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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옛날 이야기

옛 이야기(고전) - 선비 송인수

사람이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어떻게 하면 착하고 훌륭하게 살 수 있는가에 신경을 쓰게 된다.
멀리 이씨 조선 5백년 동안에도 많은 선비들은 겸허하고 착실하게 살아갈려고 몸부림을 쳤다. 선비라고 하면 한마디로 권력과 금력에 때묻지 않고 주색에 방황하지 말 것 등이 하나의 신조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선비들의 규율이 얼마나 엄했는지 여기에 십불고생을 적어보기로 한다.
1. 집을 돌아보지 말 것.
2. 재산을 탐내지 말 것.
3. 먹고 살아갈 것을 걱정하지 말 것.
4. 자식들을 돌아보지 말 것.
5. 가문을 돌아보지 말 것.
6. 친구를 돌아보지 말 것.
7. 여자를 좋아하지 말 것.
8. 술을 즐겨 마시지 말 것.
9. 벼슬을 탐내지 말 것.
10. 풍류를 즐기지 말 것.
등등이었다. 그러니까 훌륭한 선비가 되는 지름길이란 거의 속세를 떠나다시피 해서 경사나 탐독하는 것이 학문을 익히는 첩경이라고 했다. 학문을 익힌다는 것은 세상을 깨우치게 하고 자신의 인격을 기른다는 뜻에서도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비의 자세가 이렇듯이 마치 중이 되기 위하여 삭발을 하고 첩첩산중에서 수도의 고행을 겪는 것 같은 고행이었으니 이씨 조선 5백년에 이르면서 가장 선비다운 선비란 송인수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송인수(충남 논산군 사람)는 불의와 부정에 타협하지 않는 굳굳한 인재로 비록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정사에 종사하는 관리들을 위해서 훌륭한 좌표를 제시하여 청렴결백한 이도를 걸으라고 했다. 선비 송인수는 아무리 묵은 것이라도 후세에게 필요하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또 이롭고 새로운 것은 또 그런대로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는데 인색하지 말라는 주장을 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일깨우는데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늘 신학문을 탐독 연구하면서 후배 양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란 의식주도 중요하지만은 보다도 도의와 예절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선비 송인수는 언필칭 냉냉하고 도도한 선비로 보겠지만 그것은 그의 인품에서 비롯한 선비로서의 고고한 품위를 지키고 있음에서였다.
나라 백성들이 나라 그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방탕생활로 세월을 보내고, 관리들은 관리들대로 안일 무사하다면 나라꼴이 과연 무엇이 되겠는가. 송인수 그는 이러한 점에 착안해서 경륜과 학문을 계도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여러 선비들이 자리를 같이 하면 그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서부터 풍부한 지식과 교양으로 백성을 인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역설을 했다.
오늘도 송인수는 예외없이
「정치를 하는데는 뭐니뭐니해도 경사에 담아 있으니 그 경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인격을 갖추고 판단력을 키워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무의 뿌리가 곧 경사이므로 경사가 얼마나 고귀한 학문인가를 재인식해야 합니다.」
하고 역설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학문을 이어받는 선비나 관리들은 위정자들을 비관하고 힐란하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의 풍류를 지닌 선비나 위정자는 송인수를 싫어할 뿐더러 때때로 그를 반박하기도 했다. 유아독존격이라는 것이었다.
송인수에 대한 반론과 비판 압력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그러한 일이란 일부 선비들 사이에도 그렇지만은 나라 자체에서도 강력한 반발로 드디어는 그에게 사형이라는 구형이 내렸다. 학문을 연구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큰 불행이오 비극이었다.
송인수에 대한 사형이 내려진 처사란 송인수의 학문이 옳은 쪽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뚤게 받아들이는 모순에서 내려진 엉뚱한 처사였다. 생각사록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이었다.
선비 송인수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리고 그는 격동된 분노를 일으킨다.
「도시 무엇 때문에 날 죽이려는 건지 내 자신도 모르겠다!」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리쉰다.
그러나 송인수는 조금도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태연 자약했다.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만은 못하느니라!」
하고 간파한 송인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하나의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선비 송인수는 죽음을 앞두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스럽게 사형장으로 끌리어 갔다.
나라에서 보낸 군졸들이 집안 사람을 시켜서 명주 수건을 드리게 하여 두 눈을 가리게 했다.
「도시 무엇 때문에 내가 죽어가는지 모르겠다!」
하고 슬픔을 삼키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의 학문이 떳떳하게 온 겨레와 국가에 큰 기여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굳게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선비 송인수는 끝내 조용히 이슬로 사라졌다. 무지몽매한 일부 모함자들로 말미암아 굳건히 살아가는 그의 젊음을 빼앗아 갔다.
국가민족을 위해서 높은 기풍과 신학문을 심어주려는 충정이 순식간에 이슬로 사라졌다. 비록 그는 모함으로 빚어진 죽음을 당했지만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라!」
하고 선비 송인수는 외치며 죽어갔다는 서글픈 사연이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학문과 기풍은 후세에 널리 알려져서 그를 추모하고 그의 학문을 연구 자료로 삼고 있다는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선비 송인수가 생전에 생각하고 주장했듯이 그가 죽은 후 얼마 안 가서 개화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여 그를 모함하던 부류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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