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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산의 전설 - 국사봉(國士峰)과 퇴혼(退婚)고개

by 양화산장 2019. 6. 27.

청주의 남산이라고도 부르는 국사봉은 남일면 소재지인 효촌리에서 남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높지 않은 산이다. 높이 281미터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이 산에는 꺾일 줄 모르는 항일 정신도 스며 있고 청주 한 씨 시조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일정 때 일이었다.
청원군 남일면 초대 면장 한인구는 비록 일제의 식민지 치하였지만, 면장이란 자기 직책을 십분 활용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수탈 당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이득이 되는 일이 있으면 앞장서 도와주는데 보람을 느꼈다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긴 조선 쌀은 일본인들의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한해도 거르는 일이 없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말하자면 농사는 조선 사람이 짓고 먹기는 일본 사람이 먹는 꼴이었다.
어느 해던가 그 해에도 「공출」은 어김없이 배당이 되었는데 작인들은 모두 한 톨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심사들이었다.
한 면장은 벼르고 별러 오던 계획을 그 해에는 기어코 실천에 옮길 결심으로 작인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들에 베어 놓은 벼를 모두 국사봉으로 옮기시오」
야음을 이용한 벼 운반 작업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누구 한 사람 면장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없었다.
달이 뜨지 않은 캄캄한 밤에 벼를 옮기는 작업은 가히 장관이었다. 미구에 무슨 큰 전란이라도 일어나 그에 충당할 군량미를 비축하듯 농민들은 비장한 각오로 그 「국사봉 벼 옮기기 작전」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이 움직인 그날 밤의 비밀 작전은 오래지 않아 중단되었다. 하루도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던 일본 관헌의 눈에 뜨여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벼 옮기기 작업이 미처 다 끝나기 전에 경찰을 앞세우고 국사봉 밑으로 쳐들어 왔다.
「순순히 빼앗기지 말고 싸워라.」누군가의 고함 소리에 청년들은 일경에게 덤벼들었다. 치열한 싸움이 국사봉 골짜기를 피로 물들게 하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 면장은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 면장이 받은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벼를 국사봉으로 옮기려 하였소?」
「내 나라 내 땅에서 내가 농사를 지었는데도 나는 굶어야 하고 현해탄 건너 일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배불리 먹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소?」
한 면장의 그 같은 반발은 해방이 된 뒤까지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 국사봉은 또 국사봉이라 하여 한 나라의 장상이나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한 사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 때 도학자로 이름 높은 문도재 송기 후가 산 밑 화당에서 태어날 때 이 국사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전실이 있으며, 뒷날 임금이 사헌부 장령겸 경연관을 제수했으나 응하지 않고 이 곳 국사봉에 은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도재는 학덕이 높아 많은 제자가 그를 따랐는데, 인근의 사람들이 산 밑으로 배움의 터전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뒷날 나라의 동량이 될 재목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국사봉이라 부른다는 전설도 있다.
효촌리 국도에서 서쪽 가산으로 넘어가는 길에 서낭당이 있는데, 이 가산을 에워싼 낮은 야산에는 한 시골처녀의 고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퇴혼고개라 부르는 이 고개 아랫마을에 혼기를 앞둔 처녀가 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 고운 마음씨, 게다가 솜씨가 썩 좋은 이 처녀를 탐낸 총각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중에서 부잣집 도령과 가난한 집 총각이 마지막 후보로 남아 있었다. 처녀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지 두 사람 다 지아비로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총각의 집에서는 성화가 빗발 같았다. 빨리 당사자를 정하라는 성화였다. 처녀는 부모에게
「저의 지아비 될 자는 제 손으로 고르게 해 주십시요.」
하고 부탁하였다. 부모는 딸의 뜻대로 선택권을 딸아이에게 맡겼다.
다음날 처녀는 참으로 희안한 주문을 해 왔다.
「두 총각들의 얼굴을 보이지 말고 다만 두 손만을 제 방문 안으로 들여 밀어주세요.」
「아니, 손을 보구 어떻게 신랑을 고른단 말이냐.」
부모가 일단 난색을 보였지만 딸은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부잣집 도령과 가난한 집 총각은 처녀의 방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처녀는 매끈매끈하고 부드러운 부잣집 도령의 손을 제쳐놓고, 거칠고 볼품없는 가난한 집 총각 손을 잡았다.
부모가 놀라 묻자 마음씨 고운 처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집 총각은 이번 혼기를 놓치면 다시 장가들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부잣집 도령은 평생에 처녀가 없어 장가를 못 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저는 가난한 집에 들어가 부덕을 다 바쳐 그 집안을 일으켜 놓을 작정입니다.」
부모와 동리 사람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부잣집 도령이 혼사에 퇴짜를 맞고 넘어간 그 고개는 그때부터 퇴혼 고개라 불러온다는 것이다.

 

-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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