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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92

산신령의 빗나간 계산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 17종과 솔송나무, 섬잣나무 등의 침엽수가 8종, 한 지식물인 주목나무, 향나무 등 모두 총 575 종의 식물이 번식하고 있는 울릉도는 본토로부터 옮겨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많아 망향에 어린 선설이 많으며 또한 작은 바위섬마다 그 모양에 걸맞은 흥미로운 전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울릉도 서쪽 끝 태하동 서낭당에는 지금도 한 청춘남녀의 원혼을 모시고 있다. 그들에 얽힌 전설을 소개한다. 아득한 옛날일이다. 동해에 김인우리는 안무사가 파견되어 있었다. 그의 임무는 매일 배를 타고 동해안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몇몇의 부하들과 기생한 명을 데리고 나와 바람결에 배를 맡긴 채 태평스럽게 바다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잔잔한 바다 위로 난데없이 먹구름이 .. 2023. 2. 9.
요씨, 조선년 하나쯤이야 충남 서부의 고봉인 가야산 지맥에서 서 쪽으로 뻗어 내린 부춘산은 일명 북주산이라고도 부른다. 송림과 기암이 잘 조화되어 천연적인 휴식공원으로 손색이 없는 이 산에는 돌로 축성된 길이 540여m의 산성이 있었으며, 기슭에는 국조인 단군의 영정을 모신 단군전과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700여 위패가 봉안된 충령각, 삼선암, 관음사 등 4개의 사찰이 자리해 있다. 이 산 최고봉에는 선녀가 가야금을 뜯는 형상의 옥녀봉이 있는데 옥녀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일본이 강제로 한일합방을 체결한 직후의 일이었다. 서산읍에는 일본인 소유의 금광 이 하나 있었는데 한창 번성해 나갈 무렵 오랜 장마가 계속되어 작업이 중단되었다. 덕분에 밤낮없이 작업에 시달리던 조선인 광부들은 모처럼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지만 이.. 2023. 2. 6.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는 나지막한 쉼터 대전광역시 남쪽에 위치해 있는 보문산 (457m)에는 보문산성, 보문사지, 야외 음악당, 전망대 유희시설, 케이블카가 있으며 시루봉길등 10여 개의 등산로와 20여 개소의 약수터가 있다. 특히, 시기념물 제10 호인 보문산성은 1991년 12월 백제산성 중 최초로 복원되었다. 본래 이 산은 보물이 많다 하여 보물산이라 부르다가 후에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산이름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한다. 아득한 옛날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나무꾼에게는 골칫거리 형이 한 명 있었다. 방 탕한 생활을 하다가 혼기를 놓친 형은 매일 술을 마시고 주정을 일삼는 것으로 부모와 동생을 괴롭혔다. 사람들은 형의 행실을 손가락 질 하며 형의 몫까지 대신하면서도 불평 은커녕 묵묵히 일을.. 2023. 2. 2.
벼락맞고 솟은 아홉개의 맑은 샘 구정봉 전남 영암 월출산(809m)은 지리산, 변산, 천관산 내장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 산으로 꼽힌다.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월출산 서쪽자락에 있는 구림마을에는 유명인물들 이 많이 배출되었다. 멀리로는 일본으로 가 서 일본인들을 무지로부터 구해낸 왕인 박 사가 있고, 풍수지리설을 처음 주창한 도선 국사도 구림마을 출신이다. 그리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기인장수 동차진이 태어난곳도 이곳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비상한 힘을 보인 그는 일곱 살이 돼 자 어른들도 하기 힘든 일을 거뜬하게 해냈 다고 한다.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 올려 돌 밭을 일구고 넓은 밭을 갈아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늘 먹고 살기는 빠듯했다. 집이 가난한 그는 감히 글을 배운다는 생각을.. 2023. 1. 30.
천상의 여인, 등불로 태어나다 경북 안동에 있는 천등산(天山, 584m) 원래의 이름은 대망산이었다. 이곳은 신라시대 의상대사의 수도처로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의 모체, 봉정사로 더 유명한 산이다.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부르게 된 내력을 설명하려면 의상이 처음 입산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의상은 도를 닦기 위한 수도처로 대망산을 선택하고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봉정사 뒷산에 위치해 있는 천등암에서 공부를 시 작하였다. 천등암 토굴 안에서 비바람과 살을 에이는 듯한 혹독한 산속의 추위를 견 디며 수행을 계속하였는데, 나이 어린 소년 이 자연과 싸우면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노릇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굴 밖에 희미한 그림자 가 비치더니 '어흐흥' 하는 성난 호랑이의 포.. 2023. 1. 26.
산의 전설 - 청주 선도산 악신과 애기바위 청주에서 동쪽으로 약 4킬로미터 지점. 청주의 명물 명암 약수터로 오르는 길에 명암못(명암호)이 있고, 거기서 방죽 거리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용정동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울창한 낙엽송 숲이 나타나는데, 이 산이 선도산이며, 그 산의 낙엽송 계곡을 마주한 곳에 부인상을 닮은 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가 곧 애기바위이다. 그러니까 조선 광해군 때 일이었다. 알다시피 광해군은 온갖 난정을 저질러 많은 충신들이 화를 입고 조정을 떠났던 시기여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나 세상을 온통 침울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었다. 선도산의 애기바위도 그 무렵의 얘기인데, 이 바위에는 한성에서 벼슬을 버리고 청주 고을에 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최참판 내외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최참판 내외.. 2020. 6. 12.
산의 전설 - 진안 마이산 부부산(夫婦山)의 여행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아들 산 딸 산을 주렁주렁 낳고 금실 좋게 살아가는 어느 부부산이 있었다. 그들 부부 산은 이를테면 산신이었다. 한데 그들 부부산은 밤이면 밤마다 자꾸 얼만큼씩 자라면서 또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침 전라도 진안 고을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되었다. 그 산이 그들은 아무에게도 눈에 뜨인 적이 없었는데 만일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되면 그들의 화목하고 즐거운 일생은 끝장이 나고 만다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는 금실이 무척 좋았지만 그렇다고 말다툼 한번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편 산은 사람이 모두 잠이 든 사이에 빨리 커서 하루빨리 한양에 닿자고 하였다. 아내는 반대였다. 『여보. 그렇게 고집부리지 마세요. 빨리 움직이면 아이들이 피로할 테니까 한숨 푹.. 2020. 5. 29.
산의 전설 - 공주 봉황산과 계룡산 왕도(王都)의 기운 충남 공주 읍내에는 시내 제민천 위에 옛 백제시대의 사적유적지의 하나인 「대통다리」가 남아있고 사찰 경내에 세워졌던 당간지주가 그 많은 풍상을 견디며 오늘까지 버텨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통사는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 때 가장 큰 절로 전해온다. 그 무렵 봉황산 밑에는 한 중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꿈 속에서 산신령을 만났다. 『사문아, 듣거라!』 산신령은 첫눈에 보아도 봉황산을 지키는 산신인 것 같았고 무엇인가 긴한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현몽한 것임을 그 중은 단박에 알아낼 수가 있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산신령님.』 『너는 장차 이 봉황산 밑에다 크나큰 절을 지어야 하느니라.』 『산신령님 뜻이라면 지어야 하고 말굽쇼.』 『절을 짓는 것만 가지고서는 아니 되느니.』 .. 2020. 5. 27.
산의 전설 - 강화 화개산 문무정(文武井)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에 있는 화개산에는 문무정이라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 산기슭에 있는 우물을 문정, 서쪽 산기슭에 있는 우물을 무정이라 불렀는데, 그 두 개의 우물에서 솟아 나오는 맑고 깨끗한 물이 어떻게나 맛이 있었던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장꾼처럼 줄을 이었다고 한다. 문무정에서 나온 물은 시내를 이루어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우물물이 솟기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교동에서는 문·무관이 속출하여 많은 인재를 조정으로 내어 보낼수가 있었는데,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문무정의 은덕 때문이었다고들 하였다. 그런데 문관과 무관의 배출 인원수와 두 우물의 수량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세. 문정의 물이 넘치면 문관이 많이 나오고 무정의 물이 넉넉하게 솟으면 무관의.. 2020. 5. 25.
산의 전설 - 대덕 식장산 은어송의 윗대 묘(墓) 식장산은 충남 대덕군과 충북 옥천군의 군계에 우뚝 버티고 선산이다. 어느 때인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옛날 그 식장산 기슭의 웃터새말(지금의 가오리 근처)에 은어송이란 젊은이가 머슴살이를 하면서 늙은 홀어미를 모시고 살았다. 십 년 동안이나 머슴살이를 했지만, 형편은 매양 그 모양 그 꼴이어서 나이 삼십이 가까왔는데도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 처지였다. 은어송은 십년을 하루 같이 식장산 중턱에 올라 땔나무를 해 나르는 사이 점심때가 되면 싸 가지고 간 점심을 그 산 중턱에 사는 가난한 절의 중 법흠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은총각 정말이지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법흠은 밥을 나누어 먹을 때마다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때마다 은어송은 고개를 저으며 「온 별말씀을 다 하세유. 지가 은혜 갚음.. 2020. 5. 22.
산의 전설 - 국사봉(國士峰)과 퇴혼(退婚)고개 청주의 남산이라고도 부르는 국사봉은 남일면 소재지인 효촌리에서 남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높지 않은 산이다. 높이 281미터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이 산에는 꺾일 줄 모르는 항일 정신도 스며 있고 청주 한 씨 시조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일정 때 일이었다. 청원군 남일면 초대 면장 한인구는 비록 일제의 식민지 치하였지만, 면장이란 자기 직책을 십분 활용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수탈 당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이득이 되는 일이 있으면 앞장서 도와주는데 보람을 느꼈다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긴 조선 쌀은 일본인들의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한해도 거르는 일이 없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말하자면 농사는 조선 사람이 짓고 먹기는 일본 사람이 먹는 꼴이었다. 어느 해던가 그 해에도 .. 2019. 6. 27.
산의 전설 - 시루밑에서 돋아난 고사리 충북 청원군 남일면 소재지는 「효자가 난 마을」이라 하여 효촌리라 부르고, 이 효촌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255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산의 정상으로 시루봉이라 부른다. 경연(1455∼1494)은 조선 세조와 성종조에 바로 효촌리에서 살던 사람으로 좌랑 신직의 아들이요 호를 남계라 하였다. 학식이 높고 효성이 지극한 그가 아버지의 병환을 맞게 되자 보던 책을 아예 덮어 버리고 아버지 곁에 붙어 앉아 시중을 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병석의 아버지는 아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차도가 있지 않았다. 병자는 다 꺼져가는 몸에 입술을 겨우 움직여 잉어회가 먹고 싶노라고 했다. 아들은 어구를 급히 마련해 가지고 앞 도랑가 웅덩이에 이르렀다. 허나 철기가 마침 엄동설.. 2019. 6. 10.
옛 이야기 - 꼬마 현초동(때는 이조 문종 때) 해마다 열리는 과거에서 전국 방방곡곡의 선비들이 모여 시제를 앞에 놓고 훌륭한 문장을 써내려고 온갖 안간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윽고 얼마만에 답안지를 쓴 사람들이 하나 둘 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험이 끝난 것이다. 선비들이 다 퇴장하고 나서 한참만에 호명관이 『장원에 현초동이요』하고 외쳤다. 이 때 사람들은 저마다 장원으로 호명된 사람을 찾는양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저럴수가?』 『저건 꼬마가 아니야?』 『누가 아니래 글쎄 ?』 저마다 놀라움에 찬 말들이 장내에 가득찼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장원으로 뽑힌 사람은 이제 불과 열살이 되었을까 말까 한 코흘리개 정도의 애숭이었기 때문이다. 호명관을 비롯한 참관인들이나 밀양부사마저 이 사실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장원은 결정된.. 2019. 4. 13.
역사속의 이야기 - 춘선과 유신 下 그런 지 세월은 흘러 흘러 50년이 지난 후에 김유신은 삼국 통일대업을 자기 손으로 완성한지라 무엇에 유한이 있으랴! 전쟁이 진정되고 만민이 태평하니 가슴도 흐뭇했다. 이제는 슬슬 왕을 모시고 종묘사직에 배하고 또 이 뜻을 선조에게 고하기 위하여 산음현에 있는 가야국 증조 왕릉에 참배했다. 일생을 나라 위하여 몸을 바친 그는 모든 것이 소원대로 성취되어 부귀영화가 지극하니 세상에 태어났던 사내로서 무슨 유한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펑 돌곤 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조용히 지내온 세상을 돌이켜 보니 나를 위하여 혹은 나라 위하여 몸을 바쳐 희생한 여러 충신 역사들이 눈앞에 암암하여 마음도 괴로웠다. 내가 이렇기 삼국통일에 성공하고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현.. 2018. 11. 30.
역사속의 이야기 - 김유신 지 신라의 귀족들과 연결하지 않으면 출세의 길이 막히어 일생을 허송하게 된다. 때마침 신라에는 당나라에서 들어온 축국이 성행하였다. 바로 선덕여왕 초년에 김유신은 신라의 진골 김춘추와 친근할려고 하였다. 정월 보름날이 되면 모두 약식을 해먹고 이 날 하루를 즐거웁게 논다. 김유신은 이날 김춘추를 청해다놓고 자기 집 근처 넓은 마당에서 축국을 시작하였다. 이 축국은 농주하는 놀음이라고 하였다. 수족을 다 놀리며 차는 경기이다. 한창 재미있게 놀 때 김유신이 마음속에 큰 포부를 품었는지 김춘추의 당의 옷자락을 밟았다. 옷은 소리를 내며 뜯어졌다. 그래도 김춘추는 모르고 있었다. 한참 놀고 난 뒤에 김춘추가 가려고 할 때 소매자락이 터진 것을 보고 『너무 재미있게 노느라고 옷이 터진줄도 모르고 놀았네.』 하고.. 2018. 11. 25.
옛 이야기(고전) - 애란의 비련 봄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늦은 겨울이었다. 신라 서울의 서산인 선도산 동녘에 자리 잡은 애란과 도열의 집이 있는 동네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면 양지가 바르지 못한 골자기에는 아직도 허옇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삼짓날이 인제 며칠 남았지?』 애란이가 가야금을 고르다가 손이 시려서 「호호」입김으로 녹히며 옆에서 노래를 부르던 도열에게 물었다. 『얼마 안남았어.』 『며칠?』 『가만 있거라. 응, 열흘밖엔 남지 않았구나.』 『열흘! 그럼 다 됐네?』 『그래 얼마 남잖았으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겠다. 자 어서 타라.』 애란은 도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도 가야금을 쉬 타려고는 하지 않았다. 『애란아! 너희 아버지가 오시면 또 야단 마지려구…어서 타』 도열이 애란을 재촉했다. 『너는 그렇게 손을 바지춤에 .. 2018. 11. 20.
옛 이야기(고전) - 가난한 선비 왕세자 탄생의 축하연이 벌어졌다. 명활성 내에 있는 궁중은 물론이요 서라벌에는 경축놀이가 계속되었다. 특히 왕가와 귀족들은 음식을 만판지게 차려놓고 춤과 노래를 열흘동안 벌여 왕세자의 탄생을 경축하였다. 신라 20대 자비왕은 용상에 도사리고 앉아 신하들의 배알을 받고 희희낙낙하였다. 왕세자가 탄생한지 십오일이 되던 날 상대등(높은 대신) 홍인관이 어전에 읍하여 아뢰었다. 『상감……』 『상대등 무슨 말인지.』 『상감 왕세자 탄생을 기념하여 신라 방방곡곡에서 기쁨과 노래 소리가 드높게 들리웁니다. 백성들은 상감의 성덕을 찬양하옵고 신라의 부강을 노래하고 있사옵니다. 이처럼 즐거운 경사가 또 어디 있사오리까. 하지만 우리 신라는 문화적으로 훌륭하오나 한가지 빠진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마치 옥에 티와 같사옵.. 2018. 11. 18.
옛 이야기(고전) - 왕건의 호사 / 농사꾼과 벼슬 고려 태조 왕건은 개성근처 예성강을 중심으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왕융(王降)이 처음으로 이 부근의 호족(豪族)으로서 큰 뜻을 품었다. 소년 왕건은 아버지를 따라 예성강에서 수군에 대한 수련을 많이 하였으며 나이 二十세 되는 때는 벌써 궁예가 강성하여 여기까지 그의 세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아들을 데리고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궁예왕의 충실한 일군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한 번 궁예의 부하가 되자 이제부터는 그 부근을 점령하여 궁예왕의 환심을 사기로 하였다. 우신 장군이란 신분으로 개성근처를 점령하고 정주로 내려가 행군하던 중 여름날이 되어 큰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그 앞에 내가 있어 맑은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살벌.. 2018. 11. 10.
옛 이야기(고전) - 임금님의 현몽 전라도 장성 땅에 김춘영이라는 착실한 선비가 있었다. 십년을 두고 공부에만 골몰하던 그는 과거를 보인다는 소식이 전하자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형세가 간구한 그는 나귀를 빌려 탈 형편도 못되었기에 십여일을 두고 걸어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은진 땅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몰리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김춘영은 비를 피할 곳이 없나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들판 가운데는 나무 그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삽시간에 퍼붓는 비로 하여 옷은 물에 빠진듯 젖고 말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거 어떻게 하나.』 그는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천행으로 건너편에 미륵당이 우뚝서 있는 것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2018. 11. 9.
옛 이야기(고전) - 선견지명 고려말 정지성이란 벼슬 높은 대감이 나이 많아지자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아들손자들과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이웃에 김가 성 쓰는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농부 어찌된 셈인지 나랏님 이상으로 정 대감의 덕망을 흠모하고 있어 이 하늘아래 정 대감님 같은 어른은 없다고 여기고 농사일에도 이골이 난 처지였건만 정 대감의 본을 받아 대감이 밭을 갈면 자기도 본따서 밭을 갈았고 대감이 논을 갈면 자기도 논을 갈곤 하여 매사를 꼭 대감이 하는대로만 몇해를 두고 하였다. 어쨌든간에 김가 성 쓰는 농부는 이렇게 해서 다른 때와 달리 많은 수확을 얻어 한뼘 만큼의 논은 이제 제법 그전의 두배 정도로 불어나게끔 되어 집안 살림이 제법 기름기가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대감.. 2018. 9. 6.
옛 이야기(고전) - 양영대군 부왕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모든 영화를 버렸던 양녕대군은 이제는 방탕이란 것이 그에게 있어 버리지 못하는 고질이 되고 말았다. 술과 계집, 그리고 명승을 찾아 유람한다는 것이 최대의 환락이자,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한 그가 오래 전부터 벼르기만 하던 서경 유람의 길을 기어이 떠나게 된 것은, 특히 아우님 왕의 간곡한 부탁과 윤허를 얻고 나서의 일이었다. 양명이 출발에 앞서 고별차 세종께 배알하였을 때이다. 『이번 서경 유람을 윤허 합시어 감격하옵니다』하고 왕에게 아뢰었더니, 세종은 우애에 넘치는 말씀으로 『서경은 색향이라 하옵는데, 혹시 형님께서 건강이라도 해치게 되시지나 않사을지요. 부디 조심하셔서 이번 길에는 주색을 통히 금하시기 바라나이다.』하였다. 이 말은 단지 아우가 형에 대한 걱정에서만이.. 2018. 7. 29.
옛 이야기(고전) - 애란의 비련 봄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늦은 겨울이었다. 신라 서울의 서산인 선도산 동녘에 자리 잡은 애란과 도열의 집이 있는 동네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보면 양지가 바르지 못한 골자기에는 아직도 허옇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삼짓날이 인제 며칠 남았지?』 애란이가 가야금을 고르다가 손이 시려서 「호호」입김으로 녹히며 옆에서 노래를 부르던 도열에게 물었다. 『얼마 안남았어.』 『며칠?』 『가만 있거라. 응, 열흘밖엔 남지 않았구나.』 『열흘! 그럼 다 됐네?』 『그래 얼마 남잖았으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겠다. 자 어서 타라.』 애란은 도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도 가야금을 쉬 타려고는 하지 않았다. 『애란아! 너희 아버지가 오시면 또 야단 마지려구…어서 타』 도열이 애란을 재촉했다. 『너는 그렇게 손을 바지춤에 .. 2018. 7. 28.
옛 이야기(고전) - 함흥차사 저 남산에 가 돌을 깨니 정이 남음이 없네 정도전과 남은이 방원의 손에 죽을 것을 미리 예언한 동요로서 남산은 남은을 가리킨 것이며 정은 정도전을 가리켰고 남음이 없다는 남은을 뜻했다 전해진다. 한양에서 이 동요가 불리울 지음의 이야기다. 여기는 함흥 태상왕 행재소이다. 찾는 차사는 살아 돌아가지를 못하였다. 한사람의 차사가 왔다. 「태상께 금상으로 부터의 문안이오!」 「문안이라고? 세자를 없앤 것이……뉘없느냐? 저놈을 당장에 참하여라!」 태상의 말이 떨어질 겨를없이 차사는 달려온 근신의 칼에 쓰러졌다. 「금상으로부터 태상께 문안이요!」하고 행재소 뜰에 부복하였다. 「이 고얀것! 방석, 방번, 그리고 내사위를 죽인것이! 내 아직 활을 잡을 힘이 있거늘!」 명궁 태상의 손에 활이 잡히자, 차사는 퍽하고 땅.. 2018. 7. 27.
옛 이야기(고전) - 가난한 선비 왕세자 탄생의 축하연이 벌어졌다. 명활성 내에 있는 궁중은 물론이요 서라벌에는 경축놀이가 계속되었다. 특히 왕가와 귀족들은 음식을 만판지게 차려놓고 춤과 노래를 열흘동안 벌여 왕세자의 탄생을 경축하였다. 신라 20대 자비왕은 용상에 도사리고 앉아 신하들의 배알을 받고 희희낙낙하였다. 왕세자가 탄생한지 십오일이 되던 날 상대등(높은 대신) 홍인관이 어전에 읍하여 아뢰었다. 『상감……』 『상대등 무슨 말인지.』 『상감 왕세자 탄생을 기념하여 신라 방방곡곡에서 기쁨과 노래 소리가 드높게 들리웁니다. 백성들은 상감의 성덕을 찬양하옵고 신라의 부강을 노래하고 있사옵니다. 이처럼 즐거운 경사가 또 어디 있사오리까. 하지만 우리 신라는 문화적으로 훌륭하오나 한가지 빠진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마치 옥에 티와 같사옵.. 2018. 7. 26.
옛 이야기(고전) - 왕건의 호사 / 농사꾼과 벼슬 고려 태조 왕건은 개성근처 예성강을 중심으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왕융(王降)이 처음으로 이 부근의 호족(豪族)으로서 큰 뜻을 품었다. 소년 왕건은 아버지를 따라 예성강에서 수군에 대한 수련을 많이 하였으며 나이 二十세 되는 때는 벌써 궁예가 강성하여 여기까지 그의 세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아들을 데리고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궁예왕의 충실한 일군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한 번 궁예의 부하가 되자 이제부터는 그 부근을 점령하여 궁예왕의 환심을 사기로 하였다. 우신 장군이란 신분으로 개성근처를 점령하고 정주로 내려가 행군하던 중 여름날이 되어 큰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그 앞에 내가 있어 맑은 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살벌.. 2018. 7. 24.
옛 이야기(고전) - 임금님의 현몽 전라도 장성 땅에 김춘영이라는 착실한 선비가 있었다. 십년을 두고 공부에만 골몰하던 그는 과거를 보인다는 소식이 전하자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형세가 간구한 그는 나귀를 빌려 탈 형편도 못되었기에 십여일을 두고 걸어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은진 땅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몰리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김춘영은 비를 피할 곳이 없나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들판 가운데는 나무 그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삽시간에 퍼붓는 비로 하여 옷은 물에 빠진듯 젖고 말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거 어떻게 하나.』 그는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천행으로 건너편에 미륵당이 우뚝서 있는 것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2018. 7. 23.
옛 이야기(고전) - 선견지명 고려말 정지성이란 벼슬 높은 대감이 나이 많아지자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아들손자들과 농사를 지으며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이웃에 김가 성 쓰는 농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농부 어찌된 셈인지 나랏님 이상으로 정 대감의 덕망을 흠모하고 있어 이 하늘아래 정 대감님 같은 어른은 없다고 여기고 농사일에도 이골이 난 처지였건만 정 대감의 본을 받아 대감이 밭을 갈면 자기도 본따서 밭을 갈았고 대감이 논을 갈면 자기도 논을 갈곤 하여 매사를 꼭 대감이 하는대로만 몇해를 두고 하였다. 어쨌든간에 김가 성 쓰는 농부는 이렇게 해서 다른 때와 달리 많은 수확을 얻어 한뼘 만큼의 논은 이제 제법 그전의 두배 정도로 불어나게끔 되어 집안 살림이 제법 기름기가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대감.. 2018. 7. 22.
옛 이야기(고전) - 적선지가 (하) 지난 줄거리 박시양이라는 선비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노모를 모시고 끼니 연명도 어렵게 살았다. 그리하여 옛날 자기 집에서 부리던 종들을 찾아가서 종문권과 교환하여 얻은 필목과 그리고 대대로 물려받은 그림 한폭을 마지막으로 내다 판 돈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 사람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막한 사정을 보게 되는 박시양은 갖인 필목과 은자를 모두 주어 그들을 구하고 귀향 길을 재촉하는데 은혜을 입은 자가 감격하여 박시양의 옷소매를 붙든다. 그러나 이 모녀는 꼭 죽게 된 목숨을 태산 같은 은혜을 입어 살아났으며 모녀가 은인을 따라가서 하다 못해 밥이라도 끓이고 심부름이라도 해드려야 겠다고 보따리를 꾸려 따라나서는 것이다. 박생은 집안 형편이 몹시 가난하여 모친과 단 두 식구건만 오히려 밥을 굶는 날이 허.. 2018. 7. 15.
옛 이야기(고전) - 적선지가 (상) 이조 효종때의 일이었다. 충청도 조치원에 박시양이라고 하는 선비가 살았다. 일찍이 부친이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서 십년 동안이나 글만 읽으며 지나보니 어느듯 얼마되지 않는 재산을 모두 곶감 빼어먹듯 써버리게 되어 늙은 모친을 모시고 그날그날 먹고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해 겨울식량이 떨어져서 온종일 꼬막 굶고 있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모친이 하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시집올 때 끼고 왔던 금가락지를 팔아오게 하여 비로서 저녁밥을 지어먹게 되었다. 저녁밥을 마치고 모친은 문득 의상 속에서 문서 보따리를 내어놓고 뒤적거리다가 종 문권을 한 뭉치 내어놓았다. 「이것은 너의 조부시대에 부리던 종들의 문권인데 너의 부친때 와서 집안형편이 가난해지니까 저희들끼리 떼를 지어 도망을 쳤는데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2018. 7. 14.
옛 이야기(고전) - 대도 장팔이 (하) 형이 집행될 새남터로 행하는 거리에는 벌써부터 소문을 듣고 몰려온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에 짜하게 이름난 대도 장팔을 한번만이라도 보려고 모여 든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목을 늘였다. 그나마 영문을 모르는 사람까지도, 도대체 무슨 구경이기에 이다지도 야단법석들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면서, 역시 군중들 틈을 비집고 끼어 드는 것이었다. 「저기 장팔 온다. 울지마라!」 하면 보채면 아이도 이내 울음을 그친다는 그다지도 떨치던 협도 장팔이, 서울 장안 오부중에서도 남촌 아랫대에 사는 빈민들에게 있어서는 장팔은 그야말로 고마운 신령님처럼 섬겨졌다. 끼니를 굶고 아침 죽 거리가 없는 집에는 의례 한밤중이면 장팔이가 바람처럼 나타나서 로방에 엽전 몇 잎씩을 놓고 간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널리 알려진 .. 2018.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