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남일면 소재지는 「효자가 난 마을」이라 하여 효촌리라 부르고, 이 효촌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255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산의 정상으로 시루봉이라 부른다.
경연(1455∼1494)은 조선 세조와 성종조에 바로 효촌리에서 살던 사람으로 좌랑 신직의 아들이요 호를 남계라 하였다. 학식이 높고 효성이 지극한 그가 아버지의 병환을 맞게 되자 보던 책을 아예 덮어 버리고 아버지 곁에 붙어 앉아 시중을 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병석의 아버지는 아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차도가 있지 않았다. 병자는 다 꺼져가는 몸에 입술을 겨우 움직여 잉어회가 먹고 싶노라고 했다.
아들은 어구를 급히 마련해 가지고 앞 도랑가 웅덩이에 이르렀다. 허나 철기가 마침 엄동설한이라 꽁꽁 얼어붙은 두터운 얼음 위에서 잉어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가 잡수시고 싶다는 잉어를 꼭 잡아가지고 가야지.」
그는 버선을 벗고 얼음 위에 올라앉아 작살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경연이 앉아있던 얼음 자리가 녹아내리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그물 구멍 속에서 잉어 한 마리가 뛰어올라왔다.
「아, 잉어다 잉어 !」
경연은 너무 고맙고 눈물겨워서 하늘을 향해 몇 번이고 절을 한 뒤 그 잉어를 잡아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봉양해 드렸다.
성종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하루는 경연을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소문대로 결빙된 웅덩이에서 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봉양해 드린 게 사실인가.」
하고 묻자 경연은 무엇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투로
「아버지께서 회 생각이 난다 하기로 소신이 어망을 잘게 만들어 냇가 웅덩이에 쳐 두었더니 다행히 고기를 얻을 수 있었나이다.」
「혹 물에 빠질까 두렵지 않았더냐?」
「아니옵니다. 얼음을 두들겨 깨어 쉽사리 고기를 얻을 수 있었나이다.」
하고 효행을 과장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성종은 경연에게 충효를 겸전한 것이 귀한 일이라 말하고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한 어조로 선현들의 충과 효를 배운답시고 배우고는 있으나 변변치는 않다고 머리를 숙여 보였다. 성종은 경연의 인품을 짚어보고 이산 현감을 제수했는데, 임지에서 행한 그의 치적을 보고 고을 백성들은 모두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뒤이어 경연의 어머니가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때마침 영하의 겨울철인데 어머니는 어쩌자고 생고사리 국이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경연은 자루를 들고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허나 백설로 뒤덮인 겨울 산에 고사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죄인처럼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고사리를 뜯어 왔느냐?」「예, 내일이면 생고사리국을 끓여 올리겠습니다.」
「에이그, 고사리두 없이 어떻게 생고사리 국을 끓여 오느냐.」
「글세 하루만 참고 계세요 어머니.」
경연은 그날로 시루떡을 찌게 하여 치성드릴 궁리를 하였다.
그날 밤이었다.
깨끗한 물에 목욕재계한 경연은 떡시루를 안고 마을 뒤 진산으로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제단을 마련하고 떡시루를 올린 그는 그날부터 백일치성에 들어갔다. 하늘을 향해 백일 동안 고천제를 지내면 설마 하니 자기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않으랴 싶었다.
그런 어느 깊은 밤.
경연이 하늘에 깊은 절을 하고 무심코 떡시루를 보니까 이게 어찌된 것일까.
「아니, 떡시루가 한 쪽으로 기울어 있네…」
경연은 자기의 정성이 흐트러져서 떡시루가 기운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시루를 바로 들고 제대로 놓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자기가 두 손으로 불끈 들어 올린 시루 밑으로 무엇이 뾰족이 솟아나 있는 게 보였다.
「고사리다!」
두 번 세 번 눈을 닦고 다시 보아도 그건 틀림없는 고사리였다.
그는 시루를 한옆으로 비켜놓고 고사리를 뜯어 쥐었다. 시루 밑은 온통 여리디 여린 고사리 순으로 가득하였다. 따뜻한 시루떡의 훈기로 고사리 순이 돋운 것이었다
경연은 소쿠리에 하나 가득 고사리를 뜯어다 어머니가 그렇게도 먹고 싶어하던 생고사리 국을 양껏 끓여드릴 수 있었다. 그로부터 그 산을 사람들은 「시루봉」이라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경연의 효심을 갸륵히 여겨 몇 번인가 벼슬을 주려했으나 그는 받지 않고 오직 부모 옆에서 부모공양을 하며 살아가기로 작심한 그가 벼슬을 받을 턱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경연이 세상을 떠나자 고을 사람들은 식량과 포목 등 장사지낼 제수를 보내왔다. 그러나 아내는 「내 어찌 아녀자로서 망인의 맑은 마음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그 어른의 청덕에 거리낄 일은 하지 않겠다.」
하고, 부의 일체를 되돌려 보냈다. 사람들은 일가를 빛낸 그 같은 효행과 부덕에 다시 한번 칭송과 존경의 마음을 보내었다.
경연이 살던 마을이 효촌리라 부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고, 오늘날 효촌리에는 경연의 효자비와 정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출처 - 산림조합중앙회 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