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경

가시나무는 굳세면서도 오래가는 사랑을 상징한다

반응형

가시나무라고 하면 제주도가 생각날 정도로 제주도에 많이 난다. 가시나무에도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돌가시나무, 참가시나무 등 종류가 적지 않다. 가시나무는 도토리를 맺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을 모두 함께 해서 참나무속(oak group)으로 말한다. 그런데 참나무속 중 상록성의 것이 가시나무아속이다. 겨울에도 잎이 멀어지지 않는 가시나무는 우리 나라 남쪽 해안지대 도서, 그리고 제주도에 나고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한다. 상록성의 가시나무 종류가 낙엽성의 신갈나무 종류와 다른 점은 도토리를 담고있는 접시(또는 종지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명, 각두 Cup)의 바깥면(외면)이 윤층으로 되어있다는 데 있다. 이곳 그림에 보이는 가시나무의 열매를 보면 짐작이 간다. 접시 안에 있는 도토리(열매)를 중국에서는 저, 모, 역두, 역강 등으로 표현하고 일본에서는 단율(동구리), 둔율로 나타낸다. 영어는 에이컨(acorn)이다.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

 

가시나무에 대한 한자명에는 돌가시나무 저 또는 굴참나무 력 자를 쓰고 있다. 붉가시나무는 목재가 붉은 색을 띄운다고 해서 혈저로 돌가시나무는 석저로 종가시나무는 철저로 나타내고 있다. 가시나무는 목재가 단단하고 강인하고 터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석 자나 철 자가 붙은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사람들이 붙인 한자이름은 과학적으로 분명하지 못한 것이 많다. 굴참나무 력 자만 하더라도 이것은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종류인데 역동부조 즉 력은 겨울에도 잎이 푸르다는 기록도 있어서 어떻게 분간해야할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일본사람들은 견 자를 『가시』라고 읽고있다. 흥미있는 일은 이 나무에 대한 이름이 우리 나라의 것이나 일본의 것이나 다름없이 『가시』라는 점이다. 이것을 우연한 일치로 말해야 할 것인가?
일본사람들은 그들의 문화 또 동부아세아의 문화에 있어서 조엽수림문화라는 것을 내세운다. 먼저 조엽수종이란 무엇인가. 대표적인 것이 가시나무 종류이다. 물론 녹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차나무 등도 조엽수종에 들어간다. 잎의 표면이 번쩍이고 짙은 녹색이며 잎은 온대지방의 낙엽활엽수종에 비하여 대체로 작다. 여름이 덥고 비가 많이 오며 겨울은 비교적 추운 곳에 이러한 조엽수림이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 유럽 지중해연안과 근동지방에 나는 올리브를 대표로 하는 숲은 조엽수림에 닮아있으나 경엽수림이라 말해서 구별하고 있다. 그곳은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고 그다지 춥지 않으며 여름이 매우 건조하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엽수림은 겨울의 추위에 대한 적응이 가장 문제이고 경엽수림은 여름의 건조에 대한 적응이 심각한 것으로 되어있다. 경엽수종의 잎은 크기가 훨씬 더 작다.

 

유럽의 경엽수림지대는 일찍이 희랍과 로마의 문화를 꽃피우게 한 곳이나 일본에서는 그들의 역사의 시작, 어느 면으로는 문화의 발달이 조엽수림지대부터라고 믿고 있다. 조엽수림문화를 한편으로 산악적 문화라고 말하고 중국에 있어서도 조엽수림문화가 성립된 곳은 서쪽에 있어서는 히말라야 남면, 그리고 중국 남부지방, 일본의 혼슈(본주)의 남반부, 큐슈(구주)등이다. 일본의 승문문화의 시대가 조엽수림문화시대와 일치한다고 본다면 그 뒤 이 숲을 불로 태우고 잡곡을 경작하기 시작한 때부터 조엽수림문화는 사실상 막을 내린 것으르 보아야 할 것이다. 본인은 역사와 문화를 공부한 사람이 못되므로 깊이 있는 것을 다룰 수 없으나 만일 일본의 지배족이었던 천황족의 시작을 동북아시아의 기마족으로 본다면 옛날 북쪽에서 말을 타고 우리 나라 남해안에 도달한 사람들이 일본 가시나무림 지대로 건너가 신의 족속으로서 문화형성에 불을 붙이고 일본민족의 핵심체가 되었다는 가설은 생각해 볼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그곳 육지를 덮고있었던 수종이 가시나무 종류였고 우리 나라의 남해연안도 이 수종으로 울창하게 덮여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시나무를 대표로 하는 조엽수림지대를 말했으나 그 핵심이 되는 곳은 양자강유역 그리고 강의 남쪽으로 보는 것은 조엽수림을 구성하는 수종의 수가 가장 많고 그 생태계가 가장 왕성하다는 데 이유를 둔다. 그곳에서 발단을 본 각종 농경양식작물의 종류가 우리 나라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엽수림지대에 정착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조엽수림지대는 바로 난온대(난온대 또는 단순히 난대) 또는 상록활엽수림지대로 말하는 곳인데 그 면적이 넓은 것이 못된다.

 

우리 나라에 억지로 조엽수림문화를 연결시켜 볼 필요성이 있고 없고는 차치하고 차나무, 대나무, 난초 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차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귤 종류와 동백은 조엽수종이고 이것이 우리 나라 민속과 문화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고 본다. 대둔산 해남사에 일지암을 짓고 동다송, 다신전을 집필하고 다문화의 성지를 만든 초의선사의 행적, 또 다의 길에 통하였고 실학의 거성인 정다산 선생, 흑산도에서 어보를 낸 정약전 선생, 보길도에서 고산문학을 꽃피게 한 윤선도 선생, 이분들과 교류가 있었든 추사 김정희 선생, 이분들은 모두가 조엽수림지대에 유배되어 광휘에 찬 업적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 선생도 그러하지만 우실령을 넘은 사람들이 만든 유배문화가 가시나무림지대에서 꽃핀 사실을 우리 민족은 잊지 않고 있다. 대흥사, 송광사, 화엄사, 해인사, 통도사 등 가시나무림대에 위치한 불교문화도 다시 한번 삼림생태학적인 시각으로 내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상록성의 참나무 종류와 낙엽성의 참나무 종류는 분포상 경계를 가지고 있다. 상록성의 가시나무가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겨울의 추위에 제한을 받는 까닭이고 북쪽의 수종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여름의 더위에 제한을 받는 데 있다. 추위에 적응된 낙엽성 활엽수종을 남쪽으로 가져오면 더운 여름에 에너지의 소모가 심해지고 그래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우리 나라 제주도의 가시나무숲은 제주도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어로행위는 옛날부터 그들의 생계에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에 필요한 것이 선박의 제조인데 이마 거대한 가시나무의 목재는 가장 알맞고 긴요한 자재였을 것이다.

 

당나라의 거유 한유서에 제주도(탐라)등 외국상선이 중국에 와서 폭행을 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것은 탐라인들이 통일신라 이후 조선술과 항해술이 능하여 중국연안에까지 나아간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재로서 가장 적당한 가시나무가 제주도에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해안에 자라고있던 가시나무는 전선으로도 쓰여져서 우리 나라의 국난을 방비하는데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몇해 전 제주도의 제일횡단도로를 지나면서 제주도에서 가장 큰 나무로 생각되는 가시나무를 본 일이 있다. 그 위풍당당한 자세에 나는 기가 죽고 말았다. 세속에 어울려서 적당히 놀아나는 추한 것들을 눌러보는 가시나무는 밖으로는 그것을 나타내지 않는 품위를 지니고 있는 듯하였다.
겸손하고 예절바르고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시나무로 되었다는 다음 희랍신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주피터가 아들 머큐리와 함께 필리먼의 집을 찾았을 때 그 집안에 겸손과 예절과 착함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남편 필리먼은 가시나무로 그리고 착한 그의 아내 보오시스를 보리수나무로 변신시켜 오래 살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희랍에는 『나는 가시나무를 보면서 말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나는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과 뜻이 같다. 행세 잘못한 사람은 가시나무를 볼 때마다 그가 천한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유럽에서는 사자는 백수의 왕이고 독수리는 백금의 왕이며 가시나무는 숲의 왕이라는 말이 있고 가장 신령스러운 영혼이 가시나무에 잠재해 있는 것으로 믿었든 풍습이 많았다. 가시나무는 『가시목』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것을 일본말로 읽어도 『가시』나무로 된다. 그래서 두 나라의 나무이름이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우리말이 건너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