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옛날 이야기 (109) 썸네일형 리스트형 옛 이야기(고전) - 장사못의 유래 『아이구 깜짝이야 누구야?』 숙영낭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엔 높은 담장이요, 앞은 겹겹이 문이 있는 후원의 초당, 잡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역같은 후원이다. 그러나 분명히 숙영낭자의 귀엔 낭자자신의 글귀에 화답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있어요?』 그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앞에는 어떤 건장한 사나이가 달빛을 가리며 다가와 서는게 아닌가. 『에그머니 누구야』 깜짝 놀란 숙영낭자는 치마자락을 거머쥐고 당황한 발길을 돌리려했다. 『작은 아씨 저올시다』 하는 그 사나이의 목소리는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야?』 『저 용칠이올시다』 하면서 그 사나이는 두말없이 숙영낭자의 섬섬옥수를 덥썩쥐었다. 『뭐 용칠이?』 용칠이라는 말에 숙영낭자는 조금은 안심이 되었으나 손을 잡히자 본능적.. 옛 이야기(고전) - 목부용 서린 정을(하) 몽태의 아내 부용은 스물하나의 젊은 계집이다. 예쁘장하게 생긴 모습에 매끈하게 풍염한 몸매는 쉰살의 중늙은이 도둑놈의 첩으론 좀 아까운 계집이었다. 부용은 원래 백정의 딸로 태어난 저주스련 운명을 가눌길 없어 어렸을 때부터 도벽이 생겨 열일곱살 때에는 어느덧 몽태일당에 끼게 되었다. 부용은 여간 남자 못지않게 도둑질솜씨가 비상했었다. 열아홉살 봄에 몽태 두목에게 강제로 몸을 망치고 그냥 늙은 두목품에 안기긴 했지만 진정 싫은 노릇을 할수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이럴무렵 곽쥐를 처음 보고 그만 마음이 온통 쏠렸으니 부용이 곽쥐를 사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굳어갔다. 오늘쯤 곽쥐가 찾아올 성 싶은 날이면 부용은 공연히 마음이 들떴으며 그녀의 화장은 정성이 깃들고 한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번은 몽태가 없.. 옛 이야기(고전) - 목부용 서린 정을(상) 1. 협도 곽쥐 한가위를 지난 더위가 바람도 없이 기승을 피우는 날씨였다. 이날, 한나절이 좀 지나서 옛 이야기(고전) - 암행어사 이경조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외아들로 자라면서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홍 판서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이경조는 경기도 광주에서 과거가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나라에서는 알성과를 보이게 되었다. 알성과라는 것은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년)부터 시행돼 온 과거제도인데, 임금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에서 보이던 것이다. 경조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과거에 응했고, 결과는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금은 경조의 재주가 매우 뛰어난 것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삼남 암행어사를 명했다. 경조는 여느 어사들과 마찬가지로 찌그러진 갓에 헤어진 옷을 입고 마패를 감추어 거지 행세로 길을 떠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돌며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게 되었다. 날씨는 더워 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 옛 이야기(고전) - 기건(하) 길운이의 아버지가 말을 계속하는데 이러하다. “저희가 짐승의 밥이 되지 않고 대감마님 덕분으로 지하에 편히 쉬게 되었사오니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여 그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아 드릴까 하고 이렇게 찾아와 감히 아뢰옵니다” 길운이 아버지의 말에는 그만한 내력이 있다. 십여 년 전에 기건이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대 그 지방 풍속을 고쳐준 일이 있는데, 그 중에 장례 지내는 일도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산 속에 버리거나 물 속에 띄워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을 정중하게 매장하도록 권장하여 그 때부터 시체를 매장하는 습관이 생겼다. 매장할 때에는 양지바른 좋은 땅을 골라하도록 지도를 했다. 길운이 아버지 말은 그것을 가리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 일을 .. 옛 이야기(고전) - 기건(상) 청파 기건은 다 쓰러진 헛간 암에 서서 감개가 헤아릴 길 없다 삼간누옥이란 말은 들었어도 이건 삼간도 못 된다. 이건 누옥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누옥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이 거처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이 헛간에서 그분이 일생을 마치다니.) 기전이 "그분" 이라고 한 사람은 다른사람이 아니라 송설헌 권홍을 이르는 말이다. 권홍은 조선시대 태종 때의 명신이다. 그의 딸이 태종의 빈으로 있었고, 그는 영가군이라는 군호까지 받았다. 태종15년(서기 1415년)에 판도령부사(왕실의 친척의 친목을 위한 사무를 처리하던 "돈령부"의 종1품 벼슬)가 되었고, 세종 5년(서기 1423년)에는 영중추부사가되였다. 중추부는 왕명의 출납·병·숙위 등을 맡아보던 관청인데 그 무렵에는 중추원이라고 했다. 그 중추원.. 옛 이야기(고전) - 광산왕 백두산에서 동남 남쪽으로 활몸 모양의 곡선을 이루며 뻗어,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마천령 산맥, 이 산맥에는 높이가 2,000m넘는 산들이 많은데, 그 남쪽 끝 부분에 마지막 높은 재가 있으니 마천령이다. 마천령의 높이는 725m. 동쪽으로 이십리에는 성진, 남남 서쪽으로는 단척이 오십리 쯤에 있다. 마천령을 이판령이라고도 하는데, "이판"이란 말은 옛날 여진족의 말로 "소"를 일컫는다. 어느 날, 여진 사람이 마천령 아래에서 송아지를 팔았는데, 어미 소가 송아지를 찾으러 높은 재를 넘어가는 통에 길이 생겨 소 임자가 그 길로 좇아간 다음부터 여러 사람이 왕래하면서 이재이름을 이판령 즉 소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천령의 산세가 웅장하여 영기가 서린다고 부근에서 큰 인물이 날 것.. 옛 이야기(고전) - 억울한 사연 때는 조선시대 성종(9대 임금)초기 서기 1470년 께다. 충청도 청풍 고을에서 괴나리 봇짐을 지고 허술한 차림으로 서울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선비. 나이는 30이 넘었을까. 얼굴에는 핏기가 없이 궁한 티가 흐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안 되면 할 수 없지. 더 어째 보는 수도 없고…….) 비장한 각오를 하는 그는 사정이 딱했다. 이름은 김 위. 가난한 선비로 과거를 보려고 공부도 했고, 과거가 있을 때마다 서울을 오르내리기 벌써 다섯 번째. 요즘 말로는 이력이 난 재수생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서 노자마저 여의하지 않다. 노정의 반쯤은 무전 여행(그 시대에는 과객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으례 점심을 굶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말도 탈 형편이 못되어 다리는 아프고,.. 옛 이야기(고전) - 애끓는 비련(하) 그로부터 사흘 뒤 조 공자와 월랑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졌다. 정식 혼인식은 아니니 예복을 갖추지는 않았으나 비단옷을 입혔고, 승상 부부에게 큰절로써 인사를 드리고 잔칫상을 대했다. 조 공자도 준수하고, 월랑도 아리따와 보는 사람들은, 마치 천생연분으로 만난 선남 선녀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조공자는 월랑을 맞아 흐믓했지만, 승상댁 하인들은 월랑이 팔자가 좋아서 좋은 자리를 만났다고 부러워했다. 잔치는 정식 축하 모임 못지 않게 흥겹게 진행 되었다. 축하잔치가 끝나고 단둘이 신방에든 꽃다운 부부는 하늘에 오를 것만 같다. "월랑이, 내가 머나먼 타향에서 이런 기쁨을 맛보다니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야 누가 이런 일을 꿈엔들 생각했을까." 순수하고 감격하기 쉬운 스무살을 바라보는 두 부부는 감.. 옛 이야기(고전) - 애끓는 비련(상) "서방님, 저번에 대감께서 데러오신 처녀가 보통으로 예쁜것이 아닙니다." "그렇더군. 나도 잠깐 본일이 있는데, 참 복숭아꽃같이 예쁘데." 말을 주고받는 사람은 청지기와 스무살이 될까말까한 청년. 원나라 대승상 탈탈의 집이다. 탈탈공이 변방 순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웬 처녀아이를 데려왔던 것이다. 그 처녀에 대해서 승상댁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런 어여쁜 처녀를 어디서 데리고 오셨을까요 ? " 궁금한지 청지기가 청년에게 묻는다.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대감께서 순시를 도시다가 어느 깊은 숲속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알아 보게 하였더니, 하인이 그 처녀를 데리고 왔다나봐." 청년의 이아기는 계속된다. 하인이 가본즉, 어떤 무뢰한이 그 처녀를 끌고 가려고 하는데 처녀는 안.. 이전 1 ···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