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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천추태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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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양이 목종을 없애려는 음모는 꾸준히 계속 되었다. 눈치를 챈 목종은 더없이 몸조심을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김치양을 대역죄로 몰아 참형이 처하고 싶기도 하나, 그렇게 하면 어머니인 천추태후도 다치게 될 것이고, 사실은 목종에게는 그럴만한 실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서기 1009년 정월이 궁궐 가까이 불이 났다. 그 불의 내력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해가 목종이 등극한 지 12년째 되는 해다.
그 날은 달이 밝아, 목종이 상정전에 나와 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해 들어 첫 반월이라 감회가 깊다 저 달처럼 나라가 원만하고 평온하기를 바라고 싶다."
그만큼 목종은 심중이 괴로운 것이다 곁에 서 있는 신하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궁궐 가까이에 있는 기름창고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기름 창고에 불이 붙었으니, 불기둥은 대단했고, 삽시간에 태후의 거처인 천추전을 휩싼다.
 "아니, 웬 불인고? 천추전까지 타지 않는가."
목종은 천추전이 타는 것이 걱정인 것이다. 자기를 해치려는 모후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다.
 "태후께서는 피신하시었다고 하옵니다."
어떻게 해서 알았는지 한 궁녀가 임금의 염려를 덜어준다.
마음의 평온을 찾은 목종은 그 순간에도 곰곰 생각한다.
 (궁성에 불을 지르고 내 목숨까지 엿보니 어찌 믿고 살꼬.)
한숨이 무겁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불은 김치양 일파가 지른 것이다. 궁성이 불타는 북새통에 왕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었다. 시체가 불에 타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목종을 호위하던 호부시랑 최사위는 임금의 신변을 철통같이 경비했다.
충격을 받은 목종은 주눅이 들어 전전긍긍하게 되고, 겁에 질려 헛소리를 하며 나라 일은 아랑곳없이 자기 신변보호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지경이니, 약한 마음은 더욱 약해지고 마침내 앓아 눕게 되었다. 세상만사가 귀찮아 모든 일 다 집어치우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다만 상서도성(=육부를 통할하는 관청)의 좌사랑중(정오품) 유 충정과 합문(조회의 의식을 맡은 관청)의 사인(=종삼품 벼슬) 유행간 두 사람만 가까이 두고 모든 일을 일임했다.
유충정은 충직하여 목종의 총애를 받았고, 유행간은 잘 생긴데다가 구변 좋고 재주꾼이다.
김치양은, 임금의 호위가 삼엄해지자 손을 못 쓰고, 먼저 유충정과 유행간을 손아귀에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치양은 먼저 유충정을 불러 마음을 떠 보았다.
 "나하고 큰일을 도모함이 어떠하오 ? " 유충정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글쎄올시다. 저같이 미련하고 재주도 없는 못난이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틀렸다고 생각한 김치양은 유행간을 불렀다. 유행간은 달랐다.
 "좋습니다. 우목야께서 써 주신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어차피 목종은 실권 없는 등신이고, 게다가 병약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차라리 김치양에 붙어서, 그 소생이 등극이라도 하는 날이면 부귀라도 누려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유행간은 김치양의 사람이 되어 목종을 감시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달라진 데 눈치챈 유충정은 유행간이 없는 틈을 타서 목종에게 고해 바쳤다.
 "전하, 김치양이 대사를 도모하는 눈치고, 유행간을 조심하옵소서." 목종은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으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유행간마저 돌아서면 급하다.
중추원(왕명의 전말. 국가안보를 맡은 관청), 부사(정삼품 벼슬) 채충순을 불렀다.
채충순은 겸손 강직하여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
채충순이 침전에 부복하자,
 "가까이 오오."
하고, 손짓을 했다.
채충순은 할 수 없이 가까이 가서 더욱 몸을 굽혔다.
 "더 가까이, 얼굴을 드오. "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되었다.
 "짐의 신병이 심하니 도와 주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소. 왕위를 엿보는 자가 있소."
조용한 임금의 말을 듣고 있던 채충순은 그제서야 망설이면서도 목종의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아뢴다.
 "신도 들은 바 있사오나, 일이 막중하와 발설을 못 하고, 증거 탐색하는 중이옵니다. "
 "김우복야가 대량군에게 자객을 보냈고 유행간과는 내통이 있고, 유충정과도 대사를 도모함이 어떠냐고 하더라오."
 "성상께옵서 거기까지 아옵시게 되었다면 일이 급하옵니다."
채충순도 낯빛이 변하며 그 말소리마저 떨린다.
 "짐의 병이 심상하지 않으니, 무엇보다도 후사를 정하는 일이 급하오."
 "황공무지이오나, 그러한 줄로 아옵니다."
 "그런즉, 대량군 밖에 누가 있소? 태조대왕의 혈통을 이었을 뿐 아니라, 인품이 국왕으로서 모자람이 없소."
인품도 인품이지만, 무엇보다도 왕가의 혈통을 잇는 데에 더 뜻이 크다.
 "신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응, 그러나 이 일을 해 내는데, 믿을 사람이 없소. 경과 최항 같으면 어느 모로 보나 믿을 수 있소. 최항과 의논해서 후사 옹립에 힘써 주오"
최항은 그 무렵 중추원사(중추원 최고 책임자. 종이품)로 있었으니, 부사인 채충순의 바로 상관이다 채충순은 최항을 만나 목종의 뜻을 전했다.
최항도 모르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 할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을 짐작했다.
 "신혈사에 사람을 보내어 대량군을 모셔옵시다."
이리하여, 선휘판관으로 있는 황보 유의에게, 무반낭장으로 있는 문연으로 하여금 장병 십여 명을 이끌고 따르도록 하여, 그 일을 맡겼다.
대량원군만 모셔 오면 어쩐단 말인가, 워낙, 김치양이 병권을 쥐고 있지 않은가.
 "김치양 일당을 응징할 만한 충신은 없을까."
최항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서울에는 없습니다."
 "그렇소. 한 사람, 서북면 도순검사로 가 있는 강조가 좋을 듯하오."
 "사납다던데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이 용감하고 북녘 국경은 지키고 있으니, 그가 거느리는 장졸이 대단하오. 김치양을 누를 힘은 그 사람에게 밖에 없소. 그는 우직한 데가 있으니 잘 달래면 가망이 있소."
 "그렇다면 상감께 아뢰어 불러옵시다."
목종은 그 말을 듣고 강조에게 밀서를 보냈다.
 <일이 급하니 전군을 이끌고 입경하여 궁성을 경호하라.>
밀서를 받아 본 강조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한다.
 (조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러나, 왕명이다. 장졸을 몰아 서울로 떠났다.
강조가 대군을 몰아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서울에 퍼졌다.
김치양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김치양은 놀라 자빠질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대비책을 강구했다.
내사문하성(서무를 총괄하는 최고 관청)의 내사구서(종칠품 벼슬)로 있는 위종경과 또 한 사람 최창화 두 사람은 불행 길을 떠났다.
강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서울을 향하여 급행하다가 도중 용천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강조에게 인도를 받았다.
 "강 장군께 긴히 여쭐 말씀이 있소이다."
 "무슨 일인고?"
 "서울행은 중지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강조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반문한다.
 "어째서 ? "
 "장군의 신변이 염려되어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러합니다."
 "내 신변이 염려되다니."
우직한 강조는 위, 최 두 사람의 간교한 꾀를 알아채지 못했다.
 "상감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다가 끝내 승하하셨는데, 그 틈을 타서 김치양이 자기 소생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고 대사를 도모하고 있소."
 "그래 ? "
이번에는 강조가 놀란다.
 "그러니 장군의 신변이 위험할 것 아닙니까?"
 "어째서 ?"
우직한 강조는 용기만 대단했지 권모술수에는 머리가 돌지 않는다.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김치양이지만, 다만 장군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장군께서 호락호락 김치양에게 복종하지 않으실 것이니 꾀를 써서 장군을 없애 버리려고 상감의 밀지를 위조해서 장군을 불러·…‥"
 "음···…"
그제서야 강조가 신음 소리를 낸다. 저 딴에는 알았다는 뜻이다. 겉으로만 알았지 속은 모르면서.
 "서울로 가는 요소마다 수비군을 배치하여 오직 장군 한 분만을 없애 버리려고 잦은 짓을 다하고 있으니, 아무리 장군께서 용감하다고 하시더라도 지금 당장은 어찌 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서울행을 중지하셨다가 후일을 도모하심이 옳은 것입니다. "
우직한 강조는 그만 위, 최 두 사람의 계략에 완전히 녹아나 버렸다.
 "큰일날 뻔했구먼. "
전후 사실을 더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임지로 되돌아가 버렸다.
천추전이 타 버린 뒤 목종은 주눅이 들어 앓아 누운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항간에서는 혹시 승하하지나 않겠나 하고 의심도 했다.
목종이 승하했는지 아니했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는지라 어느 쪽으로든 제멋대로 상상을 할 뿐이다.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김치양은 강조의 나타남으로 태도가 돌변했다.
강조가 일단 돌아가기는 했으나, 언제 상감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쳐들어올는지 모른다. 더구나 인제는 그냥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김치양은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을 철통같이 지키게 하고 사람의 내왕을 끊어버렸다. 서울 소식이 강조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래 놓고 내친 김에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상감이 승하하셨다.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아들로 그 뒤를 잇게 한단다.
-왕씨는 없어지고 김씨 사상이 된다.
-잘 살려면 김씨 일파에게 곱게 보여야 한다.
-왕가의 어른은 천추태후다.
후가 낳은 아들이 임금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김치양이 나라를 휘어 잡는다.
별의별 소문을 퍼뜨리니, 세상은 뒤숭숭하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러한 뜬소문을 믿고 비분 강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 중에 강조의 아버지도 있다.
강조의 아버지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를 엉뚱한 김가에게 넘기다니 안 될 말이다)
강 노인은 참다못해 아들에게 밀서를 썼다.
 <상감이 승하하시고, 나라가 김치양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니 급히 내경하여 사직을 바로 잡으라.>
밀서를 자기 지팡이에 감쪽같이 숨겨 아무 흔적이 없이 해 놓고는, 가장 믿는 하인 하나를 불렀다.
 "네 머리를 깎아야겠다"
 "나리께서 깎으신다면 어찌 감히 타언을 여쭈겠습니까"
머리를 박박 깎고 난 강 노인은 그 하인에게 밀서를 전하는 임무를 일러주었다.
 "너는 모향산 중이 되어서 서울을 빠져나가 지팡이 속의 밀서를 내 아들에게 전해라."
하인은 중의 행색으로 집을 나섰다. 서울로 통하는 관문은 개미 한 마리 지나갈 수 없게 경비하고 있고, 만일에 들키는 날이면 살아 남지 못한다.
서울 나갈 관문은 과연 경계가 삼엄했다.
중을 본 수비병이
"어디 가오 ?"
하며, 앞길을 막는다.
 "묘향산 탁발승으로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올시다. 나무아미타불."
 "스님이라 하더라도 그냥은 못 가오. 들고 진 것을 모조리 내려놓으시오."
 "예, 법대로 하셔야지요."
하인은 지팡이, 목탁, 바랑들을 모두 내려 놓는다.
수비병은 내려놓은 물건과 하인의 몸까지 이잡듯이 뒤졌으나, 지팡이의 비밀을 캐내지 못했다.
 "좋소. 가시오. "
토끼가 용궁에 갔다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하인도 호랑이 입에서 빠져 나온 기분이었다.
이런 고비를 몇 차례 넘긴 하인은 죽을 힘을 다해서 강조의 진영에 닿을 수 있었다.
강조에게 밀서를 전한 중 행색의 하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고 전한다.
밀서를 본 강조는 아연 긴장하는 (상감은 승하하고, 김치양 일당을 없애어 사직을 바로 잡으면, 그 때는 이 강조의 세상이다.)
저번에 서울로 가다가 도중에서 되돌아온 강조는, 그러잖아도 후일을 도모하여 오천 군사를 확보하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임금을 내 맘대로 세우고, 문무 백관이 나를 우러러 엎드린다. 김치양과 같은 졸장부는 나의 적수가 못된다.)
강 조는 도순검 부사 이현운에게 나라 형편과 이제부터 할 일을 털어 놓았다.
약삭빠른 얌체 이 현운은 이 기회에 한 몫 보아야겠다고
"지당한 말씀이오.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장군 말씀대로 입경하여 공을 세웁시다.
강조는 오천 정병을 거느리고, 이현운 등 부장들과 함께 깃발을 날리며 위풍당당히 서울을 향하여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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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글 : 산림조합 산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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