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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임금님의 현몽

by 양화산장 2018. 7. 23.

전라도 장성 땅에 김춘영이라는 착실한 선비가 있었다. 십년을 두고 공부에만 골몰하던 그는 과거를 보인다는 소식이 전하자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형세가 간구한 그는 나귀를 빌려 탈 형편도 못되었기에 십여일을 두고 걸어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은진 땅에 이르렀을 무렵이다.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몰리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김춘영은 비를 피할 곳이 없나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들판 가운데는 나무 그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삽시간에 퍼붓는 비로 하여 옷은 물에 빠진듯 젖고 말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거 어떻게 하나.』
그는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천행으로 건너편에 미륵당이 우뚝서 있는 것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됐다. 저기 가서라로 비를 피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미륵당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허, 참!』

미륵당에 들어선 그는 한숨을 돌리면서 겉옷을 벗어서 말리려 하였다. 이때 미륵당의 문이 황급히 열리면서 사람하나가 또 들어섰다. 김춘영기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뜻밖에도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생각도 않았던 젊은 남녀는 서로가 어색하여 망서렸으나 계속하여 쏟아지는 빗속으로 다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두 남녀는 어쩌는 수 없이 조그만 미륵당안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김춘영이 그 여자를 바라보니 진실로 꽃이 돌아앉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도 몸둘 곳을 몰라 망설이는 모양으로 보아 역시 거북한 것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 동안 가벼운 불안이 돌다가 그들은 묵묵히 조그만 당 안에 앉고 말았다. 어떻든 함께 한 자리에 있게되니 서로 눈치만을 살피는 도리 밖에 없었다.
김춘영은 젊은 여인의 몸에서 냄새가 향긋하게 풍기는 것을 맡자 어쩐지 가슴이 설레는 것을 참을 길이 없었다. 몸이 화끈 닳아 올라오는 것을 걷잡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여인은 여인대로 고개를 돌려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를 원망스럽게 내다보고 있었다. 가슴의 방망이질을 참을 수 없던 것이다.
(혹시나 저 남자가 덤비면 어쩔가)
하는 의심에 사로잡히는 한편, 무섭게 내려쏟는 빗소리를 들을 때에는 듬직한 남자가 곁에 있다는 마음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러한 심정으로 있는 동안에 우중의 날씨는 일찍 저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김춘영은 자칫하면 흔들리려는 심정을 누르면서 앉은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오뉴월의 짧은 밤이 새었다. 새벽이 되자 쉴새없이 퍼붓던 비도 멎었다. 젊은 남녀이었으나 깨끗이 밤을 지내고 보니 아침의 공기가 한결 상쾌하게 느껴졌다.
김춘영은 기지개를 마음놓고 켜면서 일어섰다.
「에이 굉장한 비였군!」
김춘영이 걸었던 겉옷을 간단히 손질하여 의관을 갖추었다. 이때 단정한 남자의 행실에 탄복한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황송합니다만, 어디로 가시는 분이시온지 모르오나 밤새도록 마주 앉았다가 이제 작별하게 된 터에 한마디 인사조차 없을 수 없아오니 서로 통성명이나 하시는 것이 어떠실까요.』

이 말을 들은 김춘영은
『내가 먼저 말을 붙이면 희롱을 거는 것 같아서 차마 입을 못 열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고는 자신의 성명을 대었다.
여인은 이에 대하여,
『그러셔요. 이 사람은 은진 땅에 사는 유우춘의 아내인 윤가입니다. 십리 밖의 친정에 다녀오다가 뜻밖에 비를 만나 하룻밤을 한 곳에서 새게 되었으니 어찌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집은 여기서 과히 멀지 않으니 지나시는 길에 집이나 알고 가십시오.』
이렇게 말하니 춘영은 거절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인을 따라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서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남편도 글을 좋아합니다. 과거를 끝내시고 댁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들려주시지요.』
하룻밤을 한 곳에서 지낸 인연으로 깊은 호감을 품고 서로 작별을 하였다. 마침 그때 아침밥을 마련하던 유우춘의 누이동생이 올케의 목소리를 듣자
『왜 이렇게 늦으셨우?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 하셨우.』
이렇기 물으니, 윤씨 여인은 시누이에게 어젯밤의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그때 마침 밖에 나갔던 유우춘이 시누와 올캐의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내용을 묻자 아내는 미륵당에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순간, 유우춘은 아내의 추잡한 꼴이 머리에 떠오르듯 했다. 의심을 품으면 한이 없는 법. 유우춘은 미주알 고수알 캐물었고 부인 윤씨는 거리낌없이 깨끗함을 주장했으나 남편은 더욱 믿으려들지 않았다. 그의 누이동생이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하면서 올케의 결백을 감싸주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을 뿐 아니라 유우춘은 아내를 당장에 쫓아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큰 일이 생긴 것도 모르고 서울로 올라간 김춘영은 과거를 보았으나 불행히도 낙방이 되고 마니 풀죽은 걸음으로 유우춘의 집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세월의 흐름은 빨랐다.
이듬해에 다시 과거를 보게 된 김춘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을 내어 서울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정조가 침전에 드시었는데 꿈에 도사 하나가 백포 현관으로 나타나서 『이번 과거에 있어서 유성인과 김성인이 뽑힐 것으로 사관들은 유성인을 장원으로 선정 할 것이나 김성인이 지주가 높고 덕이 아름다우니 그를 장원으로 삼게 하소서.』
이렇게 아뢰고 깊이 읍을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의아한 정조는 과거날이 당도되자 시관이 올리는 봉피를 뜯어보았다. 과연 유우춘과 김춘영의 두 사람이었다. 윤씨의 남편인 유우춘도 과거에 응하였던 것이다.

왕은 김춘영을 어전으로 불러 하문하였다.
『네가 무슨 적선한 일이 있느냐?』
하니 별안간의 일이오 또 별로 생각나는 일이 없으므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덕이라고는 없는 몸이라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 말이 왕은 그럴리가 없다고 다시 하문하니 생각다 못한 김춘영은 작년에 비에 좇겨 미륵당에 들어섰다가 어느 여인과 만나 하룻밤을 깨끗이 지난 이야기를 알리고서
『이것은 적선이 아니오라 사람으로서의 당히 지켜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고 토설했다. 그러자 왕은 기꺼이 생각하시고 유우춘을 불렀다.
『여사 한 일이 있었다는데 너와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냐.』
『과연 그러하오나 처를 의심하여 친정으로 보냈아옵니다.』
이 말에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김춘영의 말에 거짓이 없을 것이라 하면서 두 사람을 남매의 의를 맺게 하는 동시에 마침 춘영의 상처함을 아시고 우춘의 누이와 혼인케 하였다.
두 사람은 푸른 하늘 아래에 청개홍개로 고향에 내려오니 꽃도 더욱 붉고 새들의 노래도 한결 맑게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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