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 동쪽으로 약 4킬로미터 지점. 청주의 명물 명암 약수터로 오르는 길에 명암못(명암호)이 있고, 거기서 방죽 거리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용정동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울창한 낙엽송 숲이 나타나는데, 이 산이 선도산이며, 그 산의 낙엽송 계곡을 마주한 곳에 부인상을 닮은 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가 곧 애기바위이다.
그러니까 조선 광해군 때 일이었다. 알다시피 광해군은 온갖 난정을 저질러 많은 충신들이 화를 입고 조정을 떠났던 시기여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나 세상을 온통 침울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었다.
선도산의 애기바위도 그 무렵의 얘기인데, 이 바위에는 한성에서 벼슬을 버리고 청주 고을에 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최참판 내외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최참판 내외는 비록 은둔 생활을 하고는 있어도 사는 것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 슬하에 한점 혈육이 없다는 것이었다.
해가 갈수록 부인 정씨의 나이는 들어가고, 부인의 몸에서는 생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도 최참관은 오히려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사는 부인 정씨를 위로하는 쪽이었다.
『부인 너무 마음 쓰지 마오. 세상이 잠잠해 지는 대로 양자를 한 놈 들입시다.』
『아닙니다 영감, 젊은 부인을 봐서라도 대를 이으셔야 합니다.』
부인은 소실 얻기를 제의하고 나선 다.
『소실이라니요. 당치도 않소. 동생 자식으로 양자를 한 놈 들이면 된다니까요.』
작첩을 마다하고 오히려 부인을 위로하는 최참판이 부인은 부인대로 또 고맙기 그지없어서 자식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계집아이처럼 훌쩍훌쩍 울던 것이었다.
하기사 노상 울음으로 세월을 보낸다고 귀한 자식이 어디서 떨어질 리도 없고 보면, 부인은 이제 남은 세월을 천지신명께 빌어 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명산대천을 찾아가 산신에게 빌기를 또 몇 해 그것도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부인 정씨가 천지신명에게 빌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해 겨울 일이었다.
부인은 길에서 허기에 쓰러져 누워 있는 웬 걸인 한 사람과 마주쳤다.
『어디 사는 뉘신 데 여기에 누워 계십니까.』
『………』
걸인은 너무 배가 고픈지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부인 정씨는 그 걸인을 가까운 객줏집으로 데리고 가 우선 허기를 면하게 해 주고 푹 쉬도록 해 주었다.
부인이 객주 집에서 돌아가려 하자 걸인은--실상은 도사였지만, 은혜 갚음으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제야 걸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도사 앞에 손을 모두었다.
『제 소원이야 자나 깨나 씨받을 아들 하나 얻는 것입지요 도사님』 도사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싶었다.
얼마 뒤에 눈을 뜬 도사는
『부인은 제가 시키는 대로 해야합니다.』
『예, 무슨 일이든지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부인은 정으로 바위를 쪼을 수 있나요?』
『예 쪼을 수 있습니다. 시키기만 하십시요 도사님.』
『호암지 뒷산 봉화대로 가는 중간 바위를 정으로 쪼아 부인 상을 만드시오.』
『그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나요?』
『물론이오. 어떤 일이 있어도 부안 혼자서 부인상을 만들어야 하고 절대로 도중에 일을 중단하면 아니 되오.』
『예. 혼자서 중단하지 않고 이뤄놓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최참판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일을 착수하였다. 약한 여자의 힘으로 바위를 쪼아 부인상을 조각한다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어서 최참판은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씨는 듣지 않았다.
대장간에서 정을 벼린 부인은 목욕재계하고 산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부인이 마악 집을 나서자 어디선가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면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렸다. 숨이 턱 턱 막히는 무서움이 일었지만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하여 중간바위에 도착하자 서둘러 정을 대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때마침 또 한차례의 뇌성병력이 치더니 비가 쏟아져 내렸다. 사방은 어둡고, 비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차게 쏟아지고,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 제대로 정을 대고 바위를 쪼을 수가 없었다. 망치는 수없이 부인의 손등을 내리 쪼아 손은 금방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쉬어서는 안된다. 쉬어서는 안 된다) 부인은 그러나 정을 멈추지 않았다. 산이 우는소리, 골짜기가 고동치는 소리를 그녀의 의지로 밀어내면서 부인은 자꾸만 자꾸만 망치를 휘둘렀다.
첫날의 작업은 그러한 각오로 시작되어 심한 상처를 입은 채 끝이 났다.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온몸에서는 열이 나고 상처를 입은 부위가 아프고 쑤셔 왔다.
『그것 보오. 이러다가 임자 몸져눕게 생겼소.』
최참판이 끙끙 앓고 있는 부인 곁에서 안타깝게 굽어다 보았다.
이튿날 다시 산에 오른 정씨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부인의 돌 쪼는 솜씨는 날을 거듭할수록 익숙해졌고 손등을 찧는 횟수도 훨씬 줄어들었다.
바위에 부녀상의 윤곽이 떠오르자 정을 잡은 부인의 손에 알지 못할 힘이 솟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뇌성벽력이 치는 일도 없었고 산이 운다거나 골짜기가 우짖는 일도 아주 없어졌다.
작업을 시작한지 99일이 되는 날 밤이었다. 부인은 괴이하게도 두 가지 꿈을 꾸었는데 그 첫 번째 꿈에 전날의 도사가 나타난 것이다.
『내일 마지막 일을 마치고 돌아설 때 한 가지 조심할 일이 있소.』『무슨 일이옵니까 도사님?』
『마지막 정을 부녀상 이마에 박아 놓고 돌아갈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아니 되오.』
『명심하겠습니다.』
도사가 사라지자 낮선 백발의 선인이 나타났다.
『그대는 지금껏 무모한 짓을 했니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잡신에게 속아 패가망신하지 말고 절대로 백일을 채워서는 아니 되네.』
『노인장,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인이 놀라 노인을 다시 찾았을 때 이미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고 더 큰 소리로 노인을 부르자 지쳐서 깨어보니 한 자락 꿈이었다.
정씨는 어느 꿈을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초지일관, 부인의 소원은 아들을 얻는 길이어서 처음 그녀에게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도사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날이 밝자 정씨는 마지막 백일 작업을 하기 위해 중간 바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 오더니 뇌성벽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 퍼부었다. 그녀가 첫날 부녀상을 조각할 때처럼 산이 울고 또다시 골짜기가 울었다.
정씨는 사방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부녀상을 찾아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정을 부녀 상의 아마에다 박은 뒤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간 바위 아래 골짜기로 내려설 제 뒤에서 사람 우는소리가 들리고 그 위에 또 산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정씨는 부녀상 일이 궁금하여 문득 뒤돌아보려 했으나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도사의 말이 떠올라 그대로 산 아래로 내려섰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그날 밤 꿈에 도사를 만났다. 도사는 환한 웃음을 웃고 부인에게 말했다.
『나는 본디 선도산 산신 이외다.』 산신은 언제부터인가 악신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악신은 중간 바위에다 혈을 정하고 자리를 잡은 뒤 자기의 관할구역을 침범해 왔다.
선도산 산신은 수 차례 그 악신과 겨뤄 싸워 보았지만 워낙 바위가 단단해서 선도산 밖으로 내어 쫓을 수가 없었다. 선도산 산신은 궁리 끝에 사람의 손으로 악신을 내어 쫓을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의지가 남달리 강한 정씨를 택하여 급기야는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하오면 약속대로 아들을 낳게 해 주시는 겁니까?』
『암은요. 부인이 내 약속을 지켜주었는데 내가 어찌 부인의 소원을 모르는 채 하리까.』
그로부터 부인은 태기가 있어 열 달이 지나 아이를 생산하니 선도산 산신의 언약대로 고추 달린 옥동자였다.
최참판이 대를 이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정씨 부인이 조각해 놓은 애기바위는 고을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후세 사람들 중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그 애기바위르 모여들었다. 부녀상의 젖가슴쯤 되는 부위에다 돌을 던져서 맞춘 뒤 아들 낳기를 축원하면 효험이 있다고들 믿었다.
-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