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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조견과 망경봉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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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과 망경봉의 유래

고려조에 절개를 지켜 이씨 왕조에 신사하지 아니한 사람들 가운데 조견이란 자가 있었다. 자는 종견이지만 원래의 이름은 윤이요 본관은 평양이다. 그는 고려조에 신사하여 벼슬이 지신안렴사에 이르렀고, 이조에서는 평양 부원군·개국공신·평간공으로 추증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씨 왕조의 개국공신에다 영의정까지 지낸 문충공 조준의 동생이다.

 

 

 


조견은 고려의 국운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자, 관직을 버리고 청량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얼마 안가서 이씨가 조선왕조를 개국하자, 그의 형 준은 동생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조선조의 개국 공신록에 아우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은 이름을 윤에서 견으로 고쳐, 이씨 왕조에 신사하지 않을 뜻을 밝혔던 것이다. 1

 

그 뒤 태조 이성계도 친히 청량산을 방문하여 벼슬을 주고 출사하기를 권유했지만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만년에 그가 죽음에 임하여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내 묘표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벼슬을 기록하고 자손들은 결코 새 왕조에 벼슬하지 마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그의 후손들은 이 말을 어기고 이씨 왕조에서 준 벼슬을 묘비에 새겨두었더니 어떤 날벼락이 떨어져 그 비석을 깨트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현손 부는 명종 임자에 급제하여 관직이 부윤에 이르기도 했다.
앞서 견은 형 준이 새 왕조건설에 가담할 뜻이 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집은 대대로 고려조에 벼슬한 집안이 아닙니까,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존망을 같이 해야합니다」
하고 간언했다. 이에 준은 아우의 마음가짐과 그의 뜻을 빼앗을 길이 없음을 알고, 송도를 떠나있게 하기 위해서 연거푸 영남안찰사로 부임케 했다. 그러나 임기가 차서 돌아오기도 전에 고려가 망하니 그는 대성통곡하며 두류산이 들어가고 말았다. 태조는 그를 발탁하여 호조전서에 임명하고 글을 보내어 신사하기를 청했으나 공은 다만,
「송산의 고사리 캐기를 원할 뿐이요.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답할 따름이었다.

 

이 이후 견은 자를 종견이라 했다. 그 이유인즉, 나라가 망했는데도 죽지 않았음은 개보다 못한 놈이며, 개도 그의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견은 두루산에서 다시 청계산(註2)으로 옮아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를 바라보고 통곡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망경봉이라 이름 지워 불렀다.
태조도 그의 절개를 칭찬하고, 왕이 아닌 일개 촌부의 자격으로 만나기를 청하고, 그가 은거하던 청계산으로 그를 찾았다. 그랬더니 공은 다만 주인으로 손님을 맞는 예로, 손만올려 읍을 하고 절은 하지 아니 했다. 태조도 이런 행위를 굳이 탓하지 아니 하고, 돌아갈 때 좌우 신하에게 명하여, 청계산의 한 지역을 그에게 봉해 주도록 하고, 돌집도 지어 주어 여생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거절하고 다시 그곳을 떠나 양주땅 송산으로 옮겨 살며 스스로 호를 송산이라 불렀다.

 

주1. 견이란 글자는 논어 가운데의 「견자유소불위」란 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그 뜻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주2. 청계산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곧 망경대다.

 

◇김주의 기일

 

김주도 고려조에 절개를 지켜 이씨 왕조에 신사하지 아니한 사람가운데의 하나다. 자는 택부라 했고 호는 농암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1392)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에 돌아오지 아니했던 고려조의 유신이다.
김주는 명나라에 하절사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강 건너 고국 땅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더니 가만이 조복과 신발을 종에게 내어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아뢰어라. 가족들은 이 조복과 신발을 내 자신으로 알고,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이것과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도록 하고, 또 내가 도로 명 나라에 들어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도록 아뢰어라」
하고, 다시 돌아서서 명나라로 가버렸다.
명으로 돌아온 그는, 명 태조를 배알하고 고려 망국의 사실을 고하고, 명 태조에게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의 죄 묻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태조는,
「제왕이 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이 있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인력으로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하며, 다시 묻기를,
「너는 너의 나라에서 무슨 벼슬에 있었느냐」고 했다. 공은 실망의 빛을 가누지 못한 체 힘없이,
「예의판서로 있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로 해서 명 태조는 공에게 종신토록 관서에 해당하는 명나라 상서의 녹을 주었다.
공은 이후 명 나라 형초 지방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았다. 임진의 난이 일어남에 명나라, 군사가 조선 땅에 오자, 그 가운데 유격장군 허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칭 공의 외손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공이 압록강에 돌아와 종을 시켜 조복과 신발을 돌려보내면서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운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오. 그러하니 내가 비록 강을 건너 고국에 가도 몸 둘 곳이 없소. 돌아가지 않는 나를 너무 탓하지 마오. 오늘 내가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나라로 돌아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아 주시오. 그리고 장사 지낸 후에는 지문과 묘잘을 하지 말아주시오」라는 사연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자손은 대대로 12월 22일을 공의 기일로 삼고 제사지내니, 이 날이 곧 공이 압록강에서 부인에게 글을 보낸 그 날이다.

 

만력 정유(1597년) 가을에, 명나라에서 일본에 간 책봉사의 일행 중에 막하관 허유성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본에 가던 길에 동래에 들려, 그곳 사람들에게 그가 공의 외손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주는 형초 지방에서 장가들어 세 딸을 낳았는데, 자기는 공의 사위 가운데의 한 사람인 허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동래에 들렀던 허씨는 신곡에 사는 김씨들을 만나 보고자 동래 사람들에게 부탁했으나 그곳 사람들은 김주의 본관이 선산이라는 것만 알고, 신곡이 옛날 김주가 살던 마을 이름인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국 땅에 살던 후손들은 서로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고전고전

 

원본글 : 산림조합 산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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