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양녕은 태종의 맏아들로서, 세자로 책봉되어 춘방에서 거처하였다. 그는 왕자로서는 천고에 드문 재인이어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태종이 경회루의 현관을 보고 그 웅건한 필치에 놀라, 아들 양녕의 필법을 무수히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한 양녕이 어찌하여 술과 계집에 빠져, 장차 지존에 오를 세자의 자리까지 내팽개치고 갖은 추잡한 행동과 미치광이 짓을 하였던가?
여기에는 그럴만한 곡절이 분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자로 책봉된지 얼마 안되어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갔을 때였다. 그는 문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소근거리는 대화를 듣고 아연해 버렸다.
『참 아쉬운 일이야. 충녕과 양녕이 바꾸어 태어났다면, 장차 백성들이 어진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고에서 살게 될 것을… !』
부왕 태종은 긴 한숨까지 내리쉬지 않는가-.
그랬더니 모후 까지도
『뉘 아니래요. 충녕이 맏이였어야 할 것인데 ‥·』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 순간 세자 양녕의 머리 속에는 번개불처럼 스쳐가는 어두운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난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삼촌들과의 자리다툼이라는 골육상잔의 참극이었던 것이다.
『자, 그럼 어떻거면 세자의 자리를 셋째 아우 충녕에게 내어줄 수 있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이 양녕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는 문안드릴 것도 잊고 자기의 처소인 동궁방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궁리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는
『에라 모르겠다. 발광 할 수 없으면 발광하는 체라도 해보자.』
이렇게 결심하였다. 어질고 덕이 있고 효심과 우애가 지극했던 양녕인지라 부왕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는 자기보다 월등한 셋째 아우 충녕대군에게 깨끗이 자리를 양보하려 한 것이다.
그로부터 양녕은 돌변된 사람- 미치광이가 되었다.
양녕대군이 한참 발광 할 것을 궁리하고 있을 때 춘방 별감이 큰 소리로
『계성군 듭시나이다.』
하였다. 이때 양녕은
『옳치! 지금부터다.』
하고 일부러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마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래어
『아니 동궁마마!』
하고 양녕을 뒤 흔들었다.
『왕 왕 왕…』
그러나 양녕은 연거퍼 짖어대며 마치 물어 뜯을 것처럼 이래의 다리에 매달리기까지 하였다.
『동궁마마! 아이 웬일이시오니까? 정신을 차리십시오.』
하고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뒤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알아차렸다는 듯
『아 계성군 아니오. 언제 오셨오?』
하고 아는체 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이윽히 살펴 보더니
『마마! 어찌 된 일이오니까? 아까 개 짖는 소리는 왜 하셨나요?』
『개, 개 짖는 소리? 내가 언제···?』
『아 금시 하시지 안았오이까?』
『체, 내가 개를 보기나 했오?』
『아니, 동궁마마 어디 편치 않으십니까?』
『왜, 내가 앓는 것 같소?』
양녕은 도리어 엉뚫한 딴전과 반문을 했다.
이 날, 이래는 그 밖에도 이상한 여러가지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오늘 신이 춘방에 나갔다가 여차여차한 세자의 광태를 발견하였나이다. 의관을 보내시어 진맥케 하옵소서.』
그뒤부터 양녕 세자는 이래가 와도 글을 배우려 하기는 고사하고 엉뚱한 딴 짓을 하기만 하였다.
동궁 뜰 앞에 새 덫을 해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그리고 간혹 조하에 참내할 일이 있어도 머리가 아프느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 방에서 혼자 새 덫을 놓거나 드러누어 딩굴면서 콧 노래를 부르기가 일쑤였다. 그는 되도록 부왕과 모후를 뵈옵지 않으려고 회피하였던 것이다.
『어떻게던지, 공의에 쫓아 폐세자를 하였을 뿐 까닭없이 폐사한 것이 아니다.』
하는 물의를 일으켜 널리 알리고져 함이었다.
아무튼 세자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더하기만 하였다. 춘방 별감을 대동하고 궁성을 월장하여 외방출입을 하면서 기생들을 상대하는가 하면 남의 집 반반한 소실까지 낚우어 내기도 하였다. 그가 끔찍히 사랑하던 어리도 이렇게 하여 낚우어 들인 계집이었다.
어느날,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평강으로 출어하였을 때에도 대자 양녕은 얼시구나 하고 측근자 몇을 다리고 시홍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는 아름다운 기생들을 불러 산 속에서 사냥한 고기와 술을 받아다 진탕하게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리고는 돌아올 때 악공들을 불러 풍악을 연주케 하고 종로 한 복판으로 들어서서 세자 자신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다녔다. 그리하여 종로일경에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이날 밤, 늦으막히 춘방으로 돌아 온 세자 양녕에게 어떤 별감이 수작을 걸었다.
『동궁마마께 아뢰나이다.』
『이 놈아 무얼 아된다는거냐? 어서 말이나 해 봐라.』
『그 왜 지중주부사 곽정의 소실에 어리라고 있지 않습니까.』
『어래 어리가 어떻단 말이냐?』
『마마께선 아직 모르시나이까?』
『무얼 모른다는 거냐?』
『그 어리가…』
『어리가 어떻다드냐? 곱다든 밉다든?』
『말씀 마시옵소서 십만 장안에 짝이 없는 미희인줄로 아뢰옵니다.』
『얘 그 정말이냐?』
『정말이고 말굽쇼. 소인이 언제 마마께 거짓말을 사뢰었나이까?』
『음, 그것 이밤으로 낚꿔들일 수 없겠느냐?』
『업어오라시면 소인이 업어 오겠사옵니다.』
『얘 어디 그래봐라.』
춘방 별감은 이리하여 그 밤으로 곽정의 소실 어리를 납치해 왔다. 처음엔 싫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동궁으로 붙들어오자 어리는 도리어 갖은 아양과 애교를 부리어 세자의 마음을 쉽사리 사로 잡았고 세자 또한 죽자하고 어리를 애무하였던 것이다.
『야 고것 참 미색이로구나! 너와 나와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고. 이리온 내 무릎 위에 앉아라.』
『옛다 모르겠냐. 제왕은 무엇이며 세자란 무엇이나. 어리 하나만 있으면 나는 만사 태평이다.』
양녕은 어리와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그 아름다운 미색에 도취되어 버렸다.
그 뒤 이 소문은 궁중으로 들어갔다. 임금 태종은 진노하여 그 춘방 별감을 곤장쳐서 공주관아로 내쫓았고 어리를 동궁으로 들이는데 조력한 사람들을 죄다 귀양 보내었다. 그리고 세자도 이통에 송도로 추방되었다가 며칠만에야 다시 불러왔고 어리는 춘방에서 멀찌기 내어쫓게 하였다.
이러한 소동이 있은 뒤 그렇치 않아도 물의가 분분하던 군신들 간에
『폐우 입현을 하시옵서소.』
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하였다.
묘당에서는 드디어 폐세자의 논의가 대두되었다. 임금 태종도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황희는 이를 반대하였다.
『폐장 입유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치셨다하오나 원래 그 자질은 가히 성군이 되옴직 하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
했다. 사실 황희는 지인지감이 남달라서 세자 양녕이 얼마나 너그럽고 인자한 성군으로서의 자질인가를 그리고 그가 거짓 미친 체하는 그 심정을 잘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 태종과 그 밖의 신하들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희를 지탄하였다. 황희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마침내 강등되어 귀향갔고 태종은 제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양녕이 생각했던 것처럼 마침내 폐세자를 결행하였다.
『세자, 불무학업, 인어성색, 요지창시, 불득기폐사』-세자가 학업을 힘쓰지 않고 음탕한 소리를 하며, 계집에게 빠지기만 하므로 부득이 폐사하노라.
이해 육월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세운 다음 팔월에는 태종이 왕위를 재빨리 충녕 세자에게 전수하고 자신은 상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녕의 발광은 거의 고질화되어 상왕 태종의 미움은 더욱 심하였다.
『이제부터 양녕을 자식으로 치지 않겠다. 법이 위반하거든 언제든지 잡아들여라.』
하는 정도까지의 지엄한 본부를 내리었던 것이다.
양녕대군의 동궁으로부터 쫓겨날 무렵 그의 아우인 둘째 효령대군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형님이 폐사되면 세자자리를 차례대로 당연히 내게 돌아올것인데·‥
하고 더욱 학행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형님 양녕이 찾아와서 효녕이 읽는 책을 덮어 팽개치며
『이놈아, 공분 해 뭘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지마라. 충녕이야 충녕! 알았어? 괜히··」
하고 농지거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농담 속에 뼈가 들었음을 효녕은 날쌔게 알아차렸다.
그도 충녕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 한바는 아니지만 이제 형님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수긍되는 바 있어 그는 그만 책을 덮고 그 길로 양주 회암사로 들어가 삭발위승하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그는 중이 된 후 세상사를 깨끗이 잊고 일념으로 염불삼매에 몰두하였다.
『효녕대군 북치듯 한다!』
이 말은 그가 출가하여 얼마나 열심히 불도에 탐익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어느날 효녕은 형 양녕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였다.
『형님 못 뵈온지 참 오래 되었나이다. 이번 2월 15일은 불열반일이오니 형님 부디 오셔서 서로의 울적한 정회나 푸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소제 다소의 음식을 장만해 놓고 기다리겠나이다.』
이 기별을 받은 양녕은 일부러 이날 일족 낭당을 거느리고 회암사 부근으로 가서 크게 사냥을 했다. 그리하여 잡은 짐승을 굽고 볶고 하여 바로 회암사 절 밑에서 술을 대작하였다. 이때 고기를 지지고 볶는 냄새가 절깐에 까지 풍기매 효녕은 형님이 오신 줄을 알고 그 짓궂은 장난에 그만 이맛살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와 보니 과연 그 난잡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양 옆에는 기생들까지 끼고 앉아 수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효녕은 그만 뛰어내려가서
『형님, 이제 제가 공양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청정도장에서 이게 무슨짓이오니까.』
하고 나무랬다.
그러자 양녕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야 이것 좋지 않으냐? 어때 내 팔자가!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일 테니 내 팔자가 상팔자로구나.』
하고 연거퍼 웃는 것이었다.
효녕도 이러한 형을 굳이 나무랄수만도 없는지라
『하여간 음식은 장만해 놓았으니 우선 절깐으로 들어 가십시다.』
하여 양녕을 이끌고 회암사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날 하루를 재미있게 청유하였다. 그 자리에서 양녕은 말하였다.
『왕이니 왕세자니 다 괴로운 것이다. 우리가 이제 이렇게 자유로이 만날 수 있는게 얼마나 좋으냐 말야.』
『지당하신 말씀이로소이다. 제 어찌 즐겁지 않사오리까.』
하고 효녕도 미상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씨 왕권의 기초를 더욱 튿튼히 하고, 또 우리민족 문화수립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이가 바로 이조 제4대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왕자였는데 어려서부터 그 자질이 실히 총명하고 관인한 데다 학문을 좋아하여 매양 손에서 책을 놓치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왕 태종은 여러 왕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그를 사랑하였고 또 장차 양위에 대한 촉망까지도 그에게 가져 맏아들 양녕을 내치고 그를 세자로 봉하였다가 마침내 그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세종대왕! 그는 실로 위대한 인격자요 지도자였다. 사사로운 면이 있어서나 국가의 정무에 들어서서나 효우공검하고 박학 다예하여 추호의 구김새가 없었고 여러 방면에 걸쳐서 통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
정사를 두루 보살피는 한편, 여가마다 독서와 사색에 잠겨 잠시도 머리를 쉬지 않았으나 무가치한 일에 대한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영악했다.
그가 사생활에 있어서는 효도와 우애를 지극히 하여 부왕과 모후의 거상에는 그 슬퍼함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고 지상이면서도 두 형님과 아우 성실대군을 날마다 청하여 침식을 같이하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성은 국사에 들어서도 그대로 하였으니 신하를 대하되 예를 앓지 않았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들의 건곤한 생활에 깊은 관심과 동정을 가지고 이른바 인민을 본위로 한 왕도의 정치, 애국의 정치를 하였건만 자신이 항상 심궁에 처하여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함을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의지의 사람이였기에 한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기어코 실행하고야 말았다. 우선 정묘 무쌍한 우리의 글인 훈민정음을 제정 반포할 때도, 최만리, 정창손 등 완고한 신하들의 끈덕진 반대를 무릎쓰고 기어이 실행에 옮겨 놓은 일 같은 점이 그 한 예이다. 이야말로 자기비판, 자아반성의 정신적인 발로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음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못하는 까닭이 어린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심중을 표현치 못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정음 28자를 만드노라.』
한 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밖에 집현전을 설립하여 훈민정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을 편찬케 하고 또 아악을 정리케 하고 해시계, 물시계와 측우기 등 각종 과학기구를 만들게 하였으며, 밖으로 대마도의 왜적을 징벌하여 해적의 화근을 뽑아버리고 북방을 개척하여 육진을 둠으로서 여진과 몽고를 방비케 한 점 등, 실로 그는 내치와 외교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고 빛나는 치적을 쌓아 올린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나라 안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어디를 가나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밖에도 빗장을 채우지 않고 살아 왕을 칭송하는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참으로 동방의 요순이란 일컬음을 듣는 세종 그는, 이상의 사람인 동시에 의지와 실천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일생을 통하여 늘 자기비판과 자아반성의 정신으로 백천가지 유익하고 빚나는 위업을 이루어 후세에까지 그 복음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그는 슬하에 자녀들도 많아 아들 18형제에 딸 4형제를 두었으며 재위 32년만인 향년 5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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