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온 나라를 짓밟고 지나갈 때 일이다. 봉의산에서도 관군과 몽고군의 혈전이 벌어져서 피아간에 희생이 컸다. 봉의산을 점거하고 있었던 관군은 무엇보다도 식수가 걱정이었다. 산중에는 우물이 한 곳밖에 없어서 도무지 장기전을 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격하라. 사력을 다하여 진군하라.」
몽고군의 선봉장은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칼을 뽑아 들었다. 봉의산 속에 있는 춘주(춘천) 주민과 관군들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몽고군이 산 아래서 성책을 쌓고 우물을 판 다음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일은 점점 더 어렵게 되어 갔다
「식수가 바닥이 났습니다,」
「말을 잡아서 그 피를 마시도록 하라,」
「장군. 말이 없으면 어떻게 저들과 항쟁을 합니까,」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우물에 다시 식수가 고일 때까지 말의 피로 연명을 하도록 하라.」
물이 없는 성 안의 고통이란 참으로 고된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말을 죽여서 그 피를 마신다는 것도 한도가 있는 일이어서 봉의산성 안 주민과 관군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기만 하였다.
버티다 못한 주민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도 있었다.
교주도 안찰사 박원기는 머리를 싸쥐고 깊은 시름에 젖었다.
(어찌할거나. 몽고군은 이 산을 포기하지 않고, 성 안의 참상은 차마 눈뜨고는 바로 바라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 안찰 사는 관군의 지휘자와 군수·현감들을 불러들였다.
「우리는 이 산을 더 지킬 수가 없소.」
안찰사 박원기는 침통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안에 있는 군량과 기물을 모두 불태우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마지막 죽음의 항전을 기도해 보라는 주장이었다.
안찰사의 말을 듣고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달리 묘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성 안에서는 마침내 불길이 올랐다. 얼마 안 남은 군량과 고려 관군의 무기 따위가 불길 속에 휘말려 들었다. 뒤이어 결사대가 함성을 내지르고 산 아래로 치달았다.
「목책을 허물어라! 몽고군은 이 땅에서 한 놈도 살아 돌아가는 자가 없도록 하라! 」
계획대로 저들의 목책을 허무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적군이 파놓은 깊은 웅덩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안찰 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결사대와 함께 순절하였고, 뒤따라 추격한 관군도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성안에 남아있던 고을 주민과 군사들이 국기로써 항전했지만, 그들은 기세가 살아난 몽고군에 의하여 모두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춘천 박 씨 시조 박항은 자기 부모의 시체를 찾으려고 서울에서 급히 봉의산으로 달려왔다. 성안은 온통 시체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속에서 어찌 부모님의 시신을 거둘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누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없는 시신 300여구를 수습하여 부모의 장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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