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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조경수 잣나무 이야기 - 코리언파인(Korean p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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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는 줄기가 굽는 일이 거의 없고 곁가지를 고루 사방으로 뻗어 단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잎이 빽빽하게 달려서 기품을 높이고 색깔이 진해서 평범을 벗어난다. 잣나무는 정제의 아름다움으로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그 푸른 상록은 불요의 상징이고 굳은 절개를 의미한다. 줄기가 굽지 않는다는 것은 해마다 자라나는 순이 가장 높은 가지를 향해서 변함없이 자라간다는 것을 뜻한다. 약삭빠른 변절이 없고 눈치보는 타협이 없다는 것이 잣나무의 위대성이다. 송백 같은 절개를 우리의 조상들은 값진 것으로 힘주어 말했는데 잣나무를 보고서는 누구라도 같은 상념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요사이 자연의 힘을 고취하고 있다. 위대한 자연을 보존하고 그 자연에 접하므로서 고결한 인성을 함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지금 세계도처에서 요원의 불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의 물질기계문명의 병폐에 대한 인류의 성스러운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잣나무의 기품을 우리의 스승으로 삼아보자는 기도가 있는 것이다. 올바른 인류의 가치관에 군데군데 상처가 생겨나고 있는데 그것을 치유할 명약의 하나로 푸른 자연의 힘을 내세우고 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우리는 나무의 지조를 통념화 할 수 있고 그것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나무의 위대성은 잠꼬대같이 그 누군가가 심심풀이로 만들어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심성과 나의 사랑은 우거진 숲, 깊은 계곡에 머문다』(애지구학)하는 이율곡 선생의 철학은 자연에서 배울 것이 지대하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이 심산유곡을 찾아 마음과 몸을 단련하고 소나무를 심어 자연을 가꾸었다는 것은 높은 기개를 함양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

 

잣나무는 우리 나라의 자연경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송백암암회라는 시구에 나오는 송은 소나무일 것이고 다음 백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의 시와 문학을 다룬 선비들은 외관이 비슷한 나무를 모아서 하나의 명칭으로 표현한 것 같다.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그 종류를 자세히 따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백으로 표현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편백종류 측백종류 향나무(백신, 원백, 회백)종류에 백 자를 넣고 있다. 가문비나무종류와 전나무종류는 일반적으로 삼 자를 쓰고 있다. 잣나무는 홍송, 해송, 과송, 유송 그리고 신라송으로 쓰며 백 자는 해당되지 않고 있다.
논어에 나오는 송백은 공자가 뜰 앞에 서있는 향나무를 보고 말한 것이라 한다. 송과 백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로 뭉쳐서 향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이태백이 노자 묘를 찾을 때의 시의 한 구절에 『홀로 상심하노라 천년(천대) 뒤까지 쓸쓸히 남아있을 송백의 숲』이란 것이 있는데 이때의 송백도 묘 옆에 우거져있는 향나무를 말함이라 한다. 명부의 영혼과 세월을 함께 할 향나무는 쓸쓸할 수밖에 없다.
잣나무는 우리 나라에 집중 분포해있고 만주, 시베리아, 우스리지방 그리고 일본에 약간 분포하고있다. 만주의 동부지방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는 없으므로 중국의 예전 시문에 나타나는 송백에는 잣나무는 뛰어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두보의 시에 『취백은 짙게(심) 색갈(경)을 간직하고(유), 붉은 능금(홍리)이 멀리(형) 서리(상)를 얻었드라』하는 것이 있다.

 

취백심유경
홍리형득상
이때의 취백이 어떠한 나무를 말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역시 두보의 시의 한 부분이지만 『금속퇴 앞에 우거진 송백의 그늘을 당신은 보았는가』 군부견금속퇴전송백리.
영광을 등에 올려놓고 뛰던 그때의 준마는 이제 보이지 않고 다만 바람을 마시는 새들만 보이는 것이, 이곳 금속퇴는 왕능이다. 이 때의 송백도 묘 옆이라 향나무도 볼만한 것이 아닌가. 소식의 글에 『돌아갈 거나, 돌아가 가난하여도 내 집으로 돌아갈거나 어찌 추장하게 홀로 슬퍼할거냐, 고향 집 앞의 길은 거칠었지만 송국은 아직 남았노라, 소나무는 검게 늙었으나』하는 대목이 있다. 이 때의 송이 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높고 푸른 나무로 생각하면 족할 것이 아닌가.
송백 우거진 곳에서 비어있는 궁궐을 보고 모래 먼지 일고있는 저녁길에 섰노라.

 

송백첨허전
진사입명도
이때 두보의 시의 송백은 향나무로 보기 어렵고 소나무종류. 가문비나무, 전나무등속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것이 이곳 풍광에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약용 선생은 백자라 제목하고 설명하기를 백자는 측백이라. 이아에 말하기를 백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잎이 편평한 것은 측백 또는 측엽이고 그 인을 백자라 한다. 해송(해송 잣나무를 말함)은 유송, 과송, 오수송을 말함이고 때로는 오립송으로 말한다. 그 인을 해송자로 말한다. 지금 세상사람들은 잣나무(과송)를 백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과송판을 백자판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도 잘못이다.
이곳 정약용 선생의 서술을 살펴보면 그때의 사람들은 잘못이기는 하나 잣나무를 백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문객들도 소나무와 잣나무등속을 송백으로 묶어서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송백 같은 우리 민족의 절개가 세월 따라 휘어청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잣나무 숲이 줄어들었기에 절개도 희석되어가고 있는가.

 

1944년 가을 백두산부근 밀림지대에서 겨울을 날 때 경험한 것이지만 그곳 화전민들은 가을의 감자 수확과 감자녹말 내기의 일이 끝나면 잣나무 숲을 찾아갔다. 잣송이를 모을 데로 모아 잣 알을 방 하나 가득히 채우고 온 겨울 식구가 모여 앉아 잣을 깨어 먹는다. 몇 길의 눈이 쌓여있어도 잣 알의 기름기로 백두산의 추위를 견디어내는 그들이었다.
우리가 우리민족은 위대하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잣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히말라야시이더, 또는 레바논시이더를 한결같이 말하는데 모양이나 색깔이나 잣나무에 흡사하다. 아니 잣나무가 더 아름답다. 씩씩하고 웅장하고 거기에 부드러움이 있다. 그래서 잣나무를 코리언시이더(Korean ceder)로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외국사람은 코리언파인(Korean pine)으로 부르고 있는데 받아드릴 만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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