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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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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조 초엽 어느해 가을이었다.
청운의 큰 뜻을 품고 부지런히 학업을 닦기에 여념이 없던 김안국은 이날 밤도 역시 사랑에서 불을 켜지 않은 채 교교한 달빛 아래에 또렷또렷이 비치는 책장을 넘겨가며 홀로이 명랑한 음성으로 글을 낭독하고 있었다. 옥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였건만 어느 대목에서는 마치 지금의 폭군(연산군)을 저주하는 원성과도 같았고 어느 글귀에 가서는 흡사히 이 세상을 고소하는 야유와도 같았으며 그리고 어느 구절에 이르러서는 꼭 백성들을 동경하는 호곡과도 같았다.
그같은 원성, 그같은 야유 그리고 그같은 호곡이 때로는 폭포 내리 쏟듯 때로는 냇물 구비치듯 높게 모질게 그리고 우렁차게 월광을 따라 사면으로 퍼져 나갔다.

이때였다. 서늘한 바람을 타고 은은히 흘러오는 글 소리에 평소부터 은연히 마음 속으로만 김안국을 사모하던 그 연배의 이웃집 처녀는 이날따라 유난히도 못 견딜 것 같은 심정이었고 산란한 심회였기에 참지 못하여 필경은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풀잎의 이슬을 튀기면서 가만 가만이 담 쪽으로 다가갔다.
한숨을 쉬-하고 내쉬던 처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채찍질하며 넌지시 담 넘어 맞은 편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반사되는 김안국의 모습이 곧장 시선을 따라 처녀에게로 들어왔다.
순간, 처녀는 흠칫했다.
그다지도 연모하던 그리고 비로소 대하는 상대방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처녀의 가냘픈 두손이 바르르 떨리며 담 용마루를 굳게 잡았다.
곧이어 처녀의 몸은 성큼 이쪽에서 저쪽으로 굴러 내렸다.
백번 천번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급기야 대담하게 담을 넘어간 것이다.
처녀는 드디어 김안국이 있는 사랑앞까지 이르고 말았다.
『도······』
모기 소리만 한 소리가 처녀의 입에서 떨리면서 새어 나왔다.
설레이기만 하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면서 겨우 한마디 내뱉은 것이 그나마도 나오다 말아버린 것이다.
『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쁜 숨소리만이 연거퍼 터져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글 읽기이 열중되어 미처 알아듣지 못했던지 김안국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도련님! 』
세번째에야 비로소 제대로 나왔고 또한 제법 음성도 높았다.

불현듯 김안국의 눈길이 책으로부터 비켜졌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김안국의 안광에 비친 것은 분명 아릿다운 묘령의 처녀였다.
진정 만발한 향기로운 한떨기 꽃이었다.
『소저는 어느 댁 규수이며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 』
한동안, 소곳이 머리 숙이고 있는 처녀를 의아스럽게 바라보면 김안국의 입에서는 종당 이같은 말이 나오고 말았다.
『………』
짐짓 주저주저 할 뿐 처녀는 함구무언이었다.
다만 몸을 한번 부르르 하고 떨었을 다름이다.
처녀에겐 말이 있을리 없다. 그런대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마침 중천 높이 보름달을 스치면서 기러기 한떼가 처량하게 울면서 지나갔다.
김안국은 처녀의 마음을 알것 같았다『저 기러기들을 보시오. 비록 한낟 미물에 불과하지만 저렇듯 앞장 선 놈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날아가고 있지 않소?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서쉬고 있을라 치면 반드시 그 중에 파수보는 놈이 있어서 저희 무리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렇듯 금수에게도 규률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에게 어찌 그런 법이 없을 것이겠소.』
『………』
『이른바 예절이니 도덕이니 하는 그것이 곧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으뜸가는 규률일 것이오.』
『………』
『하물며 사대부의 자손인 우리로서 대대로 전해진 인륜을 저버린다면 기러기만도 못할 것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된 보람이 있을 것이오. 더 말하지 않아도 이만하면 능히 그대로서 내 말뜻을 알아 들었을 것이니 그대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거던 지금 이 자리에서 종아리 맞을 차비를 차리시오.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니까·‥…』

김안국은 점잖게 꾸짖는 동시에 위엄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박속같이 흰 처녀의 보드러운 다리통이 드러났다. 의당한 꾸짓음이며 의당한 명령이라 종아리를 맞고자 부끄러움을 무릅쓰면서 치마자락을 걷어 올린 것이다.
우선 매 한대가 사정없이 떨어졌다.
『철썩』
처녀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안했다. 처녀의 눈에서는 구슬같은 눈물 방울이 뚝! 하고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고 연약한 처녀의 종아리는 빨갛게 피가 맷혔다.
김안국은 힘차게 들었던 회초리를 그대로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만하면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는 매를 한번 맞은 뒤 마음과 행실을 고쳐 참사람될 것을 약속했다.
참으로 정대하고 위엄있는 김안국의 처사에 처녀는 한없이 감격하고 물러나왔던 것이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중종조 기묘년 2월-·
일찌기 반정으로 말미암아 폐위를 당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중종대왕은 점차로 연산군의 학정을 고치는 한편에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시려 했다.
상감은 당시 유림의 영수로서 명망이 높은 조광조라는 젊은 선비를 등용하였다.
그같은 상감의 지우하심을 받고 대사헌에 오른 조광조는 즉시로 유능한 지사들을 자기파로 등용시켰다. 그리고는 시세와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유교주의로써 자기들의 이념인 당우지치, 다시 말하자면 당나라 때와 같은 문화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심도 마치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일시에 그들 조광조 일파에게로 쏠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은 젊은이들이었던 때문인지 정책이 다소 급진적이었고 또한 그들의 수단이 약간 과격했다.
그래도 보수적인 면인 상감의 처지로서는 차차로 그들의 하는 일이 싫어질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서는 혹시 정권에 그 어떠한 영향이나 미치지 않을까하는 의혹도 떠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다 상감에게 맹렬히 무고하는 무리들까지도 있었으니 곧 그네들은 상감의 총애를 받아온 조광조 일파를 은근히 미워하던 남곤, 심정 등 열 두 사람의 간신들이었다.
그네들은 전해 즉 무인년 여름에 지진이 무릇 세번씩이나 일어나서 태묘며 인가들의 지붕 기왓장들이 떨어져내렸던 것과 또 밀양에서는 이상스럽게도 뉘어져 있던 버드나무가 별안간 벌떡 곤두서서 그 높이가 스무척이나 되었던 그러한 예들을 들어 이러한 괴변은 조광조 일파들이 조정일을 그르친 까닭이라고 상감에게 엉뚱한 참소를 했다.
게다가 심지어는 나무잎에 꿀로 조왕이라고써서 그것이 다르자 벌레로 하여금 그 꿀로 쓴 조왕이라는 두 글자대로 잎사귀의 달콤한 부분만을 파 먹게 한 다음 그 나뭇잎을 상감에게 바치며 이러한 조화야 말로 조광조 등이 조정을 전복시키고 찬위를 할 징조임에 틀림없다고 까지 모함했던 것이다.

그런 중 아니나 다를까, 앞날을 우려하는 나머지 그처럼 험악해진 양파간의 관계를 조정해 보고자 그토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이조판서 신상(조광조 일파의 한사람)의 눈물겨웠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네들 남곤, 심정 등 간신배들은 이 해에 들어서면서부터 더 한층 상감의 마음을 공명시기기에 현안이 되더니 급기야 동짓달 보름날에는 위선 신무문을 열고 은밀히 후원으로하여 침전에 나아가서 상감에게 밀계한 후 곧이어 군사들을 시켜, 역적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조광조 일파를 잡아다 대궐뜰에 납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그같은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조광조 일파가 붕당옥의 그물에 걸려들었을 때 조정의 삼사 공론을 주장하는 젊은 명사 가운데에는 마침 형제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형은 교리지위였고 아우는 정인 벼슬이었다.
그들 형제는 다같이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어머니의 교훈을 받았음이 컸는지라 어머니를 오히려 스승으로 섬기다시피 하며 존경하는 편이었다. 더욱이 아버지가 별세한 후로 그들 형제는 더 한층 홀로 된 편모를 경모하여 대소사를 막론하고 어머니의 의견을 들어 그 지도를 따라 자기들의 태도와 주장을 결정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이렇듯 변국을 맞이하자 본시부터 남곤을 추종하여 오던 그들 형제는 자연 남곤의 반대파인 조광조의 일파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제는 입궐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요즈음 벌어진 일을 대강보고하고 자기들과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조광조 일파중에서 아직 하옥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마저 간신으로 탄핵하여 처벌할 것을 주장하려 한다는 자기들의 의사를 말했다.
그리고는 관복 소매속으로부터 당일로 가지고 가려던 상소를 꺼내서는 그 의견을 물으려고 어머니께 바쳤다.
아들로부터 초안을 받아든 어머니는 정중히 펼쳐 들더니 한 구절 한 구절씩 또박또박 입속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죄의 경중, 아니 그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직접 생과사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서가 될지도 모르겠기에 신중히 심중으로 다져 보기도 하고 판단해 보기도 하며 세밀히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중간쯤 이르러서였다. 갑자기 부인의 두 눈길이 한 곳에서 멈췄다.
어느 한 구절을 응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김안국! 』
드디어 부인의 입에서는 이같은 놀라움에 가까운 심상치 않은 한 마디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이가 혹시 3년전에 경상 감사를 지닌 김안국이 아니냐?』
이윽고 초안 속에 들어있는 여러 이름 중에서 김안국의 성명 석자를 가리키며 황망히 묻는 부인의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일시에 두 형제는 대답했다.『그래, 어찌된 사연이냐? 』내용을 읽어보면 알 것이련만 조급한 심정에 부인은 이렇게 물었다.
『그 자로 말하면 벌써부터 명성이 온-천하에 떨치다시피 한 인물이어서 지금 세상 사람들이 그를 모재 선생이라고 호까지 지어 부르며 숭배하지만 기실……그 자는 간흉한 무리로 참판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광조 등과 더불어 당을 모아 조정을 전복시키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만고의 역적입니다.』
형제는 사못 기염을 토하듯이 일장의 설명을 하고 나서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그 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
하고 아까부터 어머니의 기색과 말투를 수상하게 생각한 아들들이 물었다.
그러나 부인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다. 오로지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만이 부인의 얼굴을 감싸 돌았다.

잠시 후, 부인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음……그러냐? 그러면 내가 너희들에게 대답하기 전에 한 마디만 하겠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번 일에 대하여 영의정 정공과 좌의정 안당이 상감께 극력 간했다고 하는데그 조광조니 김안국이니 하는 이들이 그토록 간흉한 만고의 역적이라면 그 두분 충신들이 구태여 자기네 신변의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까지 비호할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죄인을 두둔하다가는 자칫하면 자기까지도 그 죄인과 부화뇌동한다는 혐의로 그 그물에 걸려들 염려가 없지 않아 있는 법이니까… 사실 말하자면 지금의 이 부패와 정치를 고치자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응당 하루 바삐 그렇게 해야만 된다. 헌데 단지 자기네 권력과 세도에만 환장들이 되어 가지고서 정작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구하려는 유능한 인물들을 무작정 배척 하려드니 그런 잘못이 어디 있으며 너희들의 처사 또한 그 무엇이냐? 그렇거늘…… 그런 간악한 무리들에게 가담하려는 너희들에게 대하여 소위 어미된 나로서 어찌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겠느냐?』
그다지도 서슬들이 시퍼렇던 형제였건만 시종일관 어머니의 말씀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이 마디마디 폐부를 찌르고 보니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 이런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진작 너희 아버지를 따라 갔더라면……』
울며 말하는 부인이었다. 미쳐 말끝을 맷지 못하는 부인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머리를 숙인 채 그저 묵묵히 쭈그리고만 있돈 두 형제는 일제히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를 우러러 보는 형제의 눈에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감돌고 있었다.
가엽게도 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홀로 과부가 되신 어머니!
그 때문에 외로울대로 외로우셨고 쓰라릴대로 쓰라리셨던 어머니!
오로지 아들들만을 바라고 여지껏 살아오신 어머니였고 그 때문에 무던히 고생도 참아오신 어머니였다.
박복하신 어머니였다.
『어머니!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읍니다.』
『어머니 ! 과히 심려 마십시요.』

두 형제에 의하여 직석에서 그 성토 상소문은 찢어 버려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부인은 가벼히 한 숨을 내쉬며 엄격한 어조로
『너희들은 하마트면 군자들을 모해하는 악명을 천추에 남길번 했구나. 내가 젊었을 때의 일이었는데 김안국 그가 얼마나 존경할만한 큰 선비이며 나에게 큰 은인이었던가…… 그간 20여년 동안이나 감추어 두었던 비밀을 이제야 비로소 너희들에게 고백하련다.』
라고 전제하고 나서 20여년 전, 처녀시절이었던 어느해 가을, 총각이었던 김안국에게 종아리를 맞고 훈육를 받았던 지나간 추억을 더듬으며 자기가 겪었던 그 비밀의 자초시종을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운명, 역사의 변천이란 매양 기구하고도 무상한 것이어서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오늘날, 김안국은 자기를 짝사랑했던,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꾸지람을 듣고 종아리 맞았던 그 처녀의 아들들의 성토 상소문 가운데 탄핵대상으로 적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으로 교외에 나아가 대명하고 있던 김안국은 필경 참회만은 모면하게 되었다.
물론 조광조 일파의 한 사람이었으니 관직 만큼은 파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동지들이 죽음을 당하고 악형을 받았으며 그리고 귀양가게 되었으나 천행으로 김안국만은 엄벌을 모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후세에까지도 유명한 기묘사화라는 것이며 그 사화에 관련되었던 인물들을 세상에서는 기묘명현이라 부르며 추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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