 쉬어 가는 이 진안 고을에서 아주 눌러 살까 봐.)
주위의 산들도 아내 산을 좋아하여 새벽녘에 키를 키워서 길을 떠나라고 하였다.
허나 남편 산은 고개를 저었다.
『이 고을 부지런한 사람들이 들판으로 일하러 나오기 전에 떠나. 아낙네들이 샘가로 물을 길으러 나오기 전에 어서 커서 떠나. 빨리 일어나.』
가족을 흔들어 깨운 남편 산은 짜증을 부리는 아이들 산을 토닥거리며 앞장을 섰다. 그때까지도 아내 산은 진안 고을을 떠나기가 싫어 늑장을 부렸다.
때마침 우화산 너머 우주산에서 희미하게 먼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키를 키워라.』
남편 산은 서둘렀다.
『알았어요. 여보.』
아내 산도 이렇게 되고 보면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키를 키워 나갔다. 키를 키워야 한양으로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빨리빨리···… 먼동이 튼다.』
『알았어요··…』
허나, 산이 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래, 산이 쑥쑥 크네……』
『뭐? 산이 큰다구?』
『저봐유. 산이 커유……』
샘터에서 물을 길다 말고 아낙네들이 지껄여대는 소리였다.
아내 산이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에 그만 동네 아낙네들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순간 구름을 뚫고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올라있던 부부 산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에잇, 당신 때문에 난 망했어?』
화가 난 남편산은 두 아들 산을 빼앗고 아내 산을 발로 냅다 차 버렸다.
그리하여 오늘날 아내 산은 돌아앉아서 고개를 떨군 채 생각에 잠기게 되었고, 남편 산은 양 가슴에 아들딸을 데리고 어쩌면 지금껏 성이 풀리지 않은 듯이 그렇게 그 자리에 서있어 의젓한 기상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부부산의 이름이 마이산으로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조선 태조악가에 있는 몽금척 가사에는 산의 모양이 돛대 같다 하여 봄에는 돛대봉이라 부른다 하였고, 여름에는 녹음 속에 우뚝 솟아난 사슴뿔 모양이 돋보여 용각봉(龍角峰), 만산홍엽으로 뒤덮은 가을에는 타는 단풍이 멀리서 보면 마치 천리마의 색깔 같다고 하여 마이산이라 부른다 하였고 눈 덮인 겨울철에는 남녀 두 봉우리가 꼭 두 자루의 붓끝과 같아 저절로 시상이 떠오른다 하여 문필봉이라 부른다. 아니, 오랜 옛날에는 이 산에 사찰이 있어 고승들이 은거했을 터이니 불교에서 말하는 구산입해중(九山入海中)의 칠금산(七金山)에 마이산(馬耳山)이란 이름이 있었을 것은 또한 당연지사일 터이다.
늑장을 부려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 좌절되어 아내 산을 발로 차버린 사나이 산이기에 그 의젓한 기상이랄까 뚝심 같은 것은 늘상 마이산의 성격을 규정짓는 구실이 되어오고 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두 봉우리지만 춘하추동 어느 한 계절도 고을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은 적이 없는 변화 많은 산이 곧 마이산이다.
마이산은 먼 신라시대에 서다산(西多山)이라 불려 왔고 고려 때에는 종출봉이라 하다가 조선 초기에는 또 속금산(束金山)이라 불렀다고 하던가.
마이산에는 태조 이성계의 발자취도 깔려있는데 그가 젊었을 적 명산대찰을 찾아 수양할 때 어느 산에선가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어느 날 이성계는 신선을 만났다.
『신선께서 금 자(金尺)를 가지고 무얼 재고 있구나.』
자세히 보니 말의 귀와 같은 영험스런 산에서 신선은 삼한의 강토를 금자로 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게 비록 꿈 속이었지만 자기도 삼한을 지배하는 통치자의 꿈을 꾸어보았다.
뒷 날 이성계는 전라도 서해안을 어지럽히는 왜구를 운봉 갈재에서 맞아 대파시키고 왜장을 화살 한 촉으로 적중시켜 대승을 거두었다. 귀로에 이성계가 완산주를 편력할 때 그는 금자의 꿈을 꾸었던 마이산에 올랐다.
『오호, 이 산은 내가 꿈 속에 본 그 말의 귀를 닮은 산과 꼭 같구나』
마이산의 형태는 아무리 다시 보아도 신선이 금자를 가지고 삼한을 재던 그 꿈속의 산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즉시 산 이름을 속금산(束金山)이라 짓고는 내심 새 나라 건설의 웅지를 품고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시킨 뒤 그는 창업의 뜻을 굳힌 마이산이 영봉임을 잊지 않고 태자를 시켜 제를 올리게 하였다. 정종 임금도 선왕이 개국의 뜻을 얻은 속금산을 신하들과 함께 들러보기 위해 진안읍에 있는 성묘산 정상으로 올랐다.
『과연 저 산은 말의 두 귀를 꼭 닮았다.』
임금은 찬탄의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이곳 성묘산은 말 잔등과 같고 속금산은 말의 두 귀와 꼭 닮았습니다.』
『그것 참. 내가 꼭 적토마에 오른 것 같구나.』
임금은 속금산을 마이산으로 개칭하도록 하고 돌아갔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 산은 마이산으로 불려오고 있는 것이다.
전설과 사화(史話)의 산 마이산은 진안읍에서 서남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는 3백 미터 정도의 진안고원 중앙에 자리했는데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고 있는 두 개의 절묘한 바위 봉우리로 이뤄졌다.
동쪽에 자리잡은 봉우리는 숫 봉우리로 그 높이가 667미터, 서쪽에 자리 잡은 산은 암봉 우리로 높이가 673미터. 숫 봉우리보다 조금 높은 편이다.
산 전체가 바위로 된 이 정다운 산은 관목과 침엽수 활엽수등 수목이 자라고 있거니와 바위 속에는 비둘기 집이 있어 산비둘기들의 낙원이 되어온다. 마이산이 한 때는 피난처로서 고을 백성들의 아낌을 받아온 적도 있는데, 옛날 동쪽 숫 봉우리 꼭대기에 작은 못이 있었다는 이야기며 서쪽 봉우리 꼭대기 편편한 자리에서 샘물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피난처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기우제 장소로도 쓰인 곳이었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의 일이었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전국의 우국유생들이 속속 한성으로 몰려들었다.
전라 유생 이석용(靜齊 李錫庸)도 그 대열에 끼어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빼앗긴 국권을 붓으로나 입으로 도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5척 단구, 29세의 청년유생 이석용은 다섯 살에 천자문을 뗀 천재였다.
그는 먼저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펴기로 하고 1907년 8월 최덕일, 오병선, 허윤조, 박철규 등을 주축으로 3백여 명의 의혈남아를 모집했다. 의병창의 동맹단. 이석용이 조직한 젊은 집단 이름이었다.
의병들은 조직을 마치자 마이산으로 올라갔다. 마이산 용암 위에서 소를 잡아 산신에게 제사를 올린 그들은 저마다 조국광복의 책무를 기꺼이 맡은 자기 각오를 천지신명께 맹세했다.
그들의 제1차 목표는 진안읍 습격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고향 땅 산수 좋은 고을에 매년 일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도무지 눈감아둘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읍으로 밀고 내려가 일인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했다. 군수로 나와 있는 자를 생포한 의병들은 그 자의 팔을 잘라버리자 그 자의 주위에 있던 일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전주 방면으로 도망쳐 버렸다. 마이산은 이처럼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있던 때 희망과 결단의 의지를 심어주던 「힘의 산」이었다.
마이산 웅봉 허리에는 천황문이란 은수천이 나오는 화암굴이 있다. 넓이 2미터, 높이 1.5미터. 굴 안까지의 길이는 고작 3미터밖에 안되지만 굴 안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흘러나와 이 약수를 마시면 옥동자를 낳는다고 믿는 아낙네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 태조가 임실 성수산에서 돌아오다가 머물러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은수사는 또 그런 전설로 유명하게 되었고 은수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좌우에 수많은 탑사가 나온다. 백여 년 전 처사 이갑용이 이 산으로 수도를 하러 왔다가 마이산 밑으로 옮아가면서 하루 저녁에 한 개씩 만들었다는 기묘한 탑사는 8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이 처사가 탑을 쌓아 올릴 때 호랑이가 밤마다 벗을 해주어 30리 밖에서 주어온 암 돌과 숫돌을 음양의 원리로 쌓아 높이 5미터에 이르는 것이 있는데 탑이 비록 가늘어 심한 폭풍 같은 강풍이 불어올 때 조금씩 흔들기는 해도 아주 넘어지지는 않는 게 신기하다. 이 처사는 새끼줄과 호랑이를 이용하여 마이산 두 봉우리 사이에 새끼줄을 매고 나막신을 신고 타고 오갔다니까 틀림없이 기인은 기인이었던 모양이다.

-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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